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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빼앗긴 자들 - 03
게시물ID : readers_153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가마엘
추천 : 1
조회수 : 19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07 21:04:30

 

 

  

  칼레인 왕자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 후로 얼마 뒤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자신이 죽은 자들이 간다던 저승에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곧이어 저 멀리서 뭔가 흐릿한 것이 일렁이더니 반짝하며 빛이 터져 올랐다. 그것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수록 그것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궁중 내의임을 나타내는 청동으로 된 원형 목걸이를 걸치고 있었다.

  “기분은 어떠십니까.”

  순간 이 자가 자신을 우롱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궁중 내의라면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모를 리는 없을 터. 그러나 그러한 기분을 울컥하고 토해내려 하자 아랫배 근처에서 상상도 하기 싫은 고통이 올라왔다.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를 언짢은 듯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좋지는 않으시겠지요. 고자가 되어 버렸으니.”

  “너 이…….”

  뭘 믿고 이따위 소리를 해 대는지 몰랐으나 그냥 듣고 넘기기에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비참했다. 그랬기에 그는 계속해서 느껴지는 고통을 초인적인 노력으로 참아내며 손을 뻗어 내의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니, 후려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람이었을 뿐, 그가 한 것은 그저 툭, 하고 그의 얼굴에 손을 댄 것뿐이었다.

  “움직이시면 안 좋습니다. 그냥 누워 계십시오.”

  욱하는 마음에 팔을 뻗었다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휘감긴 왕자를 바로 눕히며 내의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자는 씩씩거리며 달아오른 감정을 다스리려 했으나 왠지 후드 밑으로 간신히 보이는 저자의 입술이 묘하게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아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분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내의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입을 열었다.

  “응급치료는 하였으나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거세형을 받고 멀쩡히 잘 살아간 사람은 드뭅니다. 대부분이 자신의 남성이 터질 때 충격을 받고 죽거나, 운이 따라서 살아난다고 해도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죽게 되지요. 그러니 전하께서 운이 매우 좋지 않다면 결국은 그들과 같은 운명을 겪으실 겁니다.”

  “그 입…… 닥치지 못하겠느냐.”

  “전하께서는 이곳 상로렌 탑에 유폐되셨습니다. 풀려나는 것은 지금의 폐하 사후이거나, 아니면 전하의 사후 이후일 겁니다. 조금이라도 전자에 희망을 두시려면 지금은 저에 대한 분노 따위는 가라앉히시고 어떻게 하면 살아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닥치라고…….”

  “그 전에, 전하를 조금 더 살게 해 드리느냐, 아니면 이 자리에서 죽게 해 드리느냐는 사실이 제 손에 달렸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시면 좋겠군요.”

  왕자는 입을 다물었다. 열을 냈더니 잠시 진정됐던 고통이 다시금 꾸역꾸역 올라와 몸속을 휘감았기에 말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자신이 거사에 실패하여 이런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고는 하나 왕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이상, 내의가 이토록 자신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고통 때문에 그런 것은 깊게 생각할 수 없었다.

  잠시 후, 간신히 마음을 다스린 왕자는 자신의 남성 위에 뭔가 묵직한 것이 올려진 듯한 기분이 들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내의가 자신의 그곳에 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치워라, 이 더러운……!”

  순간, 내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촛불이 꺼진 것일까?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샅 위에 올려진 내의의 두 손도 보이고 있었다. 왠지 두 손만 허공에 둥둥 떠 있어 보이는 것이 대단히 꺼림칙해 보였으나 왕자는 곧이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내의의 몸 위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그림자 속으로 숨은 것처럼, 그의 몸은 그림자에 잠식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은 것이 그의 손이었고 잠시 후, 그림자는 천천히 사라지며 내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동시에 나타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왕자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내의의 왼쪽 뺨에는 눈을 관통하는 기다란 상처가 있었다. 움푹 들어간 것이 아무래도 상처를 얻으면서 시력을 잃어버린 듯했다. 오른쪽 눈은 멀쩡했으나 그곳에는 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좀 더 시선을 돌려보니 턱 부근과 목 쪽에는 푸르스름한 검은 덩어리 같은 것들이 뭉치듯이 돋아나 있었다. 마치 무슨 역병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보기에 대단히 흉측스러웠다. 그랬기에 왕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놓친 채 입을 열었다.

  “병에 걸린 것인가? 궁중 내의가?”

  “궁중 내의는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걸린 건 저 일 뿐.”

  “그럼 네놈은 내의가 아니란 말이냐?”

  “뭐, 일단은 그렇다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누구지? 날 죽이라고 누가 보내기라도 한 것이냐?”

  “글쎄요. 그런 거였으면 전하께서 의식을 잃었을 때 이미 그리했겠지요. 게다가 이렇게 고통까지 없애 드리는 수고를 하지도 않았을 테고요.”

  “무슨 말을 하는…….”

  왕자는 문득, 더 이상 몸을 휘감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아한 마음에 슬쩍 발을 움직여 보았다. 다리도 살짝 들어 보았다.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그토록 고통스러웠건만 지금은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호기심 반 기대 반, 왕자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내의가 그런 그를 부축해서 바로 앉을 수 있게 도와주었고 왕자는 잠시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내의를 향했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대화하기가 힘드실 것 같아 고통을 잠시 잊게 하였습니다.”

  “난 그럼 죽은 거냐?”

  내의는 훗, 하고 가볍게 웃음소리 비슷한 것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며시 내저었다.

  “살아 계십니다. 지금은 신의 도우심으로 잠시 고통에서 벗어나 계실 뿐입니다.”

  “신? 그분을 말하는 거냐?”

