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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선) 전쟁통.
게시물ID : panic_1370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뉴런뉴런뉴런
추천 : 13
조회수 : 318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04/02 15:44:31
6.25 전쟁이 터지자
우리 가족은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고
다행히 큰 다리를 건너 무사히 친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나중에 듣자하니 그 다리는 인민군이 터뜨린 폭탄에 무너지고 말았다 한다.

장사에 재주가 있고, 셈계산에 능했던 우리 아버지는
젊었을 적 모아놓은 돈이 남들보다 곱절은 더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기에, 쌀과 김치 정도는 넉넉히 있었고
다행히 친가에서 밥 걱정은 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한 가지 근심스러운 건,
무엇엔가 충격을 받으신 우리 어머니였는데
그 까닭은 다름 아닌 조씨댁 아줌마 때문이였다.

조씨댁 아줌마는 나에게 감자를 쓱쓱 옷에 문질러
자주 건네주시던 친절한 아주머니였는데 우리가 피난길 오르던 그 새벽,
마을 어귀까지 내려온 인민군들에게 무참히 죽임당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과는 물론이요, 어머니와 특히 더 사이가 좋았던지라
어머니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던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인민군 기세가 하늘을 찌르듯 하자
정말 나라가 뒤엎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친가집에 흉흉한 분위기가 나돌았다.

밥 걱정을 않아도 목숨 걱정은 다들 해야 했기에, 나 역시 종종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겁에 질려있었다.


가뜩이나 겁에 질려있던 나에게 괴이한 일이 벌어지곤 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곳간 안에서 나는 부시럭대는 소리였다.


이부자리에 누워 잠들랑 치면, 곳간에서 작지도 않거니와 크지도 않는 소리가 부시럭부시럭 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따스한 어머니 품에 안겨 오금을 달래었다.

다음날, 쌀이 조금 준 것 같다는 할머니의 말씀을 애써 귀흘려 보낸지 며칠이 지났을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마침내 그 소리의 정체를 확인해보고자 하였다.

내 팔뚝보다도 더 큰 홍두깨를 들고 살금살금 곳간에 다가갔다.
부시럭대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나는 마침내 그 소리의 정체에 맞닿을 수 있었다.
동그랗고 말그란 눈동자. 달빛에 비친 뽀얀 얼굴. 바로 친가 근처에서 구걸을 하던 거지 소녀였다.

"여기서 무얼 하는 거니?"라고 물어보자, 배가 고파 그랬노라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제서야 저리던 오금도 풀리고, 나는 홍두깨를 툭 하고 내려놓고야 말았다.
쌀을 밥으로 만들 줄도 모른채, 허겁지겁 맨쌀을 입안에 우겨넣는 그 모습이 너무 가여웠다.
바가지에 쌀을 두 주먹이나 퍼주고 얼른 손짓하였다. 들키면 여간 골치아픈 것이 아니였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소녀는 다시 우리집 곳간에 찾아오지 않았다.
새벽녘을 울리는 곳간 속 부시럭 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까닭이였는지는 몰라도 도둑질을 들켜버렸으니 창피하고 또 미안했었을 것이다.

며칠이 흘렀을까.
이러한 일을 잊어버릴 때 쯤, 친가 맞은편에 있는 유씨 집에서 축 늘어진 시체가 들것에 실려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얼른 사랑방 문을 닫아 어머니를 못보게 하신 뒤, 유씨 아저씨에게 자초지종을 물으셨다.



유씨 아저씨의 말을 담 넘어 듣던 나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곳간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길래, 식량을 훔치는 인민군이겠거니 생각하고 개를 풀어 물게 하였는데
그것은 인민군이 아니고 웬 소녀였다는 것이다. 들것에 실려나가는 시체의 얼굴을 보니 과연 며칠 전의 그 소녀였다…


전쟁통에 극히 예민해진 유씨 아저씨에게 잘못이 있는지... 괜히 남의 집 곳간을 털던 소녀에게 잘못이 있는지...
아무래도 다들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였다. 다만 이 전쟁통이 얼마나 사람살이를 비참하게 하는지 모두들 곱씹어볼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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