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료로서의 왜왕
김부식은 『삼국사』에서 왜왕 취임이나 백제 왕족이 열도에 공무로 출장가는 것을 인질로 표현했고 왜왕의 보고와 왜왕에 대한 지시를 사신(외교관계)으로 표현했다. 이는 「일본서기」를 역사서로 간주한 김부식의 무지로 인해 생긴 표현이다. 그는 백제의 관직명 ‘왜왕’을 왜국의 왕으로 생각하였다. 낙랑군이 요양이라고 생각하여 대륙백제의 사료를 싣지 않았던 것처럼, 김부식은 올바른 원사료를 변개(김부식의 생각에선 오류를 수정)하였거나 올바른 사료를 버리고 「일본서기」와 같은 그른 사료를 채택하여 기록하였다.
아신왕이 397년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것은 『三國史』 「百濟本紀」 阿莘王 六年, 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태자가 왜왕으로 취임하였음을 의미한다. 태자를 왜왕으로 보냈다는 것은 당시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으로 열도 경영(물자와 인력 수탈)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아신왕이 402년 5월에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술을 구했다는 것은 『三國史』 「百濟本紀」 阿莘王 11년 五月, 遣使倭國, 求大珠.
왜왕(태자)에게 구술을 구해서 보내라 명령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신왕이 죽은 후인 409년 왜왕이 야명주를 보내온다. 『三國史』 「百濟本紀」 腆支王 五年, 倭國遣使, 送夜明珠, 王優禮待之
왜왕이었던 전지왕이 왕으로 취임하기 위해 백제로 올 때는 군사 1백명의 호위를 받는다. 『三國史』 「百濟本紀」 腆支王 원년, ‘倭王以兵士百人衛送’
인질을 호위해서 보내주는 나라는 있을 수 없다. 전지왕이 418년 보낸 비단 열 필은 『三國史』 「百濟本紀」 腆支王 十四年, 夏, 遣使倭國, 送白綿十匹.
왜왕에 대한 하사품이다. 비유왕 2년(428년) 왜국의 사신이 왔는데 따라온 사람이 50명이었다는 것은 『三國史』 「百濟本紀」 毗有王 2년 倭國使至, 從者五十人.
사자가 호위병 50명에 해당하는 직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653년에 의자왕이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三國史』 「百濟本紀」 義慈王 十三年秋八月, 王與倭國通好.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왜왕은 의자왕의 아들인 풍인데 무슨 우호관계를 더 맺을 수 있겠는가?
복신은 인질로 있던 풍을 왕으로 추대한다고 하는데 『三國史』 「百濟本紀」 義慈王 二十年 武王從子福信甞將兵, 乃與浮屠道琛, 據周留城叛, 迎古王子扶餘豊, 甞質於倭國者, 立之爲王
「일본서기」는 풍의 귀환을 위해 5천명의 호위부대를 보냈다고 한다. 이는 풍이 왜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인원이다. 「일본서기」는 663년 27,000의 병력을 백강으로 보냈다고 하는데 이는 백제가 본국이기 때문이다.
실성왕은 402년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고, 『삼국사』 「신라본기」 실성왕 元年,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412년에는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데, 『삼국사』 「신라본기」 실성왕 十一年, 以奈勿王子卜好質於髙句麗.
미사흔을 볼모로 받는 왜는 광개토대왕이 나라에 설치한 고구려계 국가이다. 열도 정벌 시 고구려군에 협조한 안라국일 가능성이 크다. 400년에 광개토대왕이 열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지배 범위가 축소되고 고구려계 소국이 힘을 얻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열도 백제에 승리하였으므로 백제관료인 왜왕에게는 볼모를 보낼 필요가 없었다. 실성왕이 정적도 제거하고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나라의 안라국으로 추정되는 고구려계 국가에 미사흔을 보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미사흔을 볼모로 받는 왜는 백제의 왜왕이 아니다.
2. 왜5왕
송서(宋書)에 의하면, 5세기에 讚, 珍(彌), 濟, 興, 武라는 왜왕이 등장하는데, 이들 왜왕의 계보가 「古事記」와 「日本書紀」에 나오는 천황의 계보와 일치하지 않고 있어 현재까지 이들 倭5王을 「古事記」와 「日本書紀」의 어느 천황에 비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홍성화, 「금석문과 5세기의 왜왕」, 『동양예술 22호』 2013. 64쪽.
