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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석륵 이야기 - 첫번째
게시물ID : history_153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11
조회수 : 851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4/15 20:05:11

오호십육국 시대 초반기를 장식하는 석륵(石勒)은 상당(上黨)의 갈실(羯室) 출신으로, 그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갈족(羯族)[1]의 작은 부족장인 주갈주(周曷硃)의 아들로 274년에 태어났습니다.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평범하게 자란 석륵은 그의 나이 14세 때 동향의 한인(漢人)과 함께 낙양으로 장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낙양의 한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긴 석륵에게 모멸에 찬 눈길을 보냈습니다. 비록 한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어도 그들에게서 모멸감을 느낀 적이 없던 어린 석륵에게는 충격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곽경(郭敬)과 영구(寧驅)라는 한인만은 석륵을 잘 대해주며 많은 물질적 원조를 해주었습니다. 석륵도 이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 그들의 토지를 경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낙양에서 돌아온 후 석륵은 종종 아버지를 대신하여 부족장을 맡았습니다. 그는 부족장으로써 부족을 잘 이끌었는지 부족민들은 그를 굉장히 신뢰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태안(太安 : 302년 - 303년) 연간에 상당에 대기근이 들면서 수많은 갈족 부락들이 해체되었고, 석륵의 부족 역시 해체되었습니다. 석륵 역시 같은 갈족 사람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곽경과 영구에 도움으로 간신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잠깐 동안 조용히 지내던 석륵은 어느날 곽경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이 대기근에서 어떻게 하려해도 안 되고 호인(胡人)들은 심하게 굶주리고 있습니다. 기주(冀州에서 곡물을 가져온다고 해서 호인을 꾀어내어 잡아다가 팔면 어떨까요? 서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그의 제안은 실패하고 오히려 그가 병주자사(幷州刺史)*동영공 사마등(司馬騰)의 노예 잡이를 만나 2인 1조로 목에 거는 형틀인 칼을 매고 다른 호인들과 함께 산동으로 팔려나가게 됩니다. 그가 이런 제안을 곽경에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이런 호인들을 잡아 노예로 팔아먹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당시 북부도위 유감(劉監)[2]은 유망하고 있는 호인을 같은 흉노족이든 갈족이든 간에 붙잡아 팔아 해치우고 있었습니다. 더불어서 태원(太原)은 이런 유망 호인들의 증가로 인해 거대한 노예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 당시의 노예사업은 짭잘한 수익을 올리는 사업이었던 것이기에 관인(官人)들과 재력이 있는 한인(漢人)들이 대거 몰려들었습니다.

 


한편 산동으로 팔려나간 석륵은 사평(仕平)의 한인 사환(師歡)의 노예가 그의 땅을 경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예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아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그는 그 근방의 목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목장 생활도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8왕의 난(300년 - 306년)으로 서진이 극도의 혼란으로 빠져든 가운데에 석륵은 목장 주인 급상(汲桑)과 함께 도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석륵은 도적 무리의 수령이 되었고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남부에서 하남성(河南省) 북부 그리고 산동성(山東省) 서부를 약탈하며 그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 도적무리를 함께 이끌었던 급상은 석륵에게 한문으로써 성과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이름이 지금까지 언급했던 「석륵(石勒)」이었습니다.  

 

 

