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장석남, 한진여
나는 나에게 가기를 원했으나
늘 나에게 가기 전에 먼저 등 뒤로 해가 졌으며 밀물이 왔다
나는 나에게로 가는 길을 알았으나
길은 물에 밀려가고 물속으로 잠기고 안개가 거두어갔다
때로 오랜 시간을 엮어 적막을 만들 때
저녁연기가 내 허리를 묶어서 참나무 숲속까지 데리고 갔으나
빈 겨울 저녁의 숲은 앙상한 바람들로 나를 윽박질러 터트려버렸다
나는 나인 그곳에 이르고 싶었으나
늘 물밑으로 난 길은 발에 닿지 않았으므로 이르지 못했다
이후 바다의 침묵은 파고 3내지 4미터의 은빛 이마가 서로 애증으로 부딪히는
한진여의 포말 속에서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침묵은 늘 전위 속에만 있다는 것을
김희숙, 어린 질문
어린 질문은 대부분 깨져 있어
멀리서 보면 별모양이다
어린 말에는 사금파리가 들어있거나
부서진 햇살이 들어있다
자꾸 눈을 찡긋거리게 한다
어린 말들은 방언하는 듯하다가
어느 날 쑥쑥 자라난다
오래전에 질문을 던져놓고 뒤늦게
찾으러 오는 어른이 있다
반쪽의 질문에는 반쪽의 대답을 주면 된다
나이가 들수록 질문의 정답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질문하고
알고 있는 답을 또 질문한다
질문에 뿔이 달려 있거나
검은 허방이 묻어 있어 한쪽 발을 슬그머니 넣는다
간혹 허공에 대고 질문하는 이도 있지만
그건 헛헛한 웃음을 대답으로 듣는다
퇴근길, 깨진 질문을 주머니에 가득 넣고 걸으면
만지는 손끝이 까르르 웃는다
질문은 진화하고
늙고
대답보다 더 많이 생겨나거나 바뀐다
정용화, 붉은 나무들의 새벽
외로움은 등이 슬픈 짐승이라서
작은 어둠에도 쉽게 들킨다
계절을 짊어지고 나무들이 온다
겨울은 살짝만 기대도 쉽게 무너지는 마음이라
오래 켜 둔 슬픔 위로 폭설이 쌓인다
네가 건조한 바람으로 불어올 때 창문은 피폐해진 마음들의 거처
새벽노을이 드리운 나무들은 서서히 붉게 물들고
창 위로 서린 시간의 두께만큼 오늘은 흔들린다
창 위에 적은 이름처럼 사라져가는 안부들
나무들은 어둠에 뿌리 내리고 빛을 향해 나간다
바다를 건너서 북쪽으로 향하던 얼음과 죽은 자들의 나라가 있다는데
그 입구를 지키고 있는 짐승은 노을로 물들여진 가슴이 언제나 붉다
고독한 몸이 보내오는 눈빛에서는
오래 짓무른 어둠의 냄새가 난다
몸 속에 그늘을 새기는 방식으로
매일 복용해야 하는 일정량의 고독과 슬픔이 있어
나무는 스며든 간밤의 흔적을 나이테로 새겨 놓는다
새벽을 견디고 있는 이름들의 빛으로
나무들은 못 다 쓴 계절을 천천히 옮기는 중이다
박판식, 생활이라는 망상
바람은 높은 곳에서 불고 있다
굴뚝과 구름이 2월의 하늘을 놓고 지루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커튼 뒤에서 점심 뷔페는 저녁 손님을 맞으려고
고깃집으로 변신 중이고
8분 정도 참았다가
불안은 다시
자신의 전화기를 들었다 놓는다
아주 중요한 순간처럼 구름이 천천히 속력을 줄여
횡단보도 앞에 멈춰선다
이 세상이 누구의 기막힌 착상일지 생각해보다가 불안은
무상한 하늘의 깊이에 놀란다
4분의 1쯤 뜯겨진 비닐봉투 속에서
슬픔과 절망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쏟아진다
스무 번쯤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동안
큰 가방 같은 창문이 쓸모없는 풍경을 방 안으로 끌어들인다
혼자 하는 사랑은 고문이다
혼자 먹을 음식을 식탁보 위에 충분히 펼쳐놓으며
불안은 이 중요한 문제에 관해 골똘히 생각해보다가
통증이 있나 없나 자신의 손등을 포크로 살짝 찍어본다
한인준, 색채
물속에서 젖은 물을 꺼낸다
면적일까
한쪽에는 수건의 자세만 걸어두었다
위치가 축축해질 때까지
우산이 쏟아져 내린다면 다채로운
빗속인가
나는 모습이 되지 않는다 화장실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구겨져 있는 옷에서 온몸을 꺼내주겠니
물속에서 젖은
물을 움켜쥔다 완성이라고 하는 것을
흘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