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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빼앗긴 자들 - 04
게시물ID : readers_153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가마엘
추천 : 1
조회수 : 21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07 21:05:51

 

 

  

  왕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 말은, 우리가 형제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단순히 형제를 넘어서, 한 얼굴 쌍둥이인 것이지요.”

  “하!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것이냐? 얼굴이 조금 닮았다고 하여 어디서 그런 시답잖은…….”

  “믿든 말든 그것은 전하의 자유입니다. 저는 전하께 그 사실을 믿어 달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오래된 종교의 사제라고 말씀드렸을 뿐이지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창백한 얼굴로 말하고 있는 그를 보니 왕자는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랬기에 중간에 자신의 말을 끊은 무례함에 대한 분노 따위는 채 느끼지 못했다. 대신 의문이 떠올랐다. 만일, 정말로 우리가 쌍둥이이었다면, 그랬다면 왜 나는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왕실에서 후계자를 비롯한 왕의 아이들이 탄생할 때에는 여러 귀족이 입실하여 지켜보는 것이 전통이었다. 물론 과거에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오는 바람에 왕비가 혼절해 버린 적도 있어서 지금은 귀부인들이나 궁정의 고위 관료들과 주교들로 입장이 제한되기는 하였으나 어찌 됐든, 출생에 대한 증인은 꽤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말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버지께서 입막음을 하신 걸까?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곰곰이 생각해 보자 뭔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진행하도록 눈앞의 남자는 아량을 베풀지 않았다.

  “다시 말씀드리건대 제가 원하는 것은, 전하께서 오래된 종교의 맥을 이으시는 겁니다.”

  “지금, 빌어먹게도 남자 구실을 못 하게 된 내 앞에서 그딴 종교 개종이나 말하고 있다니,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너 같은 이교도 자식은 말할 것도 없이 바로 화형이다!”

  “전하께서 고자가 되신 것은 저의 잘못이 아니니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화형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전하처럼, 전하와 함께, 살고 싶을 뿐입니다.”

  은근히 고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도 표정 변화 하나 없는 그였다. 왕자는 지금이라면 고통도 느껴지지 않고 손발도 자유로우니 이놈을 두들겨 팬 뒤 짓밟아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자신의 몸과 달리 눈앞의 남자는 긴 소맷자락 바깥으로 드러나는 팔과 손이라든가 다시 슬금슬금 검은 덩어리들이 피어오르고 있는 목 부분들이 상당히 가는 편이었다. 못 먹어서 피골이 상접한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덮쳐 버리면 그대로 깔려서 제대로 버둥거리지도 못할 것이 확실할 정도로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왕자가 채 손을 쓰기도 전에 그것을 눈치챘는지 남자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위협하듯 말했다.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제가 이대로 물러가면, 조금 전보다 더 큰 고통이 몰려들 겁니다. 전하께서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이 세상을 떠나실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체. 빌어먹을…… 알았다. 원하는 걸 다시 정확히 말해라.”

  죽는 것도 싫고 그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또 느끼는 건 더욱 싫었다. 열 받아서 잠시 잊기는 했으나 지금 자신의 고통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남자의 알 수 없는 힘으로 잠시 사그라진 것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조금 전에 그랬듯이 자신은 온몸을 불타는 쇠꼬챙이로 쑤시는 듯한 격렬한 고통이 휘말릴 터. 지금은 자존심 따위는 버려야 했다.

  “제게 이교도 어쩌고 하고 하셨지만, 전하의 아타나시우스 교에 대한 신심이 그다지 깊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허니, 오래된 종교로 개종하시는 것에 그다지 큰 거부감이 들지 않으실 테지요. 전하께서 하실 것은 오직 하나, 개종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 주시기만 한다면, 나머지는 모두 전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왕자는 조금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개종하면 된다고? 아니, 실제로 개종하는지 안 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고, 정말로 그냥 개종하겠다고 말만 하면 된다고? 그러면 살 수 있다고? 이 뜬금없는 자비를 베푸는 남자에게 왕자는 의구심이 솟구쳤으나,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묘한 안도감이 드는 것도 같았다.

  남자의 말대로 왕자는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신심이 그다지 깊지는 않았다. 국교이기에 당연히 그냥 믿고 있는 것이지, 주일 미사에도 형식적으로 참여할 뿐 한 번도 독실한 믿음을 가지고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왕국의 후계자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대주교는 꽤 불만인 듯했으나, 왕조차 그에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놓고 나서서 신심이 부족하다는 둥 혹독한 참회와 고행이 필요하다는 둥 하는 말은 꺼낼 수조차 없었다. 안 그래도 지금 제국에서 발생한 아리우스파와 같은 이단들과의 싸움으로 종교의 권위가 떨어지고 분열이 발생하고 있는 이때 괜히 그나마 잘 믿고 있는 왕까지 등을 돌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왕자가 말뿐이라기는 하지만 이교도의 믿음으로 개종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체통도 잊고 펄펄 날뛰는 대주교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으나 왕자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왕자는 입을 열었다.

  “알겠다. 개종하겠다.”

  “전하의 존함과 오래된 종교의 이름도 넣어서 한 번 더 말씀해 주십시오.”

  “까다롭게 구는군. 알았다. 나, 칼레인 폰 나이시아는 오래된 종교로 개종하겠다.”

