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이영주, 교회에서
우리가 등밖에 없는 존재라면 온 존재를 쓸어볼 수 있다
우리는 왜 등을 쓸어내리면서 영혼의 앞 같은 것을 상상할까
등을 만지면 불씨가 모여 있는 것처럼 따뜻하다고 생각했어
너는 의자에 앉아 있다
구부린 채 도형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형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 때문에
등은 점점 더 깊어진다
이렇게 하면 붉은 동그라미밖에 남질 않는데
그렇다면 마음의 형식이라는 것이
네 등에 얼굴을 묻으면서 불처럼 타오르고
무너지는 네 안으로 들어가
흩어지는 영혼 앞부분으로 번져 가는데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알 수가 없어서 함께 불탄 것이겠지
누군가가 내 등에 기름을 흘린다
몸을 구부리고 눈물을 흘리면 오래 묵은 기름 냄새가 난다
어른은 죽는다는 것이다
죽지 않으면 어른이 될 수 없겠지
이런 기도문을 쓰고
엎드린 채 기도를 하고 있는 등을 보면 쓸어주고 싶다
이미 불타오르고 있으니 마음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추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서로를 모르지만 뒤를 보고 있다
이영식, 공평한 의자
눈 내린다
사뿐히 내려앉는 눈송이에게
지상의 것들은 의자다
빌딩, 리어카, 소잔등까지도
눈의 엉덩이엔 모두 공평한 의자다
눈송이는 가볍게 내려앉는다
천공을 건너오는 백색의 춤사위 아래
마른 풀잎도 의자다
부서진 의자도 의자다
의자는 공평하게 고요를 받아 앉힌다
사람의 어깨만 눈발을 털어낸다
먼 하늘의 깨끗한 한 소식
끝내 듣지 못한다
구현우, 진화
언덕을 오른다
그가 나를 기르고 내가 그를 키운다
양면이 다른 나뭇잎이 떨어진다
친절한 그가 줄을 풀고
나를 내버려 둔다
좋은 약을 너무 많이 먹는다
좋은 일만 반복했는데 몸은 나빠졌다니
덜 익은 열매 하나가 내리막으로 굴러간다
그의 수화기 너머로 먼 곳에 있는 친구와
심각한 대화가 오간다
무엇을 나누든
실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이 세계에서
멀거나 가깝거나 상처를 받는다
이제 와서 그가 내 것이 아니게 된다면
그런 와중에 내가 평생 그의 것이라면
참을 수 없는 일이라
나는 물었다
너는 묻고 그러니 동시에 벌을 받은 건 아니다
백무산, 조문
죽은 자에게 바칠 꽃을 들고 서 있는데
벌이 날아와 앉네
꽃은 이곳과 저 너머 사이에 피어
단절의 아픔에 위안을 주고
남은 자들은 인연의 안타까움을
향기로 이어 보려는데
꽃은 다만 자신의 생리를 다해
절정의 가쁜 빛깔을 토해 내고
나는 앞에 선 여인의 진한 머릿결
향기에 발을 헛디디고
벌은 하루치의 삶에 몰두해 있고
죽은 자 앞에서 나는 벌겋게 삶에 취해 있고
복효근, 꽃을 보는 법
꽃이 지고 나면 그 뿐인 시절이 있었다
꽃이 시들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던 시절
나는 그렇게 무례했다
모란이 지고 나서 꽃진 자리를 보다가 알았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다섯 개의 씨앗이 솟아오르더니 왕관 모양이 되었다
화중왕(花中王)이란 말은 꽃잎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다
모란꽃은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었다
백합이 지고나서 보았다
나팔 모양의 꽃이 지고 수술도 말라 떨어지고 나서
암술 하나가 길게 뻗어 달려 있다
꽃가루가 씨방에 도달할 때까지 암술 혼자서 긴긴 날을 매달려 꽃의 생을 살고 있었다
꽃은 그러니까 진 다음까지가 꽃이었다
꽃은 모양과 빛깔과 향기 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 그러지 않다면
어찌 사람과 사랑을 꽃이라 하랴
생도 사랑도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