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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형, 어제보다 비밀이 많아졌다
오늘 구름은 뼈가 있다
구름의 늑골 사이에서 달이 달그락거리고 나도
주머니 속 당신의 운율감 넘치는 손가락뼈를 만져본다
지나가다 만난 돌이 모자를 벗고 이마를 수그리고
저를 낳은 저녁에게 예의를 다하고 있는 순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긴 시간을 봉헌하고 있는 순간
날개의 질료가 백 퍼센트 구름인지도 모를
붕새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갔다
하루에 구만 리를 날아서 그가 닿고 싶은 세계가 어딘지
그 자신도 모르는 것 같아 불러 세워 질문하지 않았다
아침과 저녁의 기분이 다른 숲은 좀 더 은밀해 보였고
이윽고 많은 말들이 서로 혀를 조심하며 바스락거렸다
숲속에서 자명종 소리가 났다 단순한 음악 같기도 했다
몸 안에 금관을 갖고 있는 풀벌레의 생애가
석양과 함께 짧게 빛나 보였다
끝없이 깊어진 노년기 보르헤스의 눈을 닮았을
저녁의 동공 때문인지 현기증이 났다 구름 대신
먼지가 낀 아득한 처소의 창턱으로 되돌아와서도
산책길에 본 저녁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구만 리를 걸어가서 어디에 닿고 싶은 거니
나 자신에게도 질문하지 않았다
어제보다 비밀이 많아졌다
박수빈, 피아노방울
하늘은 얼마나 많은 피아노들을 품었을까
흑백의 세상에 건반들이 떨어진다
대지 속으로 스며드는 피아노의 얼룩들
당신은 내가 허방에 빠질 때
신발이 벗겨질 때
들려 오는 달무리 소나타
흰 팔의 들려오는 끓는 소리들
당신이 나를 뒤로 할 때
현기증은 내가 겪는 공중
타버린 심지처럼 헐벗은 나무들이 휘휘거리고
새어나오는 바람소리
뼈를 부딪는 소리들
급히 페달을 밟는다
내 가슴에 젖은 물빛 출렁이다가
스윽 반올림 반내림
내 삶의 악상들
살 빠진 빗으로 나는 머리카락을 빗어 넘긴다
심언주, 계단이 오면
계단이 오면
나는 무릎을 꺾으며 방아깨비처럼
굽신거립니다
물에 발을 담근 것처럼
두 발이 짧아집니다
공보다 빨리
한꺼번에 몇 계단씩
내려서고 싶은데
계단이 굽신거리며 내 발을 받들어서
밟아도 밟아도 계단이 끊어지지 않아서
내려다보면
발 아래서 누군가의 머리가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발이
차곡차곡 쌓여 꿈틀거립니다
11월은 나 혼자 쌓은 것이 아니어서
단풍을 따라 뛰어내릴 수 없습니다
계단 혼자서 계단을 오르내립니다
이장욱, 서해의 개입
내가 살아온 세계는 서해와는 먼 거리였다
나의 집도 서해에는 없었고 친구도
취한 채 건너던 횡단보도도
서해에는 없었다
서해는 나를 잊는 일에 가까웠고
내가 죽은 후에 가까웠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연인이었다. 실은
서해에서 몇 날 며칠 숙박을 했는데도 실은
해변에 나가서 혼자 오래 걸었는데도 실은
여기서 일생을 보냈는데도
서해가 먼 곳이었다. 서해에서 나는
최소한의 노동과 부당한 통치자들과 또
혼자 깨어난 새벽을 생각하였다.
나는 생선을 좋아하고 수영을 잘하는데
수평선이 발생하는 것과 심해가 자라는 것을 잘 이해하는데
매일 이 가까운 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해변이 해변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서해를 떠나기 위해 수평선 쪽으로 수영을 했는데 문득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너긴 건넜는데 문득
거대한 파도가
아주 물질적인 파도가
바로 눈앞에
강성은, 포크송
겨울엔 조니 미첼을 듣고
여름엔 내가 불렀지 문득 때때로
발전소 굴뚝엔 계절 없이 검은 연기가 솟고
오토바이를 탄 아이들이 연기를 따라 달린다
바람이 불어오면
초록의 토끼풀들이 우수수
염소를 안고 가는 늙은 여자
닭장을 안고 가는 늙은 남자
흐린 날 뒷모습은 왜 모두 유령 같은가
노래는 끝나지 않고
집 나간 아이들이 떠나온 집을 생각하는 저녁
내 영혼이 창가에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노래가 끝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