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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진패선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53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3
조회수 : 112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17 16:53:24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진(陳) 왕조'를 개창한 진패선은 503년 태호(太湖)의 남쪽에 있는 오흥군(吳興郡)의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미천했지만 나름대로 조용한 어린시절을 보낸 진패선은 성인이 되어 처음에는 마을의 관청에서 근무하다가 이후에는 관청의 기름 창고지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동안 기름 창고지기를 하던 진패선은 대동(大同. 535-545) 초에 신유후(新喩候)이자 오흥태수(吳興太守) 였던 소영(蕭映)의 눈에 띄어 그를 섬기면서 그의 명령을 전하러 다니는 심부름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심부름꾼을 하면서 성실함과 능력을 소영에게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소영이 광주자사 겸 군단장으로 전임되자 그를 따라 광주로 내려갔습니다. 광주로 내려간 진패선은 그곳에서 중직병참군(中直兵參軍)이라는 자리에 올랐습니다. 중직병참군은 군단장의 측근 참모 겸 부대장에 해당하는 직책으로 그는 소영의 명령을 받아 1000명 정도의 병력을 그 대장이 되어 광주와 북베트남 지역에서 활약했습니다.

 

 

관청의 말단 관리로 시작했지만 나름대로 군사적인 능력은 출중했는지 그는 계속 군공을 세우며 나중에 이르러서는 서강독호 고요태수(西江督護 高要太守)를 역임했습니다. 진패선의 군사적인 성공이 뒷받침되면서 그의 광주 내에서의 입지도 단단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디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549년 원경중(元景仲)은 소영을 암살하고 광주 지역의 군단장 자리에 올랐습니다. 진패선은 즉각 원경중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원경중의 군대를 패퇴시키고 원경중을 자살케 만듭니다. 그리고 진패선은 새로이 소발(蕭勃)이라는 군단장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소발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였고 사실상 광주의 실권은 진패선이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당시 양(梁)은 「후경의 난」이라는 엄청난 혼란에 뒤덮인 상태였습니다. 사실상 양나라는 와해되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광주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도 어떠한 손도 쓸 수 없었습니다.

 

 

광주의 실권을 장악한 진패선은 광동의 북방 태유령(太庾嶺) 산맥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시흥(始興)의 혼란을 평정하고 동시에 그 지역의 토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곳에 흘러들어온 무뢰배들을 자신의 군대로 흡수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년 뒤인 550년 진패선이 후경을 토벌하기 위해 시흥을 출발했을 때 이들 시흥의 토호들과 무뢰배들은 진패선의 군대의 중핵을 이룹니다.

 

 

시흥 장악 이후 진패선은 550년 후경 토벌을 기치로 북진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진패선 군대의 북진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양나라의 와해로 지방에는 진패선이 이끄는 집단과 비슷한 성격의 여러 세력들이 성장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진패선은 거의 2년에 걸쳐 이들 세력을 타도하고 공강 연안의 남창(南昌)으로 내려가 파양호와 장강이 이어지는 구강(九江)으로 나왔습니다. 때마침 양나라의 남은 정규군 세력들 주에서도 가장 강력한 군단으로 이끌고 있던 강릉의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은 자신의 부장인 왕승변(王僧弁)을 지휘관으로 삼고 후경 토벌군을 구성해서 장강변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진패선은 재빨리 구강에서 왕승변의 군대와 동맹을 맺습니다. 동맹을 맺은 진패선과 왕승변의 군대는 522년 무호(蕪湖)에서 후경의 수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건강으로 진군하였습니다. 무호 전투 이후 후경은 건강을 버리고 동쪽으로 달아났습니다. 후경은 해안에 간신히 도착하여 소수의 추종자들과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북으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추격대에 사로잡혀 아내인 무제의 딸과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양나라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후경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강릉의 소역은 여러 장군들에게 추대되어 제위에 오릅니다(원제元帝). 원제는 건강이 황폐해진 것을 이유로 자신의 근거지인 강릉을 그대로 도읍으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주력 부대를 건강으로 보내고 제위에 오른 이 강릉의 황제는 554년 서위의 군대가 강릉을 습격하면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한편 건강을 탈환한 진패선은 한동안 왕승변의 보좌역의 입장에 머무릅니다. 비록 그 역시 건강 탈환의 주역이었지만 왕승변은 황제 직속하는 부장이었고 그가 이끄는 군단은 잔존한 양나라 군대 중에서도 최강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그 반면 무뢰배들과 토호들로 이루어진 진패선의 군대는 왕승변의 군대에 밀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왕승변과 진패선의 군대가 건강에 주둔하고 있을 때, 강릉이 서위에 의해 함락되고 이어 원제의 조카인 소찰이 서위와 손을 잡고 황제에 자리에 오릅니다(후량국後梁國). 서위는 이 후량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이용하여 남조를 압박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북제의 압력도 남조에 밀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진패선과 왕승변은 당황하지 않고 555년 원제의 아홉번째 아들인 진안왕(陳安王) 소방지(蕭方智)를 황제로 옹립합니다(경제敬帝입니다.). 그 때 북제의 압력이 진패선과 왕승변에게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북제는 군대의 힘을 빌어 양황실의 한 사람이 정양후(貞陽候) 소연명(蕭淵明)을 황제로 맞이하라는 압력을 넣습니다.

