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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빼앗긴 자들 - 07
게시물ID : readers_154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가마엘
추천 : 0
조회수 : 23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10 00:25:46

 

  

  

  ‘결국, 이 자리까지 왔구나.’

  봉신들이 자유롭게 연회를 즐기도록 그랜드 홀에서 잠시 빠져나온 칼레인, 나이시아 13세는 와인 잔을 들어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약간 쌉싸름하면서도 깊은 포도 향이 나는 것이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참 정신없는 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선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저 약간의 압력을 가하기 위한 연출로써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 어떻게 꼬이고 꼬여서 자신은 반역자가 되어 버리고 그 죄로 거세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날 돌아가셨고 덕분에 자신은 바로 풀려난 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새로운 왕좌의 주인이 된 것이었다. 자신이 겪어보지 않았다면 절대로 믿지 않을 일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건 모두 과거가 되어 버렸고, 이제 자신의 앞에 펼쳐진 것은 새로운 왕으로서 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릴지에 대한 것이었다.

  칼레인에게는 꿈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키워 왔던 꿈이었다.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며 최대한 충돌을 피해 온 나이시아 12세였기에 나라가 전쟁의 화마에 휩싸인다든가 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나 덕분에 상당량의 공물이 이웃 나라 어딘가에 바쳐져야만 했다. 특히 바로 우측에 위치한 변경백과 후작령의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또한, 제국의 사신이랍시고 온 자들에게 나이시아 12세는 자신이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한껏 자세를 낮춰야만 했다. 자기 하나만 고개를 숙이면 수많은 이들이 고통받지 않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것은 꽤 성공적이었지만 어린 칼레인의 가슴에 힘없는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못마땅함 그리고 약소국의 서러움과 같은 감정들이 자라나고 있음을 나이시아 12세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았을지언정,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았었다. 그 점이 칼레인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 희망을 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 언젠가는 영원히 미래의 언젠가 일 수밖에 없는 법. 그랬기에 그는 무술을 연마했고 늘 훈련을 했으며 병서들을 꾸준히 읽었다. 비록 그를 지도해줄 뛰어난 지도자가 없었기에 엄청난 실력 향상은 보이지 못했으나 적어도 이 왕국 내에서는 그가 다음 군왕의 재목이며 대왕의 칭호를 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랬기에 그는 이 작은 왕국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드넓은 대륙을 달리며 저 거대한 제국의 심장부를 탈취하고 싶었다. 시간이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라 자신의 대에서 이루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의 아들이, 그리고 그 아들이, 그리고 그 아들들이 이룰 수 있도록 자신은 밑바탕을 잘 닦아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어그러졌다는 것을 칼레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런 형벌을…….”

  상로렌 탑에서 만난 자신의 쌍둥이 형제이자 오래된 종교의 사제가 자신에게 뭔 짓을 했는지,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불꽃 같은 분노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약소국의 왕으로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온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마저도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고갈되어 버렸고, 지금은 솔직히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없었다. 다만 자신을 거세해 버린 것만큼은 못마땅하다 느낄 뿐이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은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은 그 녀석이 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셔 버렸고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유폐 생활을 하루도 안 돼서 끝내고 나올 수 있었다. 분명 탑에서 자신을 먹어 치우려는 듯 보이는 어두운 그림자를 봤건만 그렇게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인지 요 며칠 동안 도통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와인 잔을 다시 들어 주욱 들이키던 칼레인은 맛을 음미하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랬기에 몇 번 더 눈을 깜빡여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그 위화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밤하늘에 드문드문 빛나고 있던 별들이 보이지 않았다. 뿐만이 아니라 길고 가는 고리를 맵시 있게 드러내 보이던 그믐달조차도 자취를 감추었다. 구름에 가려지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어둠보다 더한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 나와라. 그렇게 숨어 있지 말고.”

  그 녀석이다. 칼레인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 녀석을 생각하자 때맞춰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안 그래도 물어볼 것들이 많이 있었는데 차라리 잘 됐다는 듯 칼레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나오너라.”

