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문학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쓰라린 마음을 감싸안고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서술하면... 제가 기르던 개가 죽었습니다.
이 엄연히 실재하는 슬픔, 이 상실감, 이 크나큰 단절과 공허함 앞에선
" 슬픔이란 그저 뇌에서 나오는 신경전달물질에 의한 물리적, 생화학적 반응에 불과하며, 그 반응은 오랜 진화의 결과, 그런 생화학적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는 개체들과 그 유전자들이 모종의 환경적 이유로 인해 도태됨을 거듭함으로써 현재의 '나'라는 한 인간 개체가 보유하게 된 메커니즘에 불과하다"
라는 저의 지식? 또는 관념은 그저 (기성 종교나 샤머니즘 같은) 애달픈 정신승리?만도 못하게 효용성이 떨어지더군요.
죽음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모든 생명체에게 필연적인 결과이기에, (오늘이냐 내일이냐, 또는 그 이후가 되느냐의 문제일 뿐) 결국에는 받아들이고 그 녀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적응하고 또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지리멸렬하게 근근히 살아는 가겠지만,
좀더 빨리 병원에 데려가거나 좀더 적절한 조치를 취했더라면~평소에 좀더 건강을 챙겨줬더라면~ 이라는 흔한 미련?이 발목을 잡습니다. 솔직히...그런 생각들 때문에 괴로워 미치겠습니다. 자책이라는 건 얼마나 미련하면서도 만만한 도피 수법인지요.
확실히 우리의 뇌는... 과거의 사건에 집착하고 반추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버릇이나 습관을 타고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말씀하셨던, 마음과 생각은 시간 그 자체다. 따라서 생각하는 마음은 이미 낡은 것이다. 라는 말의 의미가 이런 뜻이 아니었을까 하네요. 우리의 뇌는 기억하고 돌아보며 곱씹고 아파하고 후회하면서 자신이 존재함을 스스로 인식하는 정교한 장치?인 듯 합니다.
물론, 지금 슬픔과 상실감으로 가득찬 제 가슴에겐 전혀 위로가 안됩니다.
제 냉소와 유물론적이고 과학 지상주의적?인 건조한 생각들이 차라리 틀렸기를 바랍니다.
정말 이 우주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천상계? 같은 곳, 더 이상 슬픔도 아픔도 상실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곳에서 죽은 녀석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좋겠습니다. 또는 그 녀석이 실제로 죽은 게 아니라 언젠가는 사람이나 또 다른 동물로 환생해서 다음 생에서 또 환생한 저와 만날 수 있었으면 바라기도 합니다.
속아서 살다, 바보인 상태로 죽고 싶은가 봅니다.
말장난으로 만들어진 의미의 세계에서 살아가는지라 달리 대체 수단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갖고 놀아야 하는 게 우리의 운명이라 이런 넋두리를 끄적거릴 수 밖에 없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