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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빼앗긴 자들 - 10
게시물ID : readers_154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가마엘
추천 : 0
조회수 : 25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11 21:10:25

 

 

  

  “그나저나, 올 때가 됐는데.”

  “무엇이 말입니까?”

  그때였다.

  “폐하, 이사키엘 대주교가 알현을 청하옵니다.”

  의전관의 말에 칼레인은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가르멜 백작은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서는 대주교를 향해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며 칼레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가 올 것을 기다리고 있던 그였기에 만면에 웃어 보이는 여유까지 부리며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대주교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폐하, 너무나 참담한 소문을 들어 이런 무례를 범할 수밖에 없음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들은 소문이 사실입니까?”

  질문하며 대주교는 슬쩍 눈을 내려 칼레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 한쪽에 은은한 비췻빛이 어려 있는 작은 아이였다. 칼레인의 얼굴을 쏙 빼닮은, 누가 뭐래도 칼레인의 아들이 분명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가 이교도의 사제라는 말을 들은 대주교의 눈에는 작은 아이가 아닌 속이 시커먼 악마로 보일 뿐이었다. 그것도 양의 탈을 쓴 채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는.

  “혹시 그 소문이 짐이 말한 그걸 말하는 거라면, 아마도 맞을 겁니다.”

  “폐하!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대관식 때 폐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아타나시우스의 신실한 수호자가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신에 대한 부족한 신앙이 부끄럽다며 참회의 눈물까지 흘리지 않으셨습니까?”

  가르멜 백작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대주교의 말에 과연 칼레인이 무슨 답을 할지 기대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그의 답변은 가관이었다.

  “그야…… 대관식 때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형식이었고, 또 그것을 거부하면 대주교께서 대관을 거부할 테니 그랬던 게 아니겠습니까?”

  “뭐, 뭐라고요?”

  “짐의 비루한 신실함은 그대가 더 잘 알 게 아닙니까. 적당히 분위기에 맞춰가며 정해진 양식대로 진행했을 뿐인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짐은 그 맹세를 가지고 따지는 그대가 더 이해가 안 됩니다만.”

  변명하기는커녕 너무나 능청스럽고도 당당하게 말하는 칼레인에게 대주교는 어이가 없어서 제대로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단숨에 달려오면서 칼레인이 어떤 말들을 해대든지 간에 그것들을 모조리 반박한 뒤, 참회한다면 어떤 보속까지 내려줘야겠다고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싹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또한, 뭐가 문제입니까? 짐은 개종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오래된 종교의 가르침을 배우라고 했을 뿐 개종을 하든 말든 그것은 각자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하나의 이론, 철학, 학문으로 받아들여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굳이 그렇게 자신의 목을 걸면서까지 따질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폐, 폐하……!”

  “이만 짐도 쉬어야겠습니다. 그러니 물러가세요. 조만간 오래된 종교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보내드릴 터이니 빠짐없이 읽어 보시는 것은 잊지 마시고요.”

  “폐하!”

  결국, 참지 못하고 대주교가 폭발하자 지금까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대꾸를 하던 칼레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폐하, 정녕 아타나시우스의 품에서 벗어나실 겁니까? 이대로 벗어나신다면,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키엔 왕국의 신앙을 수호하는 대주교로서, 마지막 권고를 드립니다. 제 손으로 폐하를, 그분의 품에서 쫓아내게 하지 마십시오.”

  “대주교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가르멜 백작께선 나서지 마세요! 이건 군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하는 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게 아닌데. 가르멜 백작은 자신이 나서서 저 흥분한 대주교를 말리고 그로 인해 그의 목숨을 연명해 주려고 했으나, 이미 틀린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칼레인이 심상치 않은 오오라를 뿜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허면 짐도 그대에게 그에 합당한 대답을 내려야겠군요. 돌아가세요. 보름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대가 모아 놓은 재물들을 가질 수 있을 만큼 가지고 짐의 눈이 보지 못하고 짐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십시오. 앞으로 보름 후, 대주교령을 회수하고 대성당과 수도원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겠습니다.”