이렇게 약탈 생활을 하던 그는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의 부하였던 공사번(公師藩)이 자립하자 그 무리에 투신하여 용병으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사번의 군대가 패배하면서 군사력과 근거지를 상실합니다. 석륵은 남은 무리들을 수습하여 업(鄴)을 중심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합니다. 하지만 이는 잠시 동안이었고 그는 다시 무리들을 이끌고 산서(山西)에서 호족(胡族)의 부장(部長)인 장배독(張背督)과 풍모용(馮莫容)의 휘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장배독과 풍모용이 307년 10월에 유연(劉淵)에게 귀순하자 그는 유연의 휘하에서 장수로 활약하게 됩니다. 그는 오환(烏桓)의 장우이도(張优利度)의 무리도 귀속시켜 전조(前趙)에 귀순시켜 보한장군 평진왕(輔漢將軍 平晉王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유망 생활을 전전하고 노예와 도적에 용병 생활까지 그 당시 호족(胡族) 하층민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다 해본 석륵은 유연 밑에서 안정적인 지위와 독자적인 군사력까지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동방 지역 경영에 종사하며 자신의 세력과 지위를 넓혀갔습니다. 그 당시 전조의 동방 경영은 석륵과 한인 출신의 사족인 왕미(王彌)에 의하여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석륵은 308년에 업을 함락시키고 사정(赦亭)과 전견(田甄)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걸활(乞活 : 8왕의 난 말기에 병주의 기근을 계기로 형성된 오벽塢壁 집단입니다.)의 일부를 흡수하였고 309년에는 기주의 군현 등을 평정하였습니다. 이 기주 공략 후에 석륵은 한인 사인들을 등용하여 군자영(君子營)을 만들고 자신의 고문 구실을 담당케 했습니다. 또 이 때 그 한인 사인들 무리 중에 장부(張賓)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이후 석륵의 모신(謀臣)으로 활약합니다.

 

 

310년에 석륵과 그의 군대는 한수를 건너 장강 유역까지 진격하였습니다. 311년에 그는 낙양 공략에 참가하여 도망치던 왕연(王衍)의 무리 10만명을 격파하고 유요(劉曜), 왕미 등과 함께 낙양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는 낙양 함락 이후에도 황하 이남에서 약탈과 전투를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이 와중에 석륵의 세력을 시기한 왕미가 그를 죽이고 그의 군대를 탈취하려고 했습니다만 이내 석륵은 왕미의 계획을 눈치채고 오히려 그를 속여 죽이고 왕미의 군대를 자신의 군대에 흡수하였습니다.

 

 

그리고 312년 석륵은 수춘(壽春)을 공략하지만 장마로 위기에 빠집니다. 이때 장빈은 더이상의 약탈과 전투는 그만두고 예전에 제패한 지역인 기주를 중심으로 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석륵은 그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양국(襄國)을 수도로 하여 기주 일대에 반독립적인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주변으로는 서진으로부터 자립하여 유주(幽州)에 세력이 있었던 왕준(王浚)이 그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석륵은 선비 단부(段部)와 왕빈을 갈라놓고 단부와 연대하였으며 오환(烏桓)의 세력을 받아들여 314년 3월에 왕준을 타도하고 유주를 획득하였습니다.

 

 

이어서 317년 7월에는 선비의 탁발부(拓跋部), 단부와 연대하여 병주에 의거하고 있던 유곤(劉琨)을 격파하고 병주 북부 일대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걸활 세력에 대한 압력을 강화했고 319년 4월에는 진천(陳川)에서 귀의한 그의 주력 세력 대부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들은 석륵이 죽을 때까지 석륵군의 정예부대로 활약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북을 중심으로 강대한 세력을 구축한 그였지만 그는 여전히 전조의 신하였습니다. 318년에 유총이 사망한 후, 유찬(劉粲)이 황제에 올랐지만 그의 부하인 근준(靳準)반란으로 인해 죽고 병주 중남부 일대를 이 근준의 반란군이 장악했습니다. 새롭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요는 석륵을 조공(趙公)에 임명하고 반란군 진압을 명했습니다. 이미 하북 최강의 세력으로 성장한 석륵에게 있어서 병주 중남부 일대를 장악한 반란군 토벌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 석륵의 군대는 평양(平陽)을 함락시켜 이 반란을 종식시킵니다.

 

 

그리고 다음해인 319년 11월 그는 스스로 대선우 조왕(大單于 趙王)이라 칭하고 관료 기구를 정리하고 관리 임용법도 제정하였습니다. 이렇게 후조(後趙)가 탄생하였습니다.