  “신은 맞으나 아타나시우스의 신은 아닙니다. 저의 신이지요.”

  “너의 신이라 함은?”

  “저는, 오래된 종교의 사제입니다.”

  왕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내의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교도의 성직자가 이곳에 들어와 있다니? 게다가 그가 뭐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한 것일까?

  “처음 듣는 이름이군.”

  “신자 수가 적으니까요.”

  “그런가?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날 대화할 수 있게 만들었으니 뭔가 바라는 것이 있을 터. 말하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리고 넌 누구냐? 추상적인 것 말고, 알아듣게 이야기해라.”

  내의, 아니 오래된 종교의 사제는 그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이 살짝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볼에서 꿈틀거리는 검푸른 덩어리 때문에 흉측하게 보였다.

  “저는 보다시피 오래 살지 못합니다. 들어 보셨습니까? 나병이라는 것을.”

  “아니. 전염되는 것이더냐?”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께 옮기지는 않습니다.”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염되는 것이고 이미 자신에게도 옮겨졌다고 이 자가 말했다면 무슨 반응이 나왔을까 스스로 궁금해하며, 왕자는 다시 열리는 그의 입을 주시했다.

  “제게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전하께서 오래된 종교의 맥을 이어주셨으면 합니다.”

  “뭐라고? 나보고 이교도의 사제가 되란 말이냐?”

  고작 그딴 얘기 하려고 날 멀쩡하게 해 놓은 거냐고 소리치려는 순간, 남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저 전하께서 개종한다고 말씀을 해 주시는 것뿐, 실제로 하시든 말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를 우롱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것이더냐?”

  “말장난이라…… 이런 것을 느끼셔도 그런 말씀을 하시렵니까?”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왕자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고통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큭, 하고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 보려고 하던 왕자는 점점 고통이 커지며 인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자 항복하겠다는 뜻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고통이 사라졌다.

  “네놈…… 대단히 요망한 놈이구나. 결국은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을 핑계로 날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냐.”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제게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례를 무릅쓰고 저의 소망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종한다고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시면 전하께서는 아무런 고통 없이 이곳에서 풀려나시게 될 것입니다.”

  “하! 웃기는 소리로군 그래. 고통은 네놈이 어떤 요사스런 힘으로 없애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이곳에서 풀려나려면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든가 내가 죽든가 둘 중의 하나라고 네놈이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무슨 수로…….”

  말을 하던 왕자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의혹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검푸른 덩어리들에게 느껴지는 고통 때문인지 잠시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설마…… 네 녀석이 아버지를…… 아니, 네놈이 바로, 그때 아버지 곁에 있던 놈이냐?”

  홀에서 왕의 옆에 있던 검은 로브의 사내가 떠올라 왕자는 소리쳤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그때와 달랐으나 풍기는 느낌이 흡사했다. 어둠. 음습한 차가움.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우울함과 죽음의 기운…… 이 녀석이 섬기는 신은 죽음의 신인 것일까? 말만 사제라고 하고 사실은 악마를 숭배하는 놈이 아닐까?

  “네. 그때 서 있던 사람이 저입니다. 그리고…….”

  손을 뗀 남자의 얼굴을 보고 왕자는 헉, 하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푸르스름한 검은 덩어리들이 대부분 사라진 남자의 얼굴은 너무나도 자신의 모습과 흡사했다.

  “스무 해 전, 전하의 바로 옆에 나란히 누워 있던 것도 저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젠 내 얼굴을 훔쳐 가기라도 한 것이냐?”

  “아닙니다. 저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 날, 보랏빛 출생의 타이틀을 거머쥔 것은 전하 혼자만이 아니니까요.”

  보랏빛 방에서 태어나 보랏빛 출생이라 불리는 영예로운 호칭의 근원은 라티움 제국을 지배하는 콤네노스 황실에 있었다. 제국의 수도인 비잔티노플의 대황궁 중앙의 높은 성에는 침대부터 커튼까지 모조리 자줏빛으로 꾸며진 방이 있었다. 그곳의 넓은 창문으로는 수도의 전경은 물론이고 그 너머로 펼쳐진 탁 트인 해안가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전망도 좋고 화려하기 그지없이 꾸며 놓은 이 방은, 평상시에는 비어 있다가 황후가 출산할 때가 다가오면 그 빛을 발하게 된다. 황후가 바로 이곳에서 아이를 낳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태어날 때 자줏빛 출생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며 이것이 없는 다른 형제보다 더 강력하게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자줏빛의 보호를 받으며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굳이 그들이 계승권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모든 제국의 봉신들과 가신들은 자줏빛 출생이 아닌 황제는 섬기지 않았다. 그것이 대대로 이어온 라티움 제국의 전통이었다.

  그런 대국의 전통이 이런 소국에도 있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으나, 국왕과 후계자의 존재 자체를 더욱 고귀하게 하는 것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법이었다. 따라서 제국 내외부에 있는 크고 작은 왕실들은 그것을 열심히 모방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비참한 신세로 전락한 칼레인 왕자 역시 아키엔 왕국을 다스리는 나이시아 왕가의 정통 후계자임을 나타내는 보랏빛 출생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시아 12세 이후로 보랏빛 출생을 한 것은 칼레인 왕자가 유일했다.

  헌데 이십 년도 더 지난 지금, 비록 한쪽 얼굴을 다치긴 했지만 왕자와 거의 같은 얼굴을 가진 자임을 알아보는 데 무리가 없을, 검은 로브의 사내 역시 자신 또한 그것을 가지고 있다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

 

 

  자줏빛 출생은 비잔티움 제국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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