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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빼앗긴 자들 - 05
게시물ID : readers_153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가마엘
추천 : 1
조회수 : 18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08 21:46:25

 

 

  

  “하아…….”

  왕자의 거세를 명하고 침소로 돌아온 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종의 부축을 받아 침대 가까이 다가간 왕은 시종이 건네주는 침소의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옷을 갈아입으며 입을 열었다.

  “짐이 천벌을 받을 짓을 하고야 말았도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가만히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왕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다가 와 시종에게 속닥거리는 듯했으나 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잠시 주저하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궁중 내의가 왕자님의 진료를 끝마쳤다 하옵니다.”

  왕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슬프면서도 기쁜, 알 수 없는 빛이었다.

  “그 녀석이…… 살아 있다는 것이냐.”

  “네, 폐하.”

  “그래…… 살아 있는 것이구나…….”

  형벌로서의 거세형은 지극히 잔인하고 파괴적이었다.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동시에 영원히 대가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거세형을 당한 사람치고 온전히 살다 간 사람이 드물며 대부분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거나 아니면 형을 끝마친 뒤 충격으로 죽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다행히 왕자는 아직 죽지는 않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이제 자식 낳을 수 없고, 왕위를 이을 수 없으며, 얼마 못 가서 결국은 죽게 될 운명인데…….

  “목이 마르는구나. 물 한잔 다오.”

  “네 폐하.”

  시종은 주전자와 컵이 놓여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동시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검은 안개가 소리 없이 자신의 몸을 휘감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물이 가득 담긴 잔이 쟁반에 받혀진 채 왕에게 대령 되었고 왕은 잔을 들었다. 목이 타서 그런지 평상시보다 훨씬 청량감이 느껴졌다. 그 맛이 좋아 왕은 물을 주욱 들이켰다.

  “물러가도 좋다. 짐은 조금 더 이따가…….”

  말을 이어가던 왕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두통이 몰려왔다. 아,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잔을 떨어뜨린 왕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다행히 심한 것은 아니었던 듯, 잠시 후 고통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는 의문이 대신했다. 떨어진 컵을 집어 든 존재가 시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시종은 온데간데없고 칼레인의 쌍둥이 형제만이 잔을 든 채 눈앞에 서 있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 왜 절 버리셨습니까.”

  왕의 눈동자에 말할 수 없는 절망감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그랬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남자의 음성에는 무미건조했으나,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자신을 버린 부모한테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을 리는 없을 테니.

  “…… 미안하구나.”

  “그 허황한 소문 때문입니까? 한 얼굴 쌍둥이가 태어나면, 가문이 몰락한다는?”

  “…….”

  “말씀해 주십시오. 그 대답을 듣기 위해 스무 해를 넘게 버텨온 저입니다. 보랏빛 출생으로서, 아키엔 왕국의 또 다른 정통 후계자로서, 저는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왕은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때 버렸던 아이가 이렇게 장성하여 되돌아올 줄은. 괴롭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겨진 다른 아이를 위해서, 결코 자신의 대에서 끝낼 수 없는 가문의 안위를 위해서 왕은 선택해야만 했다.

  하나를 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왕비의 해산을 참관했던 대주교와 귀족들은 모두 그 불길한 소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아이가 동시에 태어난 것을 보는 순간 사색이 되어 버렸다. 왕비가 온전히 살아 있었다면 하나를 버리는 것이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둘이나 낳은 고통 때문인지 출산 직후 과다출혈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망연자실해하는 왕에게 대주교와 귀족들은 한 얼굴 쌍둥이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에 서둘러 한 명을 버려야만 한다고 압박을 가해왔다.

  차라리 죽이자고 했으면 왕도 분노하며 강하게 반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게 하자는 것뿐 아니냐며 교묘히 회유하는 그들의 앞에서 안 그래도 심약한 왕이었던 나이시아 12세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가문을 위해서, 라는 대의명분 아래 행해졌고 믿을 수 있는 귀족의 수하가 늦게 태어난 아이 한 명을 빼돌려 평민이지만 부유한 집안에 재빨리 입양시킴으로써 모든 것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었음을 그렇게 버려진 아들을 만나고서야 왕은 알게 되었다.

  “아비는…… 가문을 지켜야 했다.”

  “그래서 저를 빈민가에 버리셨습니까? 손 하나 대지 않고 눈앞에서 사라지도록, 그렇게 죽어 나가도록 내버려두신 겁니까?”

  “그건 오해다, 오해야! 나는 분명 네가 부유한 자들의 손에서 크게 될 것이라…….”

  “들으셨기 때문에, 그 뒤에는 기억에서 잊고 확인조차 한번 안 하셨다는 말씀을 하시렵니까?”

  항변하던 왕은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자신이 이길 수 없는 대화였다. 무슨 이유에서든 간에 자신은 아들을 버린 아버지였다. 물론 아들 하나 보다는, 가문의 영속적인 안녕이 보다 더 중요한 일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국의 군주이자 가문의 수장으로서나 인정되는 명분일 뿐, 실질적이고 사사로운 관계에서는 모든 것은 다 핑계요 변명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있으니 칼레인 왕자를 버리시는 겁니까?”

  “…….”

  “칼레인 왕자는 거세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남자로서 아들에게 물려 준 남성이 파괴되었단 말입니다. 그것도 아버지의 손에 말이지요. 물론 저로서는 환영할 일일지도 모릅니다. 잃어버린 이십 년의 세월을 보상받듯, 이제는 제가 왕좌에 오르게 될 테니.”

