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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섭, 늙은 바람의 문법
앳된 문장이 늙은 바람의 문법을 숭배하며 짧은 평서문으로 자랐다
그 문법은 통사규칙을 어기지 말 것을 수시로 타전해 왔다
주어가 생략된 의식으로 불규칙한 담장 밖 풍문과 동행하지 말 것을 주문하며
문장의 늑골을 더욱 조였다
그럴수록 문장은 영혼의 목록에서 사라진 뼈다귀를 핥으며 살았다
때론 뒷골목 불나방의 비문을 새기는 석공이기도 했다
세월의 단락이 바뀌어도 손금의 한가운데로 정신이 컴컴한 헛간의 어휘와
총에 맞은 새의 머리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문법은 무명의 시간들을 따라 묘혈에 누웠다
슬픔의 독침이 문장의 혈관 속으로 퍼지고
언어들은 일제히 경련을 일으켰다
신당을 잃어버린 무녀처럼 문장은 포효했다
문법이 없는 대궐보다 문법이 있는 옥탑방 아랫목이 더 따스했다
이영주, 녹은 이후
눈사람이 녹고 있다
눈사람은 내색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부분은
에스키모인은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선다고 한다
마음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걷는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막대기를 꽂고 돌아온다고 하는데
그렇게 알 수 없는 곳에 도달해서
투명하게 되어 돌아온다고 하는데
나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왜 돌아오질 않죠
불 꺼진 방 안에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얼음처럼 기다렸는데
누군가가 들어올까 봐
창문을 열어두고 갔는데
햇빛 아래
죽어가는 부분이 남아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발밑으로
엉망인 바닥으로
형태가 무너지는 눈사람
이렇게 귀향이 어려울 줄은 몰랐는데
흰 눈으로 사람을 만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런 걸 봄이라고 한다면
신용목, 숨겨둔 말
신은 비에 빗소리를 꿰매느라 여름의 더위를 다 써버렸다
실수로 떨어진 빗방울 하나를 구하기 위하여
안개가 바닥을 어슬렁거리는 아침이었다
비가 새는 지붕이 있다면, 물은 마모된 돌일지도 모른다
그 돌에게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하구에서 빗방울 하나를 주워들었다
아무도 내 발자국 소리를 꺼내가지 않았다
배한봉, 수련을 기다리며
꿈을 향해 오래 걸어온 자들의 골수가 모인 곳
잠든 수련 이마에 물은
나지막한 숨결의 문장을 보낸다
그 문장엔
꿈꾸는 자의 닳은 무릎 뼛가루가 묻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물안개라 부르고 그리움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저 고요한 저수지는
꿈꾸는 자들의 푸른 내심이 만든 것
물컹한 관념을 관통한 뿌리와 이파리의 화살촉이
실은 수련이라는 것
너를 기다리다 죽은 말들이
떼지어 시커멓게 날아다니는 혼돈의 시간을 건너
팽팽하게 밀려오는 어떤 힘들을
나는 만다라 문장 같다고 말하려다 그만 둔다
위독할수록 사랑은 더 간절해지는 법이다
김병호, 당신의 11월
첫눈 너머 다녀왔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배워 왔습니다
그저 병인 줄만 알았는데 밤새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렸습니다
남쪽물고기자리를 건너는 동안 구름은 딱딱하게 얼었습니다
들판처럼 침묵해야 하나요
가벼운 입김으로 지워진 고백은 목 늘어난 양말 같습니다
구름의 문수는 새벽 두 시보다 크고 눈발은 곧 유성처럼 쏟아질 테지만
11월의 안쪽에서 나는 당신으로 자욱합니다
겨울이 당도하기도 전에 나는 눈사람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