  어둠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앞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뜨려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천천히 길어지며 이내 자신의 발끝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듯이 펼쳐졌다.

  ─ 제게는 몸이 없습니다. 폐하께 흡수되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흠칫 놀란 칼레인은 그만 와인 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와장창 깨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와인 잔은 그림자 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었다.

  “어, 어디에 있는 것이냐?”

  ─ 폐하의 몸 안에 있습니다.

  “…… 나와 함께 산다는 말이, 이런 것이었느냐? 내 몸에 기생하면서?”

  ─ 기생이라니. 말씀이 지나치시는군요. 저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폐하께서 이 자리에 오르실 수 있었겠습니까?

  “…… 알았다. 기생이라 말한 것은 취소하마.”

  ─ 고맙습니다. 또한,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어머니 배 속에 같이 있었던 그 시절처럼.

  칼레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이 녀석은 그런 것을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 폐하께서도 기억하고 계십니다. 다만 그때의 기억을 불러오시질 못할 뿐. 아무튼,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옵고…… 이제 곧, 작은 아이 한 명이 입궁할 것입니다.

  ‘아이? 무슨 아이를 말하는 것이냐?’

  ─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너무 무책임하신 게 아닌가 싶군요.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말하라.’

  ─ 아버지 몰래 사창가에 가셨다가 품은 여인을 그새 잊으신 겁니까? 그렇게 여러 번 사랑해 주시고도?

  칼레인은 그제야 아,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그저 하룻밤의 유흥이었기에 별일이 있으랴 싶었다. 그녀는 젊고 예뻤으며, 매춘을 하면서 춤도 추는 무희이기도 했다. 여자를 품어본 적이 없던 칼레인을 맞이하여 그가 이제껏 느껴본 적이 없는 절대의 쾌락을 맛볼 수 있게 세심한 배려도 할 줄 아는 여자였다. 덕분에 칼레인은 그저 잠깐 구경만 하고 온다는 것이 밤새 내내 그녀의 위에 올라탄 채 내려올 줄 몰랐다. 여러 번의 절정 끝에 이제는 그만하고 내려올 때도 됐건만, 칼레인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잠시 원기를 회복할 시간을 가졌을 뿐,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끝없이 그녀를 탐하며 사랑을 나눴다. 거의 아침이 다 되어서야 다른 창녀들과 놀다가 온 수행원들이 이제는 그만 가셔야 한다고,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사달이 벌어질 것이라 성화를 부렸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서 내려와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바쁜 생활들과 이웃 왕국 공주와의 혼담이 오가는 등의 많은 일들 때문에 그녀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 폐하께서 그렇게나 씨를 뿌려대셨는데 임신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겠지요.

  ‘…… 아들인가?’

  ─ 폐하의 유일한 자식이자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아이입니다. 아시겠지만 폐하는 이제 고자가 아닙니까?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녀석이다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어도 어떻게 때려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슬쩍 웃는 듯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 뭐, 폐하께서는 후사를 더 남기지 못하신다고는 해도…… 제가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는 한 얼굴 쌍둥이이고.

  ‘무슨 뜻이냐.’

  ─ 글쎄요. 비밀이 조금은 있어야 삶이 즐거운 법이겠지요. 아무튼, 그 아이가 입궁할 것이니 봉신들과 관료들에게는 폐하의 아들이며, 후계자라 공표하십시오. 언젠가 불거질 후사 문제를 일찍 매듭짓는 것이 좋을 겁니다.

  ‘내게 명령하는 것이냐?’

  ─ 그렇게 들으신다니 유감이군요. 그렇게 하기 싫으시다면, 그냥 영원히 무자식으로 늙어 죽으시든지요.

  주먹이 부르르 떨렸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칼레인은 이를 꽉 깨물며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고함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끓어 오르는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침묵을 유지하다가 할 수 있는 한 정중하고도 위엄있게 생각을 가다듬었다.

