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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호, 두 뼘
그때 당신은 키가 컸다
나를 감싸고도 두 뼘이 남았다
바람이 그 두 뼘에만 고였다가 흘러갔다
나는 바람 맞을 준비도 하지 않았다
두 뼘의 여유에 고개를 수그리지도 않았다
두 뼘은 빈 웅덩이처럼 채울 것이 많아서
당신이 사준 화장품도 올려놓고
당신이 부어주던 핏빛 와인도 얹어놓고
이쁘다, 잘한다는 기분 좋은 형용사들도 늘어놓고
당신이 심어준 넝쿨장미도 기대놓고
가끔 내밀어준 시의 말도 걸어놓고
앞 머리칼 날리며 불러준 사랑의 노래도 풀어놓았다
너무 기대어서 두 뼘만큼 틈이 벌어졌다
나와 당신의 두 뼘 키
바람은 그 속에서 만들어졌다
강지혜,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서
누군가는 주인공으로 태어난다
주인공은 조력자를 만난다
주인공은 사건을 만난다 사건은
주인공의 비상한 머리와 소름 끼치도록 치밀한 우연으로 해결된다
열렸거나 닫혔거나 결말이 나고
주인공은 웃거나 울거나 죽는다
구조는 구조적이라 간단하다
주인공이 아닌 인물은 기도하지 않는다
당신은 하나의 인물이다
인물은 어떤 배경에 불과하다
주인공을 둘러싼 무늬나 색깔, 규칙 따위의
그러나 신은 비밀을 숨기는 것을 어려워한다
주인공이 웃거나 울거나 죽을 때 인물은 그저 살아가고
그 어떤 결말도
결코
인물을 이길 수 없다
신현림, 눈보라가 퍼붓는 방
눈보라는 방에도 퍼부었다
몸까지 들어찬 눈보라를 토하였다
자식과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밀어냈다
눈보라는 자세히 볼수록 흉기였다
눈보라에 베이고 파묻혀도 나는 타오르고 싶었다
나를 태워 눈보라에 갇히는 나를 잊고 싶었다
눈보라가 언제 걷히나 언제 빛이 보이나
눈보라가 설탕이라고 쓰자 달콤해지기 시작했다
힘들다 씀으로써 나는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다
빛이 보인다고 씀으로써 빛이 느껴졌다
누구나 살아남기 위한 죄수의 인생이라 나를 타일렀다
눈을 감으면 나 자신이 풍경으로 보였다
눈보라를 멀리 보기 시작했다
눈보라 속에서
해가 펄펄 끓고 있었다
박완호, 소낙비
통속을 살짝 벗어난 리듬이다
발 디딜 곳 어딘지 모르면서
다짜고짜 뛰어내리는 빗방울들
누구나 겪는 첫사랑도
한바탕 시간의 세례를 받고나면
세상 하나뿐인 무엇이 되듯
어떤 상투는 익으면 눈부시다
빗방울 내려않는 자리가
바람 따라 자꾸 바뀌어 간다
연거푸 한자리에 떨어지는 자리가
상투라면, 바람이야말로
그걸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바람이 되어 불어가면
너와 나는 얼마나 싱싱해질까
빗방울 처음 듣는 자리
저기쯤
그때처럼 네가 서있다
심재휘, 겨울 입술
그대를 등지고 긴 골목을 빠져나올 때
나는 겨울 입술을 가지게 되었다
오후 한시 방향에서 들어오는 낙뢰가
입술을 스치고 갔다
그 후로 옛일을 말할 때마다
꼭 여미지 못하는 입술 사이로
쓰러지지도 못하는 빗금의 걸음을 흘려야 했다
골목의 낮은 쇠창살들은 여전히 견고했다
뱉어놓은 말들은 벽에서 녹고 또 얼었다
깨어진 사랑이 운석처럼 박힌 이별의 얼굴에는
저녁과 밤 사이로 빠져나간 낙뢰가 있더니
해가 진 일곱시의 겨울 입술은
어둠을 들이밀어도 다물 수 없도록 기울어져서
들리지 않는 말들을 넘어지지 않게 중얼거려야 했다
진실을 말해도 모두가 비스듬한 후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