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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대신에 주위 사람이 불행에 빠지게 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 그런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을 보낸다면 당신은 무슨 생각이 들까.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고 평범한 학교를 거쳐 그럭저럭 괜찮은 직장에서 근무하던 중, 어떤 메일을 받게 되었다. [이 편지는 영국으로부터 전해져...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당신의 주위 사람이 화를 입게 됩니다. 소원을 빌지 않을 시, 당신이 화를 입게 됩니다.] 누가 봐도 스팸메일처럼 보이는 게 화면 위에서 두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당연히 바로 신고 버튼을 클릭하고 휴지통에 버렸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그날의 일과를 마치고 퇴근했다. 고된 몸을 이끌고 집까지 걸어가는 그 10분 정도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머리에 새똥을 맞았고 옆을 지나가던 자동차가 장마철의 물웅덩이를 세차게 밟은 덕분에 고맙게도 옷에 흙탕물이 다 튀어 버렸다.
“이런 개같은..”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투덜거리며 집에 들어와서 씻는데 문득 아까의 메일이 떠올랐다. 머리를 말리고 컴퓨터를 켜서 메일의 휴지통에서 그것을 복구해 천천히 읽어보았다. 다시 읽어보니 스팸치고는 꽤나 정성들여 써 놓은 게 눈에 보였다. 소원은 하루에 한가지씩 빌 수 있고 그 대가로 주위에 불행이 찾아온다. 간단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문구는 ‘이루어지기 힘든 소원일수록 더 큰 불행이 찾아오고 만약 소원을 빌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찾아오는 불행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내용’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노트북을 닫고 잠이나 자야겠다.
“재우야 어떻게 하냐. 너 이번 승진. 취소됐어. 준비 열심히 했는데..”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왜 이런 뭣 같은 일들만 일어나는 걸까. 회사 바깥에 있는 흡연실에서 담배를 두어대 피고 자리에 돌아오니 어제와 똑같은 메일이 하나 더 와있었다.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누가 자꾸 이런 장난 짓거리를 하는 건지. 대충 메일을 읽다 맨 아래 적혀있는 글귀에 시선이 갔다. [소원을 비는 방법: 매일 밤, 자기 전에 남쪽을 바라보며 절을 두 번 올리고 소원을 빌면 됩니다.] 내게 이런 시답잖은 메일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래도 단단히 심심한, 할 것 없는 백수인 모양이었다. 그러면 어디 한번 어울려 보자. 주위 사람이 불행에 빠진다고? 내 알빤가? 내가 먼저지 암. 그렇고말고. 어쩐지 두근거렸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건가? 아니. 어차피 장난일 게 뻔한데 양심의 가책은 무슨. 우선 처음 빌 소원은 이미 정했다. 옆 부서 이지영대리가 마음에 들어서 데이트 한 번 하는 게 소원이었기에 오늘 밤에는 그 소원을 빌 예정이다.
“재우씨. 어제 속상하셨죠? 이따 퇴근 후에 제가 술이라도 사드릴게요.”
다음 날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는 중, 지영씨가 내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대화는커녕 인사 한번 제대로 한 적 없는 그녀가 나랑 술을 마시자니.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돌연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설마 그 메일 덕분에? 에이. 아니겠지. 분명 지영씨도 나한테 마음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약속대로 지영씨는 퇴근 후에 나를 기다렸다. 우리는 같이 술을 마시고 쉬었다 가자는 그녀의 바람대로 꿈만 같은 하룻밤을 보냈다. 오늘은 주말이었기에 오랜만의 늦잠을 잔 뒤 눈을 뜨자 옆에서 곤히 자던 지영씨는 이미 나갔는지 온데간데없고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열두 통이나 찍혀 있었다.
“어 엄마. 무슨 일인데?”
수화기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는 소식에 그만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어젯밤에 구급차를 타고 급하게 응급실로 실려 갔는데 다행히도 목숨은 건졌다고 했다. 손이 벌벌 떨렸다. 그 메일은 장난이 아니었다. 진짜였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온종일을 그렇게 멍하게 보냈다. 그러다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오늘은 아무 소원을 빌지 않았다. 제발 무사히 넘어가기를..