강단·일제유사사학은 열도가 백제의 행정구역이었음을 숨기기 위해 소설을 현실화하는 위대한 작업을 하고 있다. 이들 5인의 혈통관계에 대해서도 讚 珍(彌)과 濟 興 武가 별개왕통이라는 설이 제시된다고 한다. 홍성화, 위 글 68쪽.
당연히 왕통이 이어질 수 없다. 백제의 임명직인데 어떻게 왕의 계통을 따질 수 있겠는가? 소위 왜5왕 중 武가 478년 송에 표문을 보냈다. 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宋書』 「東夷列傳」 封國偏遠作藩于外,自昔祖禰躬擐甲冑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眾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于歲。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 歸崇天極道逕百濟裝治船舫,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雖曰進路或通或不。臣亡考濟實忿寇讎壅塞天路,控弦百萬義聲感激方欲大舉,奄喪父兄,使垂成之功不獲一簣。居在諒闇不動兵甲是以偃息未捷。至今欲練甲治兵申父兄之志,義士虎賁文武效功,白刃交前亦所不顧。若以帝德覆載,摧此強敵克靖方難,無替前功。竊自假開府儀同三司,其餘咸各假授,以勸忠節。
신의 나라는 구석지고 먼 곳에 있어 바깥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옛적부터 조상이 스스로 무장을 하여 산천을 누비느라 편히 쉴 겨를이 없었습니다. 동쪽으로 55국을 정복하고 서쪽으로 66국을 복속시키고, 바다 북쪽 95국을 평정하여 왕도를 성하게 하고 곽토를 키웠으며, 여러 해 알현하며 소홀함이 없었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선대의 업을 황송하게 이어서 다스리는 곳을 이끌고 중국의 조정을 존중하고자 하였습니다.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하므로 큰 배를 준비하였는데, 고구려가 무도하여 집어삼키려 하고, 변방을 노략질하며 살육을 그치지 않으니, 매번 지체되어 순풍을 놓치게 됩니다. 비록 길을 나서지만 혹은 통하고 혹은 통하지 못합니다.
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제(濟)가 실로 원수가 황제께 가는 길을 막는 것에 분노하니, 100만 병정이 의로운 소리에 감격하여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고자 하였는데, 갑자기 아버지와 형을 잃어, 거의 이루어진 일이 마지막에 실행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상중에 있어 병사를 움직이지 못하여 쉰 채로 이길 수 없었습니다. 이제 갑옷과 무기를 잘 갖추어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합니다. 의로운 선비와 용맹스러운 병사가 문무로 공을 세우려, 번쩍이는 칼날도 두려워 않습니다. 만약 황제의 덕이 세상에 가득차서, 제가 이 강적을 무찔러 저희의 어려움을 극복한다면, 이전의 공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스스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가수(假授)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모두 각각 적당한 직을 가수하여, 충절을 권유하였습니다
『송서』에 의하면
『宋書』 「東夷列傳」 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世修貢職。高祖永初二年,詔曰:「倭讚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太祖元嘉二年,讚又遣司馬曹達奉表獻方物。讚死,弟珍立,遣使貢獻。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表求除正,詔除安東將軍、倭國王。珍又求除正倭隋等十三人平西、征虜、冠軍、輔國將軍號,詔並聽。二十年,倭國王濟遣使奉獻,復以為安東將軍、倭國王。二十八年,加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將軍如故。并除所上二十三人軍、郡。濟死,世子興遣使貢獻。世祖大明六年,詔曰:「倭王世子興,奕世載忠,作藩外海,稟化寧境,恭修貢職。新嗣邊業,宜授爵號,可安東將軍、倭國王。」興死,弟武立,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동북아역사넷(http://contents.nahf.or.kr)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2022.3.10. 현재) 왜국은 고려(高驪)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는데, 대대로 공직(貢職)을 바쳤다. 고조(高祖) 영초(永初) 2년(421)에 조하기를, “왜의 찬(讚)은 만 리 바깥에서 공직을 바치니, 멀리서 온 정성이 참으로 크므로, 제수(除授)를 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태조 원가 2년(425)에, 찬이 다시 사마(司馬) 조달(曹達)을 보내어 표를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찬이 죽고, 아우인 진(珍)이 즉위하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칭하기를 사지절(使持節), 도독(都督)왜·백제·신라·임나(任那)·진한(秦韓)·모한(慕韓)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 왜국왕이라고 하였다. 표를 올려 정식으로 임명해 주기를 구하므로, 조를 내려 안동장군(安東將軍) 왜국왕에 제수하였다. 진이 또한 왜수(倭隋) 등 13인의 평서(平西)·정로·관군·보국장군이라는 칭호를 정식으로 임명해주기를 바라므로, 조를 내려 모두 허락하였다. [원가] 20년(443)에 왜국왕 제(濟)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奉獻)하므로, 다시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삼았다. [원가] 28년(451)에 사지절(使持節), 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를 더하고, 안동장군은 전과 같이 하였다. 아울러 올린 23인의 군(軍)과 군(郡)을 제수하였다. 제가 죽자, 세자인 흥(興)이 사신을 보내어 공헌하였다. 세조 대명 6년(462) 조하여 말하기를, “왜왕의 세자 흥은 여러 해 동안 충성을 하고, 바깥 바다의 번국이 되어 교화를 받아들여 변경을 편안히 하였고, 공손히 공직을 닦았다. 새로이 변경의 왕업을 이었으니 마땅히 작호를 내리되,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한다.”고 하였다. 흥이 죽자 아우인 무(武)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칠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을 자칭하였다.]
