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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에서 벗어나는법
게시물ID : gomin_17975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청주남자
추천 : 0
조회수 : 146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2/12/20 00:50:34
브라만의 참나 (순수의식)  불교의 아버지격인 힌두교에서는 "아트만"이라는 (참나)가있다. 

이 "아트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속 절대 변하지 않는 내면의 "공" 참나를 뜻하며 아트만은 힌두교의 주요 개념이며 이 "아트만을 아는것"을 통해 본질적인 자아를 아는것을 통해 환생하여 해방을 얻는 것이 기본 수행이며 기본적으로 내면의 순수의식인 참나를 찾을 수 있고 고통을 덜 수 있다.

 "아트만"은 흔히 말해 오감이 없는 (촉각,시각,후각, 미각,청각) 의 상태이며  눈을 감고 생각을 멍한 상태로 만든 순수의식의 상태를 만든다. 우리 인간은 선사시대때부터 사방에서 튀어나올 짐승이나 적들의 경계로 인해 너무 긍정적이거나 늘어져있으면 생존하는데 불리하고 멸종당할 가능성이 컸지만 불안이라는 센서작용을 통해 오늘날까지 살아있게됬다.  그러나 그러한 생존방식이 현재에는 잦은 불안과 스트레스로 남아 현대인들의 마음을 고통을 주고 있다.  우리 인간은 반응하는 동물이기에 생각 즉 분별이 꼭 있어야 감정이 반응하게된다. (생각->감정) (생각이후에 감정이올라옴)  이러한 (좋음,싫음, 무서운 사람, 우스운 사람, 범죄자) 이러한 분별은 프레임의 틀에 가두게하고 프레임은 선입견이라는 안경을 쓰고 바라보게 하는 방식과같다.

 특히 깊은 무의식에 안좋은 기억이나 쇼크등이 트라우마로 잠제되어있으면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끊임없이 무의식중에 나오는 분별심과 깊이 결정된 생각으로 인해 거기서 괴로움이 발생하게 된다. (안좋은 기억, 트라우마 -> 의식으로 올라옴 -> 생각 -> 감정 -> 반응)  쉽게 미생물이나 식물 돌은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있어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고등생물이기에 그것이 어렵고 분별심이 강하고 똑똑한 동물일수록 에고심이 강해져 생각이 많아지게되어 그 생각에 집중하다 괴로워서 자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나는 “만트라”를 하였다  최고로 심층상태의 명상 상태를 통하여 생각이라는 분별심을 없애고 마치 존재는 있으나 나무나 돌처럼 생각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 감정이 올라오지 않게 만들었고 순수의식의 공간과 하나가 되어 잠시 열반에 들어간 상태를 경험하였다. 깨달았다고 생각하였으나 이것도 잠시  이 과정에서 트라우마도 올라오게되고 그러한 존재는 선정(깊은명상)의 상태에 들어가면 고통도 쾌락도 없는 중간의 상태라 그 상태에서는 아무런 감각식 (미각,청각,시각,후각,촉각)이 없지만 다시 외부세계로 돌아와 선정(깊은명상상태)에 깨면 결국 심상화의 부작용처럼 무의식에 저장되있다 한번에 의식의 수중으로 올라오는 상태가 된다.  참나를 통해 오감이 없는 마음의 중간의 상태를 배웠으나순수의식과 일체가 되어 완전한 상태를 찾아 고통은 줄었으나 외부세계를 나몰라라한다해서 결국 결과적으로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됨이 아님 그리하여 불교로 넘어가게되었다 .  - 싯다르타의 진리적 자각 -  연기법 (인과율)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핵심만 얘기하면 이 세상은 하나만 돌아가는게 아니고 여러것들이 맞물려서 돌아간다.  과학적으로도 물자체는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고  물질의 상태변화가 일어남 (지진,해일 , 침식작용, 풍화작용) 그렇기에 영원해 보이는 무언가 있을지라도 결국  그것은 영원하지 않고 상태변화한다.  싯다르타의 경우 참나만 찾는다해서 내 감정의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니기에 외부세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최초의 원인을 찾아 외부의 세계에 화두를 던지게 된다.  본질적으로 연기법에 따라 이 세상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계속 상태 변화하고 그 변화하는 연기법에 의해 이 지구에 잠깐 태어나 죽음으로써  이 100년도 안되는 인생 내 뜻 내 고집대로 되지 않아 결국 괴로움과 고통이 오는것 우리는 생각 감정 오감으로 느끼기 때문에  오감으로 느끼고 그러한 것에 욕심이 생겨  집착이 생기는 것이다.  사는동안 미래, 성공, 안정, 행복, 희망 더 좋은 배우자, 더 좋은 직장상사,  불안,슬픔,괴로움을 피하고  반대로 인생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욕심이 커지고 그 욕심이 커지고 커지면 즐거움이 되나 그 즐거움도 지속되면 결국은 지루해지고  재미없어지며 그 순간도 지속되면 결국 고통이된다. 인생이라는 건 결국 고통의 연속이며 즐거움이 있어도 그 즐거움또한 결국 상대적으로보면 고통.  차라리 절제하고 참고 인내하여 아예 더 큰 고통속에 삶으로써 굴리면 인생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오히려 현생이 천국같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싯다르타는 수행을 하였고 그 와 같이 나도 괴로움에 벗어나기위해 억지로 수행해나가며 택배일도 매일 하고 수모를 겪으며  고통같은 하루를살았었다.   싯타르타가 배고픔을 참아가며 춥고 더운곳에서  자신을 계속 고통속에 집어넣어 7년의 고행의 수행 끝  알게된점은 오히려 고통을 참은 반동으로 작은 행복에도 더 큰 쾌락이 올라와 행복에 집착하게되고 행복이 크면 클수록 작은 불행에도 더 크게 불행해졌다.  나역시 공감이 가는게 중학교때 엄마가 해준밥을 매일 같이 먹다보니 반찬투정을했었지만  사기당하고 부모님과 연락을 끊고 길거리에서 노숙을 했을때 배가 너무 고파서 편의점에서 300원짜리 사탕을 빨아먹었을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달콤함을 느꼈다.  나와 싯다르타가 느낀건   결국 인생은 아무리 행복하게 만들어놓아도   행복의 상태가 변하면 결국 더 고통스러워지고 행복의 상태는 결국 변하고 소멸하기에 불안하고 만족되지 않고 그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하고 그 과정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고통스러워진다. 

