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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경제와 조선의 경제 간단비교
게시물ID : history_153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uphony
추천 : 7/8
조회수 : 7063회
댓글수 : 33개
등록시간 : 2014/04/16 21:03:52
정규교육과정의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있는 양반전은 허생이라는 상업경험도 없이 불과 1만냥을 밑천으로 하여 조선의 시장경제를 유린하며 매우 빠르게 이를 100만냥으로 불린 작중 양반을 통해 조선의 상업경제를 조롱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조선은 경제가 형편없었던 시대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반해 고려는 서적이나 매스컴 등에서 아라비아 상인들이 왕래하는 국제교역항을 가진 찬란한 상업경제국으로 그려지곤 한다. 이렇듯 고려가 조선보다 전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더 우월한 경제를 가진 것으로 자주 묘사되는데 과연 어떠할까?


* 인구규모
전근대시대 국가의 경제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구이다. (현대도 아마 그럴 듯) 즉 인구규모는 국가의 경제규모와 역량의 척도가 되는데 우선 고려와 조선의 인구를 비교해 보면,

고려 건국당시(918년) : 약 300만명
고려 멸망당시(1392년) : 약 550만명
474년간 약 83.3% 증가

조선 건국당시(1392년) : 약 550만명
대한제국 개국(1897년) : 약 1700만명
505년간 약 208.8% 증가


비슷한 기간동안 조선의 인구증가율이 고려의 그것을 탁월하게 앞섰는데, 이는 농업생산량 증가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 시비법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전국토의 개간이 진척되어 인구가 1100만명선으로 고려 멸망당시에 비해 2배 증가한다. 조선후기에는 이앙법의 전국적인 확산과 견종법을 통해 인구가 추가로 600만명이 추가된다.

*추신 : 조선후기의 이앙법의 확산은 조선 정부의 공으로는 돌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조선정부는 오히려 수자원의 고갈을 이유로 이앙법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 이러한 이앙법의 확산의 공로는 스스로 부유해지길 바란 소위 '기업가적 농민'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대중무역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나 무역의 주된 파트너는 중국이었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은 중국과의 무역을 얼마나 자주하였는가?

고려 - 고려시대 가장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대는 중국에 송(宋)이 위치하고 있었을 무렵이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260년여간 총 120여차례, 즉 대략 2년간 1회 무역이 이루어졌다.

조선 - 조선은 명, 청 시대 연간 최소 1회 공무역이 존재하였으며, 사무역 또한 빈번히 발생함.


최대무역 파트너였던 중국과의 무역의 빈도에서도 조선이 고려에 비해 우위였다. 비단 무역횟수가 아니라 무역량에서도 조선은 고려를 압도했다. 예컨데 1841년에 조선이 청에 수출한 인삼의 액수가 600만냥인데, 이는 1790년 기준 조선의 중앙정부 세금수입 액수인 약 789만냥에 육박하는 거액이다. 인삼무역상인 임상옥이 청에서 판매한 인삼의 액수만 해도 90만냥에 이르렀다.


* 대일무역

전통적으로 중국 다음으로 규모가 큰 수출시장은 일본이었는데, 고려는 사실상 30여년간의 시기를 제외하면 일본과의 교역이 없다시피했다. 반면에 조선은 일본과 공무역을 유지하였고 내상을 통해 사무역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역의 규모는 대중무역에 비하면 협소하였는데 공무역의 경우 연간 20만냥, 사무역의 경우 연간 4만냥 선에 그쳤다.


* 그 외

고려사 500년간 벽란도에 아라비아 상인이 3회 입항한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중국을 주 무역대상으로 삼고있던 아라비아 상선단이 송나라의 무역상을 따라 벽란도에 들렀다 돌아갔다고 보는게 옳다. 조선시대에는 아라비아 상인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류큐, 시암, 참파 등 동남아 상인과 무역사절단이 입항한 기록은 존재한다. 즉 중일 이외의 세력과의 무역에서도 조선이 고려를 앞섰다.



* 조선의 무역이 고려의 무역을 앞선이유
어쩌면 당연한 이유인데 바로 조선의 경제 생산성이 고려의 그것을 앞섰고, 이로 인하여 잉여 생산물, 즉 내다팔 것이 고려의 그것에 비해 훨씬 많았기 때문. 결국 2차 산업은 1차 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3차 산업은 1,2차 산업과 밀접한 관련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개경의 왕도민들은 끼니를 잇기 위해 모두 교외에 텃밭을 마련했으나, 조선시대 한성인들은 그럴 필요성은 없었다.




* 기타 잡설

- 목화가 13세기 혹은 14세기 무렵부터 보급된다. 이로 인하여 고려 후기부터 한반도인들은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는 의복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고려 전기, 중기에는 그런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 고려시대 개경 나성내의 주택중 7,80%는 초가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초가집의 평균규모는 3평 내외였다.

- 인삼은 조선의 최대수출품목이었는데 이것이 '고려인삼'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고려시대에 인삼이 대대적으로 수출되거나 알려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중국,일본인들이 한반도인들을 '고려인', 조선을 '고려'라고 호칭했던데 기인한다. (다만 중국, 일본의 공적인 외교문서에는 조선을 '조선'이라 기록했다.) 인삼이 중국과 일본에 대대적으로 수출하게 된 시기도 조선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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