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허연, 죽은 소나무
나는 무엇을 보고 흔들리는 걸까
죽은 소나무
그 끝에 붉게 달려 있는 솔방울
그 끝의 바람
혹은 새
아니다 나는 죽은 소나무가 가져온
기억에 흔들리고 있다
해 뜨는 쪽이 아닌 곳으로
팔을 뻗었던 소나무가 있었다
그게 운명이었는지 실수였는지
저항이었는지 모르지만
소나무는 죽었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은 많다
자유로운 것들은 살기 어렵고
살아남은 자들은 자유롭기 어렵다
그래도 저 소나무는
죽어서 십 년을 간다
그 자리에서
기억으로
죽은 소나무들이 자유로운
그 비탈에 서 있었다
이운진, 옆에 산다는 것
이삿짐을 싸다가 수세미가 자라던 화분을 넘어뜨렸습니다
아직 그 누구의 허리도 감아보지 못한 어린 녀석을
같이 데려가지 못하는 미안함에
땅 내음이라도 맡으려무나
아파트 화단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찬찬히 나무들을 쳐다봅니다
제일 큰 벚나무는 귀찮아할까
라일락의 목을 죄면 향기를 잃고 말겠지
산수유나무에서는 우리 집 창문이 보이지 않을 거야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나무마다 찾아다니며 밑둥을 만져 봅니다
나무에게도 눈물 같은 것이 있어서
손을 대면 뿌리의 체온이 전해집니다
뜨겁지도 먹먹하지도 않은 나무 곁에 수세미를 심어주고
이제 막 허공 한 줌을 움켜 쥘 만한
덩굴손으로는 상처 난 나무껍질을 감아주었습니다
나무와 수세미의 그림자는 이미 하나였습니다
옆에 산다는 건 이런 일이었습니다
실로 우연히라도 그림자를 포개어 놓고 싶은 일 말입니다
먼 곳에서 당신이 보낸 대숲의 소식을 받는 순간
내 안에 당신이라는 심장이 생기는 그런 일 말입니다
김창균, 백야
가장 뜨거웠던 한 시절이 지나가고
내 생의 한 때였던 당신이 지나가고
막막했던 순간들 지나간 뒤
화산재들은 먼먼 과거를 빙하에 퇴적한다
꼬박 이틀을 내리고도 아직 내릴 눈이 있고
꼬박 이틀을 침묵하고도 더 침묵할 날들이 있었으나
내 눈물은 유목민의 음식처럼
짜고 낯설고 딱딱했다
어둠이 긴 계절에 너를 만났으나
백야의 환한 고독도 알 듯 해
오래 견디기 위해 온몸을 염장하는 소금 창고 곁에서
녹지 않는 슬픔을 알아버린 후 가진 절망과
극지의 눈물 또한 다르지 않으니
오래 아주 오래
말 대신 하얀 입김을 뱉어내는 북극의 말들 곁에서
영하를 잠입하는 기막힌 날들
박완호, 외도
그리움의 거처는 언제나 바깥이다
너에게 쓴 편지는
섬 둘레를 돌다 지워지는 파도처럼 그리로 가 닿지 못한다
저마다 한 줌씩의 글자를 물고 날아드는 갈매기들
문장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바깥을 떠돌다 지워지는 저녁
문득 나도 누군가의 섬일 성 싶다
뫼비우스의 길을 간다
네게 가닿기 위해 나섰지만
끝끝내 다다른 곳은 너 아닌 나의 바깥이었다
네가 나의 바깥이듯 나도 누군가의 바깥이었으므로
마음의 뿌리는 늘 젖은 채로 내 속에 뻗어있다
그리운 이여
너는 항상 내 안에 있다
이향란, 젖지 않는 물
살면서 뜨겁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은 것은
오직 사랑에 대한 것뿐이다
단 한 번의 사랑이 나를 그렇게 가두었다. 길들였다
이후 그 어떤 것에게도 뜨거움을 느낄 수가 없다
불감의 나날 속에는 데인 추억만 우뚝 서 있다
그 추억에 검버섯이 피어도 싱싱하다
청춘의 한 페이지가 거기에서 멈췄다
하여 나는 더 이상 젖어들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