 즐거움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반드시 고통이 따르고  이것을 통해 싯다르타가 고행을 통해 알아낸 점은 결국 일체 모든 것은 고통 번뇌뿐인 삶이고 행복과 즐거움도 결국엔 고통과 번뇌를 싹 튀우는 씨앗이다.  이러한 고통과 행복의 상태가 반복되는 상태가 윤회이며 이것에서 벗어나는 방식은 결국 희노애락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집착을 내려두고 이 감정이라는 존재들을 순수의식참나(오감이 없는 자리) 중간자리에서 관찰하여 뇌로 전달되는 감각식(시각,촉각,미각,청각,후각)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존재들이 일어나는 것 바라보는 것만 하더라도 과거의 나의 경우 그 화, 우울 여러 감정들에 몰입 집중했지만 그 존재들을 참나의 자리에서 감정과 동하지않고 가만히 관찰하면 튀어나온 존재들은 막으려하고 참으려하면 오히려 무의식에 저장되있다 언젠가튀어나오기에 (화병이 생기는 이유) 가만히 바라보고 그 감정의 존재들에 대해서 존재해도 부정하지않고 괜찮다 인정을 해주면 결국 연기법에 의해 언젠가는 사라진다.

 결국 "나"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나"또한 8년마다 세포의 집합체들이 교체되어 바뀌고 이 뇌또한 결국 과거의 기억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고 이"나" 또한 결국 태어나고 죽으면 순수의식 “참나”의 상태로 돌아가게되고 현재는 결국 과거로 지나가며 그 기억들도 기록으로 남긴다하더라도 언젠간 결국엔 사라지고 부서지니 결국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게된다. 

 이것을 통해 이 세상은 어차피 고통과 행복의 순환의 고리에 불과하며 이 몸도 이 상황도 이고통도 이행복도  내가 이루고싶은 욕망들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허상과 꿈이니 세상에대한 꿈과 미련을 버리게되었고 "나"란 존재가 죽는다는 것에 있어서 두려움이 줄었으며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슬픔 돈을 빌려준 나의 미련한 행동에 대한 트라우마 이러한 집착들을 놓을 수 있게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알아차림을 통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되고 상황에 따라 내가 가진 성격과 기질을 더 잘 파악하게 되며 나의 에고적 기질 나의 기능에 문제점을(욕심,팔랑귀,눈치없음) 파악하게되고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관념으로 나타나 사회적인 환경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 여러번 비슷한 상황과 카르마가 반복되게 된다.  마치 인간의 에고적 기질은 비유하자면 불같기에 상황에 맞게 잘 사용하면 (불로 요리를 할 수있고, 따뜻한 난로가 될 수 있지만)  상황에 잘못 사용하면 ( 불이 미친듯이 번진다던지 산불) 로 이어지는 것처럼  에고적 기질을 적절히 잘 다듬고 상황에 따라 잘 활용해야 된다고 느꼈다. 

