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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신철규, 커튼콜
파라솔도 없이 의자가 햇볕을 받고 있다
누군가 읽다 만 책이 그 위에 뒤집혀진 채 놓여 있다
파도는 금세 의자를 덮칠 것이다
무지개 색 공을 주고받던 연인들
재잘거리며 파도와 장난치던 아이들
모래무덤 속에 들어가 누워 있던 사람들
발자국만 무성하게 남아 있다
발이 녹아버릴 만큼 뜨거운 모래다
누군가 사람들을 지워버렸다
파도가 밀려갈 때마다 색색의 자갈들이 선명하게 빛난다
틀니 하나가 입을 벌린 채 모래 속에 박혀 있다
대낮에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해변을 따라 꽂아놓은 바람개비들이 맹렬하게 돌아간다
의자는 쉬지 않고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을 기다린다
하늘과 땅 사이에 칼이 물려 있다
석양의 발꿈치가 칼에 닿자 피가 번진다
의자가 물속으로 서서히 잠긴다
제목을 알 수 없는 책이 뗏목처럼 둥둥 떠 있다
바다는 여전히 육지로 밀입국을 시도한다
파도는 철조망까지 닿지 못하고 달아오른 얼굴을 모래에 묻는다
파도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최세라, 유리
최선을 다해 깨지고 싶었다
내가 유리창인 걸 그가 알 수 있도록
음이 높은 앵무새를 키웠다
애인은 투명하고 깨지기 쉽고 두께를 가지고
차가운 심장을 갖기 위해 창을 더듬는다
창문 끝자락엔 깜깜한 밤이 눌러붙어
손금을 문지를 때마다 별이 돋아 땅에 떨어졌다
우린 그런 방식으로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즐거이 탕진했다
아직 빛나고 있을까 우리가 떨군 별들
나는 잊은 체했고 애인은 정말 잊은 것 같다
그것이 우리 사랑에 틈을 주는 일이라는 걸 주장하지 않고
아름다운 실패를 반복하게 했다
나는 우기에 있고 애인은 또 다른 우기로 건너간다
사포와 고양이의 혀, 각질이 가득한 여관 시트를 넘어
유리와 같은 온도의 시체처럼 누워
안쪽과 바깥은 이어지는 풍경이기 바라는 마음을 여전히 품은 채
나는 우기에 있고 애인은 또 다른 우기로 건너간다
앵무새는 누구의 말도 따라하지 않았다
무너진 눈시울을 들킬까봐 발끝을 만졌다
임솔아, 예보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곳과 그곳의 날씨는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그래서 날씨를 전한다
날씨를 전하는 동안에도 날씨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게 새로운 날씨가 도착한다
이곳은 얼마나 많은 날씨들이 살까
뙤약볕이 떨어지는 운동장과 새까맣게 우거진 삼나무 숲과
가장자리로부터 얼어가는 저수지와 빈 유모차에 의지해 걷는 노인과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못된 사람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 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과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오늘 날씨 좋다
황수아, 손잡이는 태연하다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머물다 돌아갔을까
하지만 손잡이는 태연하다
인적의 그늘이 지문처럼 찍힌
손잡이의 언덕
어두운 곳에서도 더 어두운 곳으로 길을 내는
손잡이의 저녁만큼 쓸쓸한 배경이 있을까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몹시 신중해 끝내 결단을 유예시킨 사람도
바람에 창을 맡기고 언덕을 내달리는 중세 기사처럼
성급하게 용기 낸 사람도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문은 오래도록 닫혀 있다가도
수일간 열려 있었다
이 마음들의 길 끝이
열리거나 닫히거나 하나의 정답만을 남겨둔다는 것
이 사실을 알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가
오랜 경험으로 마음이 너덜거리듯
손잡이의 나사가 헐겁다
오늘도 손잡이를 잡아보지만
손잡이는 태연하다
송종찬, 눈의 묵시록
갈 데까지 간 사랑은 아름답다
잔해가 없다
그곳이 하늘 끝이라도
사막의 한가운데라도
끝끝내 돌아와
가장 낮은 곳에서 점자처럼 빛난다
눈이 따스한 것은
모든 것을 다 태웠기 때문
눈이 빛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기 때문
촛불을 켜고
눈의 점자를 읽는 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연애도
전쟁도 멈춰야 한다
상점도 공장도 문을 닫고
신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체를 받듯 두 눈을 감고
혀를 내밀어보면
뼛속까지 드러나는 과거
갈 데까지 간 사랑은
흔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