  “고맙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자의 몸이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흡사 모래가 스러져 내리는 것처럼 남자의 머리와 어깨와 가슴과 손발이 쏟아져 내리며 바닥에 확 펼쳐졌다. 깜짝 놀란 왕자는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짙은 안개와도 같은 것이 바닥을 가득 메운 채 뭉글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내 안개가 천천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방 안 전체가 하나가 되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착각에 왕자가 어지러움을 느낄 무렵, 갑자기 안개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일어났다. 그리고 미처 놀랄 틈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왕자에게 달려들었다.

  “으, 으악!”

  안개가 몸을 휘감는 순간, 거세를 당할 때의 고통이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다. 아니, 그것 이상이었다. 불타는 쇠꼬챙이가 몸 안에서 난동을 벌였다. 온몸의 피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몸 전체가 불타는 것만 같은 극심한 고통에 왕자는 길게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목구멍조차 타들어 갔기에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은 희뿌연 연기 같은 것밖에 없었다.

  “……!!”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고통은 사라졌다. 하지만 몸을 잘게 부수는 듯한 끔찍한 고통의 후유증 때문에 그것이 사라졌음에도 왕자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다가 뭔가 서늘한 기운이 자신을 휘감는 것을 느끼고는 슬며시 눈을 떴다.

  방 안은 멀쩡했다. 안개가 소용돌이치고 자신이 난동을 피웠건만 자빠지거나 부서진 것 하나 없어 보였다. 물론 감옥과도 같은 곳이었기에 별다른 물품들이 없기는 했으나 잘 정돈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조금 전까지 누워 있었을 거라고 짐작되는 침대의 끄트머리에는 의복 한 벌이 잘 개킨 채 놓여 있었다. 그제야 이 서늘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왕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대충 꿰어서 입어 보니 희한하게도 자신이 즐겨 입던 옷이었다. 이 옷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하고 의아해할 무렵,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깨어 계십니까.”

  “누구…… 아, 그대로군. 병문안이라도 온 건가? 아니지, 고자가 된 게 병은 아니니까…….”

  의외로 왕자가 멀쩡해 보이는데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지도 않은 모습에 그의 앞에 나타난 로데인 남작은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그냥 넘겨 버렸다.

  “전하,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 뭐라고?”

  “조금 전에 궁중 내의가 확인하였습니다. 침수 드신 뒤 조용히 숨을 거두신 것 같습니다.”

  왕자의 눈에서 빛이 폭발하는 듯해 남작은 고개를 조아렸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에 슬퍼하지 않을 아들이 어디 있겠느냐만, 왕자의 경우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반역을 일으킨 죄목으로 거세를 당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지 기뻐할지 남작으로서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모두 빗겨가 버렸다. 왕자는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는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가셨다고? 정말…… 그 녀석 말대로?’

  그렇다면, 그 녀석이 아버지를 시해하기라도 한 건가?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 상로렌 탑에서 왕의 침실이 있는 궁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최상단에 있는 이곳에서 밑으로 내려가는 것만 해도 한참이 걸리는 판에 날아서 간다면 모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왕자는 왠지 오싹해졌다. 혹시 날아서 가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 전에 그 녀석은 죽은 걸까 아니면 내 몸 어딘가에 기생이라도 하는 걸까?

  “전하, 괜찮으십니까?”

  당연히 부왕의 붕어를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는 왕자와 그런 그의 앞에서 망극이 어쩌니 하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왕자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랬기에 한다는 말이 고작 괜찮으냐는 말이었고 왕자가 자신을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자 남작은 입이 방정이다, 하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가 여기에 얼마나 갇혀 있던 거지?”

  “지금이 깊은 새벽이니 못 해도 반나절은 넘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선…… 편히 가셨느냐.”

  “내의의 말로는…… 고통 없이 가셨을 거라 했습니다.”

  “…… 그럼 나는, 이제 유폐에서 풀려나는 것이냐? 그것을 전달하러 온 것이냐?”

  “그렇습니다, 전하. 지금 궁은 폐하의 급작스런 승하의 소식을 듣고 몰려 온 수도의 영주님들과 관료들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전하의 측근인 가르멜 백작님께서 저를 서둘러 보내셨습니다. 이미 전령을 일곱 영지로 모두 보냈으니 날이 밝는 대로 장례 절차가 진행될 것 같습니다. 하오니…….”

  “알았다. 가자.”

  “네, 전하.”

  더 장황한 설명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이 유폐되긴 했지만, 그 유폐의 기간은 나이시아 12세의 죽음까지였다. 이제 왕이 죽은 이상 유폐는 끝났고 별다른 후계자가 없는 까닭에 나이시아 13세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칼레인 왕자뿐이었다. 따라서 그는 선왕의 후계이자 대리인이며 차기 국왕으로서 대주교와 함께 장례를 집전해야만 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는 했으나 왕자는 당장 풀 수 없는 것들은 머리 한쪽으로 미뤄놓았다. 지금은,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거사를 치렀다가 실패하고 거세까지 당해 버리는 바람에 바닥으로 추락한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과 동시에 여전히 자신이 정통성 있는 후계자임을 보여야만 했다. 그래야 차기 국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댓글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

  다들 즐겁고 행복한 추석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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