제(濟)가 죽자 흥이 462년에 조공하였다는데, 무의 표문에서는 478년 시점에서 갑자기 아버지인 제(濟)와 형을 잃었고 최근까지 상중이었다고 말한다. 무가 아버지의 죽음을 거짓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며, 『송서』는 제가 조공하다 흥이 조공하니 제가 죽은 것으로 기록했을 수 있으므로, 제는 무의 아버지로 보인다. 왜왕 무가 표현하는 고구려에 대한 적개심과 고구려 정벌의 의지로 보아 그는 백제의 왕족이다. 고구려는 475년 9월 개로왕을 살해하였다. 477년 4월에 내신좌평에 임명된 왕제 곤지가 7월에 죽고 8월에 해구가 전횡을 하며 문주왕을 죽였다. 『三國史』 「百濟本紀」 文周王 夏四月, 拜王弟昆支爲内臣佐平, 封長子三斤爲太子. 秋七月, 内臣佐平昆支卒. 秋八月, 兵官佐平解仇, 擅權亂法, 有無君之心, 王不能制. 九月, 王出獵, 宿於外, 解仇使盗害之, 遂薨.
곤지도 해구가 살해했을 것이다. 문주왕의 아들인 삼근왕은 열세 살에 즉위하는데 해구가 전횡하고 있다. 『三國史』 「百濟本紀」 三斤王 三斤王 或云壬乞., 文周王之長子. 王薨繼位, 年十三歳. 軍國政事一切委於佐平解仇.
왜왕 무는 478년 시점에서 그전까지는 상중이었고 이제 부형의 뜻을 펼치고자 한다고 말한다. 왜왕 무가 개로왕의 아들이라면 477년에 상이 끝나고, 곤지의 아들이라면 478년에는 여전히 상중이어야 하므로 왜왕 무는 개로왕의 아들이다. 표문을 보내는 시점에서 백제는 실질적으로 왕이 없는 상태이므로 무의 표문은 백제왕이 되기 위한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왜왕 무는 무령왕으로, 제는 무령왕의 아버지인 개로왕으로, 흥은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로 추정된다. 김주인, 「5세기 왜(倭) 5왕의 성격과 실체에 대한 연구 -『송서(宋書)』에 나타난 「상표문(上表文)」을 중심으로-」, 『역사와융합,(12)』, 2022. 26-31쪽.
소위 왜오왕은 모두 백제의 관료인 왜왕이다. 왜왕이 송에 조공하고 작위를 받는 것은 본국인 백제의 지시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5세기 당시 열도를 양분하였던 고구려계 국가와의 경쟁관계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시 없이 외교를 하였다면 충성심을 의심 받아 당장 교체되었을 것이다. 물론 무는 당시 상황상 독자적으로 또는 왕권 회복파와 연계하여 조공하였을 것이다.