 

 

※ 소연명은 양무제의 조카로서, 처음 후경이 동위를 배신하고 양으로 내려왔을 때 무제가 후경을 지원하여 동위를 치기 위해 파견한 양나라의 북벌군 총사령관이었습니다. 하지만 북벌 실패로 동위에 붙들려 있다가 550년 동위가 멸망하고 북제가 들어서면서 북제에 잔류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승변은 북제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과연 북제는 소연명을 앞세워 양을 향해 군대를 보냅니다. 북제군의 맹공 앞에 왕승변 휘하의 군대는 격파당하고 북제군은 장강 북안 강변에 도달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왕승변은 북제에게 굴복하기로 하고 소연명을 황제로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는 소연명을 호위하여 장강을 넘어오는 군사들은 천 명으로 제한하고 이외의 북제군은 장강 북안에 머무르며 현 황제인 소방지는 소연명의 태자로 삼을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한편 건강 동쪽 경구에 주둔하고 있던 진패선은 왕승변의 이 조건에 반대하며 휘하 군대를 이끌고 건강으로 향해 야습을 감행하여 왕승변을 죽입니다. 일순간에 나라의 실권자가 왕승변에서 진패선으로 바뀌면서 외교노선도 다시 강경노선으로 전환됩니다. 그는 소연명을 폐위시키고 다시 소방지를 황제 옹립하고 그 아래에서 왕승변의 군대와 자신의 군대를 가릴 것 없이 전군을 통일하고 총지휘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전광석화처럼 진패선은 양의 실권자의 자리에 오르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진패선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왕승변과 관계 깊은 장군들이 속속 이탈하여 북제군과 연계하였고 태호의 남쪽과 장강의 상류 지역에서는 진패선 정권에 대해 반기를 드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진패선은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일당백의 활약을 보입니다. 진패선의 군대는 몇 번이나 쳐들어온 북제군을 격퇴하고 그리고 장강 하류 삼각주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합니다.

 

 

※ 북제의 고양(高梁)은 역양(歷陽)에 이루러 진을 정벌하지만 실패합니다. 그리고 고양의 진나라 정벌 실패 이후 진나라는 안정되기 시작합니다. 북제는 진패선(진무제)사후에도 왕승변의 부하이자 진의 가장 큰 대항세력의 맹주였던 왕림과 왕림이 양주(梁主)로 옹립한 소장(蕭莊)을 지원하여 건강을 침공합니다만 진패선 사후 진의 2대 황제에 오른 진패선의 형인 시흥왕(始興王) 진도담(陳道談)의 아들 진천(陳蒨 : 진문제)이 무호(蕪湖)에서 이를 격파하고 왕림은 간신히 북제로 도망갑니다.

 

진천은 진패선과 함께 진나라 건국에 큰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는 557년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진(陳)이라고 정합니다. 황제에 오른 이후에도 그는 사분오열된 나라의 통일을 위해 북주와 장강 중하류를 사이에 두고 계속 공방전을 펼쳤고 왕승변의 효장인 왕림을 비롯하여 주변의 토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온힘을 쏟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559년만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묘호는 고조(高助). 시호는 무제(武帝)였습니다.

 

 

※ 출처 :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위진남북조사(노관),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중국중세사,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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