 고집이 너무 강해 트러블이 강하여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오히려 난 고집이 없어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휘둘리거나 오히려 이것때문에 답답해서 미치는 사람이 많다.  모든 것들은 쓸모없는게 아니고 다 상황에 따라 적절히 필요하게 된다는 것을 깨우쳤다.  고집이 없는 사람이면 이번 생에는 고집을 좀 부리는 방법과 장점을 배워야하고 반대로 고집이 있는 사람은 이번 생에서 고집 없는 사람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인생이란 마치 내가 배우지 못한 기질을 배워 완성을 이루는 곳이란 생각마저도 들었다.  참나 (오감이 없는 감각식)의 중간의 자리에서 외부세계를 바라보기에 화나지도않고 슬프지도 않고 아무 생각도 없는 중간의 완벽한 상황에서 세상을 바라보기에 편견과 색안경이 생기지도 않으며 내가 가진 에고적 기질을 제어하면서 내 기능과 생각 가치관 내에서 가장 이성적인 답을 제시할 수 있게되고  항상 중간을 유지하기에 주변의 사람들의 여러방면에 내면의 문제점을 쉽게 찾아보기가 쉬워지고 그들이 가진 메인 카르마가 대충 어떤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분노 조절이 안되는 사람 -  도박을 하는 사람 살면서 그러한 기질로 인해 비슷한 상황을 겪게됨)  인생은 결국 적당함과 필요를 넘어서 욕심과 집착 과욕을 부리게 되면 고통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우쳤다.  고통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이 세상의 어차피 고통의 연속이며 모든 욕심은 결국 덧없다는 사실을 알게되어 미련과 집착을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싯타르타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그의 행보를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았지만 그 의 행보는 보리수나무에서 깨달음을 얻고 득도하였다 

이 말 밖에 없었고 그 이후에 그의 깨달음의 방법을 알 방도는 없었다.  깨달음의 방법은 알려주고 갔어야됬는데 무책임하게 가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서 원망 스러웠다   화두를 잡고 싯타르타가 깨달은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기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싯타르타가 왕자의 좋은 자리를 출가하고 스승을 만나 브라만의 “만트라” 참나를 터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것이 깨달음이 아니라 생각했던건 그 스승들의 교육방식이 세상과 문을 닫고 오로지 “참나 “안에만 숨어있었기 때문이었고 인생의 고통과 해결이 전혀 안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싯타르타가 정말 절실히 필요했던건 고통을 해결하고 이 세상의 실질적인 원인을 찾아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최초의 원인을 찾아냄이 가장 중요했을 것이다. 최초의 원인을 찾아내야 결과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며 계속 끊임없이 의심하며 화두를 던졌다. 

 질문 : 이 우주가 세상이 생겨난 근본적인  최초의 원인은 무엇인가..? 

 답 : 빅뱅이전의 존재는 알 수가 없다. 

 질문 : 정말 알 수 없는건가?
 답: 빅뱅이전 우주가 "무"의 상태라 하더라도 그것이 "무" 인지는 알 수 없다. 

 질문 : 그럼 알 수 없는건가?
 답: 흠.. 그래도 “유" 이 우주는 존재한다 그러나 “유”이전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 “무”가 있었을것이다 

 질문: 그것이 무엇인가?
 답: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이다. 

 질문: 그러나 그 아무것도 없는 “무”공간 이전에 아주 먼 과거에 또다른 “유”가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세상은 또 “유”이기에’ 결국 “무”도 있지 않았을까?

 답: 그럴 가능성이 있다. 

답: 너 말이 맞다고가정한다면 이 세상은 “무”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유”이다 이세상에 완벽한 무는 없다.