[1] 갈족(羯族)은 서진(西晉)시대 초기까지는 상당(上黨)을 중심으로 한 하북 일대에 진입하여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다른 유목민들처럼 목축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자립할 정도는 아니라 한인(漢人) 사회에 고용되는 등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석륵이 곽경과 영구의 원조에 토지를 경작하여 그 은혜를 갚았다는 것 역시 갈족들이 한인과 경제적인 보호*봉사 관계로 엮어져 결국에는 소작인으로 전락해졌다는 것을 은연 중에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이는 갈족과 마찬가지로 하북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던 흉노(匈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조조(曺操)는 흉노의 여러 부락을 지역마다 좌*우*남*북*중의 5부(五部)로 분할 통치하였습니다. 각각의 부는 각각 수천에서 1만에 이르는 락(落)으로 구성되었고 그중에서 '수(帥 : 서진 시대에는 도위都尉라고 개칭되었습니다.)'를 뽑아 통솔케 했습니다. 이러한 '수' 곁에는 한인 출신의 '사마(司馬)'가 감시자로 설치되었고, 병주자사(幷州刺史)는 '사흉노중랑장(使匈奴中郞將)'을 겸하며 5부 전체를 감독하였습니다. 조조의 대(對) 흉노정책은 서진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왔고, 이 정책은 기존의 흉노 부족연합체와 흉노 고유의 부락생활을 해체시켰습니다. 부락들이 해체됨에 따라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된 흉노인들은 한인과 경제적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관계가 긴밀하면 긴밀해질수록 그들은 한인의 노예나 소작인으로 전락하였습니다.


[2] 북부도위인 유감은 관직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흉노인입니다.

 


기타 


석륵은 본문에서 설명한 것처럼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오랫동안 한인과 함께 살아서 한문화(漢文化)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걸활 세력과 같은 각지의 오주(塢主)들을 회유하고 공격하여 오벽 조직들을 무너뜨리고 오중(塢衆) 세력들을 흡수하여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사민하고, 자신과 같은 호족(胡族) 정권에 중립 방관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족 사인(士人)*망족(望族)들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한족 지배계급의 특권적 지위를 보유케 하고 이들에게 병역과 과역을 며제하는 등 우대정책을 강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후조를 건국하기 전부터 만들어 두었던 정치고문기구인 군자영의 활용을 증대시키고 구품선거제와 그 뒤를 이어 수효시험제(秀孝試驗制)를 실시하여 한인 지배계층을 자신의 정권으로 흡수하면서 정치제도와 문화 분야의 한화를 지향했습니다.

 

하지만 한화를 지향했지만 호한이 완전히 융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조왕이라는 지극히 한족적인 명칭과 함께 대선우라는 호족적인 명칭을 함께 쓴 것은 이 후조라는 나라가 호한의 이중체제 위에 성립된 것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이 호한 이중체제라는 것은 호족이 한족보다 상위에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호족들이 일반 평민 출신의 한인들이나 심지어 사인, 망족들에 대한 폭행, 불법비행도 상당했습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권92 대녕(大寧) 원년(322)

 

「어느 날 참군(參軍) 번탄(樊坦)이 장무내사(章武內史)로 발탁되어 석륵을 알현했을 때, 그 의관이 너무 남루하여 그 사유를 묻자, 번탄이 말하기를 

 

"앞서 갈족에 약탈되어 자재(資財)가 모두 없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석륵은 웃으면서 "무도한 갈족이로다. 내가 변상하리라."라고 말하고 번탄에게 거마(車馬)*의복 비용으로 3백만 전을 배상하였습니다.

 

번탄은 직접 석륵이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보상을 받았지만 다른 한족 사인들이나 평민들은 호족들의 횡포에 보상은 커녕 저항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 출처 : 오호십육국(삼기양장),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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