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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북위와 한족 지식인의 관계
게시물ID : history_153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7/5
조회수 : 85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14 13:08:35

초창기 선비족을 바탕으로 한 군사국가였던 북위는 시간이 흐르면서 문치주의 국가로 변모합니다. 하지만 북위의 이런 문치주의 국가 변모의 바탕은 북위의 전신인 탁발의로(拓拔猗盧)가 세운 대국(代國) 시대에 대국의 정치에 참여한 한족사대부인 위조(衛操)와 희담이 있었고 십익건(十翼健) 시대에는 연봉(燕鳳), 허겸(許謙)이 있었고, 북위의 건국자인 도무제 탁발규(拓拔珪) 시대에는 장곤(張袞) 등 주로 장성 남변에 살았던 호족 세력들의 참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위의 문치주의적 성향을 촉진시킨 것은 북위의 세력이 화북지역으로 뻗어나가면서 북위 정권에 참여한 산동귀족들의 영향이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도무제 시대 때 활약한 최굉(崔宏)이었습니다. 최굉의 청하(靑河)의 명족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후조와 전진, 후연 등 5호의 여러 정권에서 벼슬하였습니다. 그리고 최굉은 선배격인 장곤 등과 함께 관제와 율령 등 여러 제도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북위의 2대 황제인 명원제(明元帝) 시대의 원훈정치(元勳政治: 명원제를 옹립한 8명의 원훈들이 주도한 정치)에는 오직 홀로 한족 출신자로써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최굉의 아들 최호(崔浩) 무렵에는 한족 출신 사대부(특히 산동사대부)들이 대대적으로 북위 정권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최호는 아버지인 최굉과 함께 도무제, 명원제, 태무제 삼대에 걸쳐 벼슬하여 신임을 받았고, 태무제의 화북 통일 전쟁의 성공에 많은 기여를 합니다. 실제로 태무제는 전승을 기원하는 연회가 열렸을 때, 아름다운 여인처럼 화사한 몸매를 최호를 가리켜 모두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이 사람을 잘 보라, 나긋나긋하고매우 가냘프다. 활도 쏠 줄 모르고 방패도 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가슴 속 세 치에는 대병단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 감추어져 있다. 내가 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사람이 나를 이끌어 주었기 때문이다.」

 

 

신가 4년(431) 태무제는 조칙을 내려 하북 각지의 명사 수백 명을 초빙하여 관직에 임명했습니다. 주요한 인물 면면을 보면 이러하였습니다. 범양의 노현, 박릉의 최작, 조군의 이영, 하간의 형영, 발해의 고윤, 광평의 유아, 태원의 장위 등으로 이른바 산동귀족의 각 집안을 망라하고 있었습니다. 이 중 범양 출신의 노현은 최호의 고종동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북량이나 북연 등이 망했을 때도 그 나라들을 섬긴  이름이 알려진 한족사대부들 다수가 최호의 원조로 북위 정부에 참여했습니다. 이렇듯 태무제 시대에는 화북통일 전쟁으로 무치가 나라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최호 등을 필두로 하는 대량의 한족 사대부들이 북위 정부에 들어오며 문치주의 토대가 마련되는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한족 지식인들이 북위 정부에 참여하면서 최호는 호족(胡族: 북방 민족)적 성향이 강한 북위를 중국식의 귀족 국가로 개편하기 위해 성족(姓族)을 분명히 하는 즉 명망가로서 사회적인 평가 정도에 따라 가문의 신분적 차등을 명확히 규정하는 계급 질서를 만들기로 합니다. 고종사촌인 노현이 '그런 것을 원하는 자는 거의 없다, 아직은 시기상조다.'라고 말하며 반대하였지만 다수의 한족 지식인들 참여라는 든든한 지원군과 그리고 도무제, 명원제, 태무제 3대를 거치면서 쌓은 자신의 실적을 바탕으로 최호는 이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기 시작합니다.