  ‘내 몸에 기거하는 것은 상관없다. 네 덕분에 내가 왕좌에 오를 수 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 하지만 네가 나의 형제이든 뭐든 간에, 나는 너의 왕이기도 하다. 지나친 언사는 삼가줬으면 좋겠는데.’

  ─ 망극합니다. 오랜만에 형제를 만나니 형에게 어리광부리고 싶은 동생의 마음에 들떠서 그랬나이다.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형이라고?’

  ─ 아무래도 먼저 태어난 자식보다 뒤에 태어난 자식이 버려질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한 얼굴 쌍둥이가 태어나게 되면 가문이 멸망한다는 그 소문 때문이었다. 칼레인이야 알 도리가 없지만 어쨌든 나이시아 12세는 아들 중 한 명을 버렸고 그렇다면, 처음으로 태어나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았던 첫째 보다는 두 번째로 태어나 모두에게 경악을 선사한 아이가 버려질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일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칼레인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왠지 이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같은 보랏빛 출생임에도 누구는 왕이 되고, 누구는 버려지고…….

  ‘허면, 이제 나를 형이라고 불러도 좋다.’

  ─ 망극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 그날이 다가오면 그리 부르겠습니다. 먼저 윤허해 주신 것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런 궁중 용어들은 다 어디서 배운 것이냐?’

  ─ 제국의 황실에 잠시 기거할 때 배웠습니다.

  ‘제국? 라티움 제국을 말하는 것이냐?’

  ─ 그러하옵니다.

  칼레인의 눈썹이 치켜 올려졌다. 이 녀석이 거기에 있었다고?

  하지만 대화를 더 진행해 나갈 수 없었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칼레인의 동생은 부탁한다는 흐릿한 목소리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말았다.

  “폐하, 가르멜 백작이 들었사옵니다.”

  의전관의 알림과 함께 안으로 들어선 가르멜 백작은 칼레인을 향해 깊이 예를 표했다. 칼레인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고 그것을 어서 진행하라는 의사로 알아들은 백작은 가만히 뒤를 향해 손짓했다.

  “일단은 분부대로 하긴 했습니다만…….”

  분부라니. 나는 분부 자체를 내린 적이 없건만…… 아무래도 동생 놈이 뭔가 자신인 척하고 시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제 와서 내가 뭘 시켰느냐고 물었다가는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었으므로 칼레인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가르멜 백작의 뒤편에 모습을 드러낸 어린아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제 서너 살쯤 되었을까 싶은 작은 아이였다. 남루한 옷차림이 그의 신분을 말해주듯 몸에서는 좋지 않은 냄새가 피어올랐다. 얼굴도 해쓱하고 지저분한 상태였다. 그러나 눈만은 모든 것을 꿰뚫을 듯이 빛나고 있었다.

  칼레인은 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아이는 전혀 긴장하지도 않은 채, 거부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칼레인의 품에 안겼다. 뭐라고 칼레인의 귓속에 소곤거렸으나 너무 작았기에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에도 가르멜 백작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들, 지금 홀에 있습니까.”

  몸을 일으키며 칼레인이 묻자 잠시 멍하게 있던 가르멜 백작은 황급히 자세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네, 폐하. 모두들 아직까지 홀에 모여 연회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공표할 중요한 사항이 있다 전하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대기하고 있으라 전해주세요. 조만간 준비하고 가겠습니다.”

  느닷없이 공표할 것이 있다 말하는 칼레인에게 가르멜 백작은 조금이라도 좋으니 뭔가 알려달라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해 온 그였으니 응당 그 정도쯤은 알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칼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폐, 폐하…… 그렇다면 이 아이는…….”

  칼레인은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눈은 자신을 닮아 푸르게 빛나고 있었으나 왼쪽 눈에는 연한 비췻빛이 은은하게 담겨 있었다. 기억에서 지워버린 그녀의 눈동자 색이 이랬던가. 탑에서 본 동생의 눈도 이렇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으나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는 팔을 뻗어 아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짐의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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