[신재우씨 되시죠? 경찰입니다. 성폭행 혐의 때문에 서로 좀 오셔야겠는데요.]
아침 늦게 눈을 뜨자 이번에는 경찰에서 문자가 왔다. 이게 뭔 개소리냐고 소리를 질러대었다. 붉게 핏발이 그려진 눈동자를 신경질적으로 굴렸다. 성폭행이라니. 성폭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화가 잔뜩 난 상태로 경찰서로 가보니 심각한 분위기의 형사가 나를 노려보았다. 억울했다. 무슨 일이냐고 형사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내니 이지영씨 아시죠? 라고 되려 내게 물어왔다. 지영씨? 갑자기 지영씨는 왜. 순간, 지영씨와 함께 보냈던 밤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그건 서로 합의하고 한 건데..”
우물쭈물하며 형사에게 말하자 그는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추가로 말을 덧붙였다. 이지영씨 상습범이라고. 당신만 피해자가 아니라고. 그런데 증거가 없다고. 우선은 증거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보고 기억나는 게 있으면 전부 말해주라고 했다. 몇 가지 조사를 더 하고는 이제 가봐도 좋다는 형사의 말에 착잡한 마음을 가진 채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 어느덧 장맛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도 챙기지 않았는데. 운도 더럽게 없었다. 이것도 메일을 무시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건가? 하지만 소원을 빈다면 주위 사람이 다친다. 빌지 않으면 내가 다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 아빠는 괜찮아?”
“응. 많이 좋아지셨어. 곧 깨어나실 수 있다더라.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알았지?”
축축하게 젖은 몸을 이끌고 중환자실에는 들어가지 못해 병원 앞의 벤치에 앉아 엄마와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두려워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왜 하필 나한테 그딴 메일이 와서는.. 당장 오늘 밤도 소원을 빌어야 한다. 이왕 다치는 거면 돈이라도 왕창 달라고나 해 볼까. 그래. 차라리 돈이라도 많이 받아서 뭣 같은 회사 때려치워 버리자. 언제나 늘 그렇듯, 밤은 찾아오고 나는 소원을 빌었다.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이번엔 누가 다칠까. 다치는 거에서 끝나게 될까? 두려웠다. 내일이 오지 않길 바랐다. 그럼에도 해는 뜨고 또다시 아침이 왔다.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계좌를 확인해보았다. 계좌잔고는 언제나처럼 텅텅 비어있었다. 설마 그 메일이 효력이 다한 건가? 오히려 잘됐다. 너무 기뻤다. 아침부터 기쁨의 환호성을 댓 발 질러대었다. 그때 마침 핸드폰이 울렸고 나는 기쁜 마음에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재우야..”
아버지는 갑자기 뇌출혈로 자다가 숨을 거두셨다고 엄마가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럴 리가 없어. 울부짖었다. 어째서..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어째서 아버지가 죽어야 하냐고 주먹을 들어 머리를 사정없이 때리며 오열했다. 그렇게 한참을 때리던 중 또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모르는 번호였다. 장난 전화라면 가만 안 놔둔다는 마음과 함께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받아 채 한마디 하려는 찰나,
“보험사입니다. 신재우씨가 수령인으로 되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하..하..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거구나. 이런 거였구나.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메일은 약속대로 내게 돈을 주었다. 그 대가로 아버지가 죽었다. 오늘 밤 빌게 될 소원은 고통 없이 죽여달라는. 그 한마디가 전부일 것이다.
“재우야. 내가 미안하다.”
병실에 가만히 누워서 잠자고 있는 재우를 향해 누군가 입을 열었다. 위아래 좋은 옷을 쫙 빼입고 손목에는 명품 시계를 걸친 중년의 여자가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내가 소원만 안 빌었어도. 네가 사고가 날 일은 없었을 텐데.. 그래도 재우야.”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재우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이번에는 중년의 남자가 말을 이어 나갔다.
“네 덕분에 우리 인생이 폈다. 고맙다 아들아. 좋은 꿈 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