 

 

마침 최호 등은 칙명을 받들어 북위의 국사를 편찬하는 중이었습니다. 최호 등이 집필한 북위의 국사는 그들의 사학관에 철저히 입각하여 북위에 다소 불리한 내용들이 그대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렇게 쓰여진 국사를 석비로 새겨 수도(평성)의 성내에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최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황태자 또한 여기에 찬성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공비 3백만을 들여 국사를 새긴 석비가 줄을 이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이 석비를 천천히 읽어본 그들은 분노를 금치 못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위 제실의 선조인 탁발부족이 북방에서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는 과정을 너무나 객관적으로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황족인 탁발씨를 비롯한 북족(北族) 출신자들에게 이것은 참기 힘든 모욕으로 다가왔습니다. 게다가 북족 출신자들은 최호를 비롯한 한족 사대부들의 지나친 강남 귀족사회에 대한 동경(그 중 대표적인 것이 왕혜룡 사건[1])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터였습니다. 즉각 이러한 북족 출신자들의 분노는 황제인 태무제에게 까지 알려졌고 격노한 태무제는 최호를 비롯한 편찬관 들 그리고 최호의 일족인 청하 최씨, 범양 노씨, 태원의 곽씨, 하동의 유씨 등 화북에서 제일급의 명망가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형벌을 내렸습니다. 이 때가 450년 6월의 일로 일명 '국사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최호 등 한족 사대부들이 이상이 이민족 왕조인 북위제국이라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부서진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국사사건 이후 한족 사대부들의 힘은 크게 꺾였습니다. 특히 문성제와 헌문제 시대에는 그들은 북위 정부에 하위직만을 맡을 뿐 예전 최굉이나 최호 시절처럼 북위 정부의 정책을 주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풍태후의 섭정시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한족 사대부들은 북위 정부의 고위직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국 문명에 이해가 깊은 북족 유력자들과 또 교양인으로 변모한 북족 출신자들을 자신들과 동류로 받아들이려는 한인의 명문들의 영향이었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북위를 섬겨온 공신인 선비족 육(陸)씨는 하동의 유씨, 범양의 노씨, 박릉의 최씨 등 한족사회의 명문과 혼인관계를 맺고 이들을 북위 정부에 다시 투입시키는데 지대한 원조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조의 혼란으로 인해 남조의 귀족들이 토호들이 북위로 망명하여 북위 정부에 입사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465년 남제(南濟)의 박해를 피해온 송의 왕족 유창과 수행원 20명 등이었습니다. 특히 유창은 높은 교양을 갖춘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 능력을 북위조정에서 높이 사 훗날 제도개혁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남조 출신자들의 북위 망명은 북위제국이 종전의 무력적인 국가에서 문치적인 국가로 그리고 화북의 농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을 시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풍태후도 농경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대토지소유자의 지나친 토지 겸병을 막고 농업장려책을 막아야 한다는 한족 사대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한족 사대부들이 북위 정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균전법의 상소를 올린 조군 촐신의 한인 관료 이안세, 농서군 출신 한인 관료 이충의 의견에 따라 실시된 삼장제 등은 대토지소유의 진행과 그로 인해 발생한 소농민의 무산화(無産化)를 시정하고 개개의 농가가 자립할 수 있을 만큼의 농지를 각각 확보하게 하여 자작농을 육석해 농업생산을 증진시켜 이를 기초로 국가재정의 충실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백관에 대한 녹봉제도를 실시하여 관리가 마음대로 민간으로부터 재물을 탐하는 일을 금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들은 한족 지식인들의 영향으로 실시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존의 북족 지배자들의 사익 추구와 부패화 현상이 심하게 진행된 상황이었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한족 지식인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북족 지배자들도 통감한 것이었습니다.

 

 

북위가 칼의 통치에서 본격적으로 붓의 통치로 변경한 것은 풍태후의 섭정 기간이었습니다. 과단성 있는 여인인 풍태후의 지원 아래 한족 지식인들은 각종 제도 개혁 등을 주도하였으며 이러한 경향을 풍태후 사후 그 유명한 효문제의 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1] 왕혜룡 사건

417년 후진국이 동진의 실력자 유유에게 무너졌을 때 유유의 압박을 피해 후진국에 망명한 사마씨 일족과 일부 강남귀족들은 북위로 망명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동진 제일의 귀족이었던 왕혜룡(王慧龍)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최호의 동생은 왕혜룡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딸을 그와 혼인시켰습니다. 최호 스스로도 왕혜룡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원의 왕씨는 대대로 코끝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어 강남에서는 코주부 왕씨라 한다고 한다. 왕혜룡은 코가 매우 크니 실로 고귀한 혈통이다."

 

이렇듯 최호가 너무 심하게 그를 칭찬하는 바람에 그것이 북족 출신자들의 비위를 거슬려 최호는 태무제 앞에서 북족을 묘욕한 죄를 사죄해야 했습니다.



* 출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세미나 위진남북조사, 중국중세사,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위진남북조사(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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