 싯타르타가 생각한 깨달음의 최초의 원인은 결국 그저 세상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판단했다  그러나 이것을 알게되고 굉장히 허탈감이 들었다   결국 이 세상은 박살나고 다시 만들어지고 박살나고 만들어지고의 무한의 연속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허탈감속에서 내가 결국 해결해야 할 부분은   조금이라도 이 심적 고통에서 벗어나기위하여 호흡을 수련하여 긴장되있는 심장을 심호흡을 하여 불안감을 없애는 상태를 만들었고 일하면서도 깨어있는 상태 선정에 드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이 중간을 유지한 상태를 통해  내가 처해진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된다는 해결책밖에  없는것 같아 허무했다.

 깨달음이 이런 허탈감이 아닐꺼라 생각하여  다시금 화두를 던지게 되었다.  질문: 이 시공간안에서 세상의 최초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인식의 영역으로 넘어가서 최초의 원인을 찾아보자 “참나”순수의식 변하지 않는 이” 무”의 상태 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은 완전한 “무”가 아닌가? 우리가 관찰해 감정을 알아차린다고 하지만 그 관찰하는자도 결국 에고이며 뇌가 만든 신호의 의식으로 외부대상을 관찰하는 것이기에 순수의식은 가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죽어야 그 “무”는 실존하지 않나?
 최초의 인은 우리의 “참나”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답: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참나 순수의식이 없는  상태밖에 없다면 결국 참나 밖에 인지를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기에 참나를 인식할 수 있고  가상의 “무” 가 아닌 “최초의 무”를 알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너는 지금 서양철학의  유물론적 프레임을 씌우고 세상을 바라 보고 있다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만이 아닌 저 돌을 보고 저 식물과 저 미생물 저 풀을 보고 이 세상 이 우주를 봐라 분별된 관념과 감각식이 없는 저 물질들도 너가 명상하여 느낀듯이 순수의식이고 참나상태이다. 순수의식은 시공간을 초월하며 과거에도 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예외로 동물과 사람은 각 개별에고로써 분리되어  살아가지만 그 존재들 또한 영원하지 않으며  7~8년 마다 세포를 바꾸어 몸을 새롭게 바꾸고 있다 그럼 7~8년뒤 몸을 모조리 교체한 너는 다른 사람인가? 너의 의식은 깊은 잠을 잘때마다 끊어지며  다시금 의식을 차리면 그 의식은 과거의 허상된 기억들로 진짜 너인줄 알지만 그건 진짜 너인가? 애초에 너의 존재는 기억의 허상으로 존재하며 해석이된다 감쪽같이 다른 기억으로 조작하면 넌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분별하지마라 우리는 애초에 우리 모두는 “무”의 상태에서 시작됬고 거기서  감각식을 가져 분별을 하는것일뿐 애초에 우리는 하나다  이 세상의 모든것은 하나로 맞춰 굴러간다  너의 어머니 또한 너이고  너의 직장상사도 너이며, 너의 친구도 너이며  너의 원수도 너이고 뉴스에 범죄자도 너이며  여자친구도 이 우주도 모두 너이다.  이로써 우리는 모두 하나로 굴러간다는 걸 알게되었고   나랑 다른 사람또한 결국 순수의식에서 시작된 또다른 “나” 임을 깨닫게 되었다.  무와 유의 분별을 멈추게 되었다.  무 와 유는 분별하는 것이 아니며  참나와 이세상 모든 것이 우리이며 일체가 나의 작용이다. 

개체존재로써 존재하기에 인지하지 못했지만 싯타르타와 같은 경지에서 바라보게된 이 세상은  결국 “나” 임을 알게되고 진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됬다.   그러한 깨달음을 얻은 후   남도 결국 한명의 플레이어어지만  “나”로 보이게 되며  또 다른 “나”가 잘못된 선택을 하였을때  애처롭게 느껴지는 감정을 가지게되었다  고통을 완전히 없애진 못했지만 결국 모든 것이 나의 작용임을 깨달아  남이 나에게 욕을 하든 뭘 하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남이 나를 욕하고 슬프고 죄책감을 느꼈던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어 남아있던  트라우마가 사라졌다.  난 다시 화두로 돌아와 생각 하였다   난 이제 무엇을 해야하나..? 
더 깨달아야 될 무언가가 있나..? 

고통을 없애기위해   최종결론의 화두는   이 모든 것이 다 일체가 나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려줘야겠다 생각했다.  모두 이 나라는 꿈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결국 이것들이 다 나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 게시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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