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고는 했다. 만약 내일이 오지 않는다면? 내일 당장 세상이 망한다면? 만약 먼 미래에는 주변 사람들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면?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할 거란 소리를 들으면 누군가는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편하게 죽을 수 있을 텐데. 또 매일 매일 그런 나날을 상상하며 버티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많아서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누군가에게까지 그 바람이 닿는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매일매일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노력을 하고 또 버림받기 싫어 몸부림치던 히키코모리인 내게 한순간의 꿈같은 일이 찾아왔다.
[뭣 같은 글만 싸지르고 있었네ㅋㅋㅋ X나 음침해. 왜 사냐? 나였으면 죽었다.]
[이럴 시간에 발 닦고 잠이나 쳐 자라. 한심해 죽겠네.]
친구 하나 없는 내게 인터넷 게시판은 친구이자 세상이었고 나의 전부였다. 그곳에서 비공개로 생각과 망상을 옮겨 담는 게 나의 하나뿐인 취미였다. 글과 그림을 끄적이는 시간만이 암울한 삶 속에서 유일한 행복이었다. 그래. 그랬는데. 돌연 계정이 해킹당해 내 모든 글과 그림이 전부 공개로 변경되었고 나는 무수히도 많은 익명의 사람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말았다. 참으로 재수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화가 나고 부끄러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분노를 표현할 용기도 억울함과 슬픔을 호소할 ‘누군가’도 없었으니까.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글이나 싸질러 보자. 그렇게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온갖 망상과 바람을 꺼내어 만든 훌륭한 역작을 밤이 새도록 써 올렸다. 게시글을 공개로 바꾸어 놓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읽을 테면 읽어 보고 욕하고 싶으면 욕해보라지.
“계십니까?”
단잠을 방해하는 드센 소리가 귓가에 세차게 울렸다. 이상했다. 집주인 씨는 매달 말일에 찾아오는데 집주인이 아니라면 누가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왔을까. 평소 누군가 찾아올 일이 전혀 없었기에 슬그머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허리에서 빠드득하는 불안한 소리가 들렸고 목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아마 밤새 글을 쓰고 지쳐 그대로 자서 그런 게 분명했다. 여차저차 해서 현관까지 걸어가 문의 자그마한 구멍으로 노크의 주인을 살펴봤다. 말끔한 정장을 빼입은 젊은 남자의 모습이 눈동자에 담겼다.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이재우 씨?”
깜짝 놀라서 뒷걸음쳤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이 남자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이상했다. 나는 좀처럼 밖에 나가지도 않았고 사람과 마지막으로 대화해본 것 또한 내 기억으로는 까마득히 오래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남자는 나를 알고 있는 거지? 이 사람은 누구지?
훈훈한 외모의 이 사내는 좀처럼 갈 생각하지 않는 듯 문 앞에 서서 계속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랴. 문을 계속 열어주지 않으면 저 남자도 결국엔 지쳐 돌아가겠지. 몸을 돌려 다시 컴퓨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내가 어제 그렇게 써 올린 게시글을 확인했다.
“어..?”
놀랍게도 어제 분명 올린 것도 확인했고, 0이었던 조회수가 1로 늘어난 것까지 확인한 이후에 잠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내 회심의 역작은 게시판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검색창에 내 필명을 검색해보았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내 이름으로 쓰인 수많은 게시글이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이 게시판에서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마우스를 움켜쥔 손이 덜덜 떨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재우 씨. 당신의 글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자그마한 선물을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시니 이건 문 앞에 두고 가겠습니다. 부디 유용하게 쓰시길 바랍니다.”
그때 문 너머에서 중저음의 맛깔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말을 듣고 무언가에 홀린 듯 또다시 현관문의 구멍으로 바깥을 살펴보았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남자는 마치 사라져버린 듯 자취를 감추었다. 깔끔하게 사라진 내 글을 어떻게 읽었다는 건지 빈약한 머리로는 이해가 안 갔다. 그러나 선물이라는 말에 나는 혹해서 조심스레 문을 반쯤 열었다. 주위를 살펴 혹시 누군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나 확인한 다음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문 앞에 놓인 자그마한 상자를 챙겼다.