  왕은 고개를 들어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아들이었다. 조금 전에 떨리듯이 뱉어낸 말과는 달리 아무런 표정도 아무런 원망도 담겨있지 않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왕은 힘없이 말했다.

  “…… 나를 구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느냐. 칼레인 왕자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왕위를 네게 유도하기 위해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칼레인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왕성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왕은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뭔가 잘못됐겠지, 중간에 무슨 오해가 있었든 게야,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랬기에 피하자는 신료들의 말도 무시한 채 왕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왕자의 깃발과 아르켄 공작의 깃발이 펄럭이며 왕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칼부림 소리와 수많은 이들의 단말마를 들으며, 왕은 이미 모든 것이 어긋나 버렸고 도망가기에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정 속에 뜬금없이 오래전에 버렸던 아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기적이었을까. 아니면 더할 나위 없는 저주였을까. 왕의 곁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그는 왕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을 살며시 입에 가져다 대더니 이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등 뒤로 길게 그림자가 늘어지더니 점차 넓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남자가 사라지고 이내 왕이 사라졌다. 그림자 속에 숨어버린 양, 그들의 모습은 감춰졌고 최후까지 왕의 곁에 머물며 그를 지키기로 한 수호기사들까지 모조리 모습을 감췄을 때, 왕자는 왕의 홀에 진입했다.

  ─ 아버지를 찾아라! 멀리 못 가셨을 것이다. 서둘러라!

  당연히 이곳에 왕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인지, 왕좌가 비어있자 왕자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궁을 점령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군세를 가진 일부 귀족들도 자신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양위의 형식으로 왕위를 넘겨받아야만 찬탈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그는 불필요한 싸움은 최대한 피하고 빠르게 이곳으로 왔던 것이다. 거사를 벌인 이상, 왕위에 오르는 시간이 늦춰질수록 그의 행동은 파렴치하고 천인공노하며 패륜으로서 낙인 찍히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궁을 완전히 포위하고 샅샅이 수색을 벌였건만 왕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입성할 때까지 아버지가 왕의 홀에 머물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건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이틀 내내 눈에 불을 켜고 찾았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자 왕자는 일단 소문이 더 크게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을 호위하고 왕궁에서 혹시라도 있을 무력 충돌을 막을 자들만 남긴 채 군사들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침실로 향했다. 빠르게 일을 치르느라 며칠 간 잠을 못 잤더니 피로가 누적되어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잠시만 눈을 붙인 뒤 다시 맑은 정신으로 일 처리를 해야겠다 여긴 왕자는, 눈을 뜨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힘을 주어 이리저리 돌려 보았으나 팔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이내 그는 알게 되었다. 자신의 몸이 포박당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존재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 네가 정녕…… 그런 짓을 벌인 게냐.

  그들의 호위를 받아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버지였다. 도대체 어떻게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서 자신을 결박했는지 알 수 없던 칼레인 왕자는 그대로 왕의 홀로 끌려갔다. 그리고 반역죄로 거세형을 받고 탑에 유폐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악마가 벌인 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상념에 빠져 있던 왕은 아들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당신이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버리셨을지언정, 아버지니까요.”

  왕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랬기에 아들이 무릎을 꿇고 그에게 눈높이를 맞췄다.

  “저는 병약합니다. 보이십니까. 썩어들어가고 있는 제 몸이.”

  “…….”

  “그랬기에, 서둘러 왔습니다. 아버지께, 다른 아들이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아직, 이렇게 살아 있다고.”

  “나, 나는…….”

  “죽기 전에, 아버지를 뵐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일말의 분노가 담겨 있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그는 왕에게 말했고 은은하게 웃고 있는,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버렸던 아들의 모습에, 자신이 그토록 비정한 아버지였음을 깨달은 왕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미안…… 미안하다…….”

  끝내 버티지 못한 눈동자가 부서져 내리며 이십 년이 넘는 회한의 세월이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렀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의 이마에 가만히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마치 이십 년의 세월을 공유하려는 듯 둘은 그러한 자세로 눈물 속에서 시간을 보냈고 한참이 지나 왕이 조금 진정된 듯하자 아들은 그를 부축하여 침대에 눕게 하였다.

  “주무시고 나면 다 끝나 있을 겁니다. 괴로움도 아픔도…….”

  왕은 이상하게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는 동안 제대로 쉬지 못했으니까. 너무 피곤해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이불을 덮어주며 잠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에게 희미한 미소로만 답할 수밖에 없었고 아들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럼,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리고 뒤돌아 몇 발짝 걸은 뒤 내뱉듯 말했다.

  “영원히.”

  순간, 왕은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강한 통증을 느꼈다. 조금 전 물을 마시고 나서 느꼈던 그것이었다. 그 물이……! 설마 독이라도 탄 것인가? 유난히 청량감이 느껴지던 것이 떠올랐으나…… 이미 움직일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몸도 목소리도 마음도 더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감각만은 자신의 것이어서 머리가 부서지며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생생하게 느꼈다.

  극심한 고통에 못 이겨, 그의 정신은 도피를 선택했다. 달리고 달려 마침내 의식의 끝에 당도한 그는, 그대로 뛰어올랐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어둠 속에 침식된 나락으로.

  끝없는 낭떠러지에서 추락하는 것을 느끼며 그의 마지막 숨은 멈추고 말았다.

 

 

  -──-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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