중국의 작위는 열도경영을 효율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왜왕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면도 있지만, 왜왕 자신보다 열도 소국의 세력가들에게 벼슬을 주어서 통치하기 위한 것이다. 즉 진은 13인, 제는 23인의 작호를 요구하는데 이들은 백제에 복종하는 열도의 소국들 수장이라 볼 수 있다. 이들에게 작호를 주어 이들이 고구려 쪽으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왕이 요구하거나 받은 작위의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은 모두 열도에 있는 마을국가들의 이름이다. 임나 진한 모한은 한반도에 있을 수가 없다. 무의 표문에서 가는 길이 백제를 거쳐야 한다고 하므로 진과 무가 자칭한 육(칠)국제군사의 백제는 열도의 백제이다. 백제의 군사(軍事)를 자칭하면서 백제를 지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송은 백제를 제외하고 작위를 주는데 왜의 사정을 모르거나 본국백제와 혼동될 것을 염려하여서일 것이다. 중국 왕조가 작위를 줄 때 어떤 독립된 정치적 실체를 요구하였을 것이므로 있지도 않은 왕계(王系)를 말하였을 것이다. 「일본서기」의 시기를 120년 240년 360년 등 어떻게 바꿔도 왜오왕을 날조된 천황과 일치시킬 수가 없다. 왜오왕만으로도 「일본서기」는 날조서임이 증명됨에도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를 고대사의 핵심 사료로 간주하여 야마토임나가 진실이라고 소리높여 주장한다. 일제유사사학을 향한 눈물겨운 충정에 그 누가 감동하지 않으리.
당은 백강전투에서 승리 후 664년 쓰쿠시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672년 5월 철수할 때까지 8년간 약 2,000명으로 구성되는 부대를 6회에 걸쳐 파견하여 열도를 지배하였다. 최재석, 「일본 고대사의 시대구분과 한국: 그 서설적 탐구」, 『한국학논총 33』, 2010. 542쪽.
「일본서기」 38대 천지왕의 재위 기간인 668년-672년은 당나라의 열도 지배기간에 포함되므로, 열도에 왕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38대 천지도 당나라와 교섭한 백제인을 모델로 하여 날조된 인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은 672년 요동반도백제와 평양(요양)의 전투에서 신라의 우세가 거의 확정되므로 열도를 지배하기 어려워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당이 열도에서 떠난 후, 672년 6월 신라는 2만 병력을 파견하여 임신전쟁을 통해 친신라정권을 세우고 열도에 최초의 고대국가를 성립시킨다. 최재석, 『일본 고대사의 진실』, 일지사, 1998. 112-121쪽.
「일본서기」 39대 천무왕은 신라가 위성국의 지배자로 세운 인물이므로 천지의 동생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39대 천무도 신라가 세운 인물을 모델로 하여 날조된 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친신라세력 집권 15년 후 다시 백제계가 집권한다. 문정창, 『한국고대사』, 인간사, 1988. 308쪽.
「일본서기」에 의하면, 39대 천무가 686년에 죽고 40대 지통이 690년 즉위한다. 686년에서 690년 사이의 기간은 친신라세력에 대해 백제계가 반격하여 정권을 되찾는 기간으로 추정된다. 백제계가 집권하므로 지통이 천무의 아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40대 지통도 날조된 왕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백제계가 집권한 후에도 열도는 727년까지 신라의 속국으로서, 신라의 지도와 감시 하에 정치제도 정비, 신라 복식 사용, 왕도(등원경) 설립과 이전, 불사 신축 등 국가의 체계를 갖추었다가, 대진(大震)이 강력해지면서 대진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된다. 최재석, 「일본 고대사의 시대구분과 한국: 그 서설적 탐구」, 『한국학논총 33』, 2010. 543-549쪽.
당시 열도에 있어 당에 끌려가지 않았던 백제의 지배층들에게 신라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환황해 동남아 열도를 활동영역으로 위나라를 패퇴시키고 고구려와 맞섰던 대해양제국의 일원이었던 자신들이, 韓에 있을 때는 백제의 속국이었고, 『隋書』 「동이열전」 신라, 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그 왕은 본래 백제인이다. 바다로 도망쳐 신라에 들어가면서부터 마침내 신라인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경상도로 와서는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변방의 신라에 지배당하는 현실이 어이없었을 것이다. 신라가 당을 격퇴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반항은 꿈도 꿀 수 없는 현실이 서글펐을 것이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로서, 신라 지배 시기에 피폐해진 마음에 얼마간의 위안이라도 주려는 정신 승리를 위한 판타지이다. 신라에 망한 백제를 계승한다고 하면, 신라 지배의 악몽이 지워지지 않으므로 그들은 천삼백여년의 가공역사를 만들어 환상 속으로 도피하였다. 「일본서기」를 고대 한일관계를 규정하는 역사서라 주장하는 강단유사사학은 대일본제국의 망상에서 살고 있는 전범집단의 엔화 속으로 도피하고 있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출처 | https://blog.naver.com/bbondd0/2230484831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