[멸망 카운트. D-3]
상자를 열어보니 이런 문구가 제일 먼저 보였다. 그것을 들어서 뒤집어보니 네모난 유리 상자 안에 빨간 스위치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유리 상자는 돌려서 빼낼 수 있었고 스위치도 눌러보았으나 아무 변화 없었다. 어차피 시답잖은 장난질일 게 뻔했다. 요즘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이딴 장난에 누가 속겠나? 그렇지만 한가지 신경이 쓰이는 말이 있었다. 유용하게 쓰길 바란다. 그가 남긴 말이었다. 대체 이런 장난감을 어디에다 유용하게 쓰라는 말인가. 조금 더 그것을 살펴보았으나 곧 흥미를 잃어 방 한구석 어딘가에 홱 던져 놓았다.
[멸망 카운트. D-2]
별 시답잖은 짓들로 하루를 버리고 이어서 다음날이 되었다. 곰팡냄새가 코를 찌르는 어두컴컴한 방 한구석에서 경박한 소리가 이번에는 단잠을 방해하며 귀를 때리고 있었다.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나는 소리의 원인을 찾았다. 한 수 분 정도 뒤졌을까? 침대 아래에 덩그러니 놓인 어제의 그 장난감을 발견하자 두통이 몰려왔다. 다시 한번 확인해보자 카운트가 하나 줄어있었다. 유리 상자에는 스위치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게 보이지 않았다. 이틀 뒤에 스위치를 누르면 지구가 뭐 폭발하거나 그렇게 되는 걸까? 물론, 그런 망상을 안 해본 게 아니다. 가장 최근에 썼던 글도 세상이 갑자기 멸망하게 돼서 사람들이 다 죽어버리는 내용이었으니까.
“말도 안 돼..”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서인가 본 적이 있다. 인터넷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그 전지전능한 ‘신’이(게다가 여신이!) 불행한 주인공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던 망상.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망상의 영역이었다. 현실이 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다시금 그것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인터넷을 탐험했다. 그러나 조금 의문이 들기는 했다. 무슨 고장이라도 났는지 컴퓨터의 시계는 2일 전에 멈춰있고 다른 사이트로 넘어갈 수도 없었다. 정말 재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멸망 카운트. D-Day]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어제는 하루 종일 그 유리 상자를 붙잡고 씨름했다. 게시판에서 나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을 찾기도 하고 글을 써 올리기도 했다. 물론, 글은 올라가지 않았고 게시판은 먹통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의 유리 상자를 확인했다. 오늘은 드디어 D-Day다. 이 버튼을 누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어차피 잃을 게 없었다. 세상이 멸망한다 한들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아무것도 없는 나는 아쉬울 게 없었다.
“후우.. 어차피 장난일 텐데. 묘하게 긴장되네.”
끼릭.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을 돌려 빨간 스위치를 꺼냈다. 이 스위치를 누르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게 사실일까. 나야 잃을 게 없는 구더기 같은 인생이라 상관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행복할 텐데. 순간 입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갔다. 다른 사람들은 내 알 바 아니지 않나? 혼자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과 다른 평범한 사람들을 향한 질투가 마음속 죄책감이란 감정을 이겼고 나는 스위치에 손을 얹었다.
“개 같았다 세상아.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딸깍. 두 눈을 감고 스위치를 눌렀다. 고요했다. 아무 변화 없이 수십 초가 지났다. 뭔가 일어나야 할 게 일어나지 않자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아침이었는데 이상하게 어두컴컴한 방이 나를 맞이했다. 무언가 썩어가는 역겨운 냄새가 코끝을 건드렸다.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주위를 확인하고 깜짝 놀라 눈을 잔뜩 키웠다.
“이..이게 뭐야..”
컴퓨터 의자에 앉아 책상에 엎드린 채 이미 부패가 진행되는 듯한 시체를 볼 수 있었다. 내 세상은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