  “폐하!”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칼레인의 눈에서 불꽃이 뿜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 기세에 대주교도 흠칫, 했으나 이내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대주교는 오냐, 네놈이 그렇게 나오면 내가 못할 줄 알고? 하는 표정을 지으며 홱 돌아섰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문을 향해 나아가다가 고개를 돌려 칼레인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옆에서 자신을 향해 빙긋 웃으며 손짓을 하는 작은 악마를 보았다.

  ‘악마가 분명해. 저 악마가 국왕을 조종하는 게 틀림없어. 어떻게든…… 저 악마를 없애야만 해!’

  문을 쾅 닫고 나가려는 것을 의전관이 굳은 의지로 막아내는 것을 감상한 뒤 칼레인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언제 무서운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이 칼리스토를 끌어안았다. 가르멜 백작은 아무리 내가 모시는 분이지만 저 두 얼굴의 모습은 참으로 적응이 안 된다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괜찮겠습니까?”

  “뭐가 말입니까?”

  “파문되셔도…… 상관없으시겠습니까?”

  “짐 보다는 경이 문제가 아닙니까? 경의 아타나시우스에 대한 신실함이 상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대가, 파문된 왕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또 내 충성심을 시험하는군. 가르멜 백작은 정색한 뒤 한쪽 무릎을 꿇으며 칼레인을 바라보았다.

  “누차 말씀드리건대, 제 충성심의 첫 번째 대상은 다름 아닌 폐하이십니다. 부디 신을 의심하는 말씀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압니다. 아니까 그냥 그렇게 말해 본 겁니다. 자자, 어서 일어나세요.”

  칼레인은 미안하다는 듯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손짓했고 무릎을 탁탁 털며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가르멜 백작은 혼잣말하는 것과 같은 표정으로 다 들리게 중얼거렸다.

  “뭐, 물론 아타나시우스님의 품 안에 계신다면 금상첨화지만요.”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겁니다.”

  “네?”

  다 들리게 말해 놓고는 칼레인이 대답할 줄 몰랐다는 듯 가르멜 백작은 토끼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칼레인은 칼리스토의 머리 위에 턱을 올려놓은 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제국은 내전 중입니다. 총대주교는 내란에 휘말려 있고 게다가 콘스탄틴 왕의 포로 신세가 되어 버렸지요. 대주교가 그에게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을 것이며, 혹여 연락하여 내게 파문을 날리고 이교도의 정화를 위한 성전을 일으키려고 해도 그만한 병력을 동원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그 사이 내부 정리는 끝날 것이고 이곳엔 새로운 대주교가 들어설 겁니다. 파문은 그를 통해서 풀면 됩니다.”

  “그런…… 장난 같은…….”

  “문제는 그들보다, 세오덴 후작과 나르셀 변경백입니다.”

  갑자기 화제를 확 바꾸는 칼레인의 말에 가르멜 백작은 살짝 난감해하는 듯했으나, 이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대대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여 아키엔 왕국을 마치 자신들의 속국처럼 대하던 자들이었다. 칼레인의 아버지인 나이시아 12세는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먹으면 온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그 둘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게다가 그들은 제국의 봉신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제국 전체를 상대해야 하는 법.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제국이 내란에 휩싸인 지금이라면…….

  “허면…….”

  “네. 일단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합니다. 칼리스토의 후계자 지목에 대해 반대하는 내부의 적들과 파문된 왕을 갈아치우려는 무리가 들고일어났을 때 그들이 개입한다면 골치가 아파질 겁니다. 대단히 싫은 일이기는 하지만, 당분간은 그들의 입맛에 맞춰 줄 필요가 있겠지요.”

  가르멜 백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레인이 그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에게 고개 숙인 아버지를 바라봐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분노의 감정만 가지고 그들을 대할 수 없었다. 먼저 내부의 적들을 솎아내고 평정한 뒤여야만 나라 바깥으로 칼을 겨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비록 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상대라 하더라도 웃으며 대해야 하는 법이었다. 이제 그는 왕자가 아닌 일국의 군주이며, 군주로서 해야 하는 정치란 그런 것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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