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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영, 꽃을 새기다
칼을 쓰는 하루는 무사히 지나지 않아도 좋다
꽃을 조각했다
부드러운 솔기를 다 먹는다
신전의 텍스트는 키스
6초의 시선
허벅지 한 쌍을 전각했다
아이 우는 소리에 꽃모가지 진다
소리 내지 않고
달아나지 않고
흘러내리는 분홍 알레고리아
임솔아, 모래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
스팸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
난간 아래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떨어지라고 응원해주었다
내가 키우는 담쟁이에 몇 개의 잎이 있는지
처음으로 세어보았다. 담쟁이를 따라 숫자가 뒤엉켰고 나는
속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술래는 숨은 아이를 궁금해하고
숨은 아이는 술래를 궁금해했지. 나는
궁금함을 앓고 있다
깁스에 적어주는 낙서들처럼
아픔은 문장에게 인기가 좋았다
오늘은 세상에 없는 국가의 국기를 그렸다
그걸 나만 그릴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서
벌거벗은 돼지 인형에게 양말을 벗어 신겼다
돼지에 비해 나는 두 발이 부족했다
빌딩 꼭대기에서 깜빡거리는 빨간 점을
마주 보면 눈을 깜빡이게 된다
깜빡이고 있다는 걸 잊는 방법을 잊어버려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것일까
김경성, 파미르에서 쓰는 편지
마음의 뷰파인더 속으로 들어가 있는 풍경이 익어서
암청빛 저녁을 풀어놓을 때 별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세상의 별들은 모두 파미르 고원에서 돋아난다고
붉은 뺨을 가진 여인이 말해 주었습니다
염소젖과 마른 빵으로 아침을 열었습니다
돌산은 마을 가까이 있고
그 너머로 높은 설산이 보입니다
아이들의 눈빛이 빛나는 아침입니다
나귀 옆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나무 우듬지에 걸쳐있고
풀을 뜯는 나귀의 등에는 짐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백양나무 이파리가 흔들릴 때
왜 그렇게 먼 길을 떠나왔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머니에 가득 주워 담은 별들이 차그락거립니다
당신은 멀리 있고 설산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고원에 부는 바람을 타고 나귀가 걷기 시작했습니다
나귀가 노인을 이끄는지
노인이 나귀를 따라 가는지
두 그림자가 하나인 듯 천천히 풍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재훈, 손님
아무도 없는 다방에 앉았다
백 년 전에 작곡한 가요를 무료하게 들으며
어쩌다 햇살에 비치는 먼지를 세었다
모든 게 내려앉았다
자발적인 구름도 느닷없던 비도 반복되었던 생활도
놀라운 목소리들이 명령을 내리는 한낮
귓가에 구정물이 남아 냄새가 났다
다방의 테이블도 수족관의 열대어들도 그대로였다
아무도 자라지 않았다
견디기 위해 매일 시험을 치르고 기도문을 외웠다
스멀스멀 벌레의 배설물들이 피부를 감쌌다
내 몸에 붉은 꽃이 피어났다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백 년이 지나도
물은 여전히 물로 불릴 것이다
꽃잎 한 잎이 잔 위에 떨어지면
백 년 동안 변하지 않던 물은
그 순간 꽃차가 된다
출입문의 종소리가 자꾸만 커진다
마경덕, 슬픔의 협력자들
만지면 축축하고 어두운 것들은 배후가 있다
참나무 숲은 어둑한 기운을 풀어 저녁이란 옷을 입는다
해거름이 몰고 온 퍼덕거리는 어린 새 한 마리는 저녁의 마지막 단추가 되고
숲은 닫혔다
그때 내 감성의 치맛자락이 어둠의 틈에 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온전히 슬픔 한 벌을 짓지 못한 탓
솔기가 터진 늦가을 겨드랑이 사이로 저녁연기가 피어오를 때
어렴풋한 저편에서 울컥
무언지 모를 뭉클한 것들이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덩어리들이
검게 그을린 발목이 보이고
노인의 손에 주저앉은 저녁의 영혼이 말간 콧물에 번져 굴뚝을 통과하고 있었다
슬픔의 주성분은 숲의 뼈가 타는 냄새라고 적었다
목이 잘린 해바라기가 줄지어 서 있는
외딴 집이 보이는 그 언덕에서
가만히 무릎을 웅크리며 누군가에게 꼭 슬픔을 들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