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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유유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54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4
조회수 : 107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04/22 16:13:15

유유는 363년 봄, 북부군단의 소재지인 경구(京口)에서 태어났습니다. 유유의 아버지 유교(劉翹)는 관청의 하급 서기관이었습니다만 그 일가는 너무나도 가난해서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집안에서 유유는 태어났는데 유유의 어머니는 유유를 나은 후, 난산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공복으로 우는 자식을 보고 있었지만 유모를 쓸 돈조차 없었던 유유의 아버지는 몇 번씩이나 유유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침 막 두번째 아이를 낳은 의붓누이가 이를 알게되고 아기였던 유유에게 젖을 물려 주었습니다. 가난 속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죽을 뻔했던 이 아기가 훗날 남조 최초의 군사정권인 송(宋) 왕조를 세우는 황제가 될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목숨을 구한 유유는 점차 자라면서 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논을 경작하고 그리고 짚신행상을 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난한 일상을 바꾸어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나이 20살인 383년 사석(謝石)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사현(謝玄)을 선봉 군단장으로 하고 유뢰지 등이 활약한 동진(東晉)군대가 비수에서 전진군을 무찌른 것이었습니다. 유유는 그런 소식들을 들으면서 이 비수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북부군단에 들어가 무인(武人)으로서 살아갈 길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유유는 무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동진 최고의 정예부대인 북부군단의 군단병이 되었지만 16년간 유유는 그닥 명성을 떨칠만한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399년 발발한 손은의 난은 유유의 명성을 떨치게 만든 첫번째 기회가 되었습니다. 일개 부대를 이끌었던 유유는 종횡무진하며 손은의 반란군을 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대는 난폭한 자들이 매우 많은 북부군단의 부대 중에서도 가장 군율이 정연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반란 진압을 통해 유유는 장군의 직함을 갖게 되어 북부군단 중에서 가장 유력한 부장(副將)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16년만에 북부군단의 부장의 자리에 오른 유유에게 기회라면 기회였고 위기라면 위기라도 부를 수 있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환온(桓溫) 사후 서부군단장이 된 환현(桓玄)이 서부군단을 이끌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권력자였던 사마원현(司馬元顯)은 환현의 서부군을 막기 위해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이 되어 군사를 진두지휘했습니다만 북부군단을 이끌고 있던 유뢰지가 건강 부근에 당도한 환현에게 항복하여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유뢰지는 자신의 부대인 북부군단의 힘을 믿고 있었고 환현이라고 해도 북부군단을 이끌고 있는 자신을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이었습니다. 부장이었던 유유는 이러한 유뢰지의 행동을 말리며 환현 타도가 선결과제라고 충고했지만 유뢰지는 듣지 않았습니다.

 

 

환현은 건강에 입성하여 사마원현 부자와 그 일당을 죽이고 스스로 승상이 되어 내외의 병권을 장악하였고 자신의 일족들과 심복들을 지방의 요지에 배치하고 마지막으로 유뢰지를 회계태수로 임명하여 유뢰지와 북부군단을 서로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뒤늦게 환현의 속셈을 안 유뢰지는 환현에 대한 반기를 듣고 거병하려고 했지만 그를 따르던 세력이 없어 실패하고 그는 장강 강변에서 외롭게 죽었습니다. 환현은 유뢰지 제거를 시작으로 북부군단의 장수급들을 무차별로 제거했습니다. 이렇게 위험요소를 제거한 환현은 승상에서 스스로 상국(相國)이 되었고 급기야 403년 12월 안제(安帝)에게 선양의 형식을 취하여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초(楚)라고 합니다. 그리고 환현은 안제를 심양(현재의 강서성 구강)으로 쫓아냅니다.

 

 

한편 중간 장교급이라 유유는 환현의 북부군단 숙청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뢰지 사후 북부군단장이 된 환수(桓修)의 참군(參軍)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유는 이렇게 환현에 충성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유유는 유뢰지의 옛 부하들인 유의(劉毅), 하무기(何無忌) 이하 27명의 한문(寒門) 출신의 좌관(佐官) 계층 무장들과 한문(寒門) 출신 서기관들을 규합해서 쿠데타를 결행했습니다. 유유가 이끄는 쿠데타군은 경구와 광릉 나아가 수도인 건강과 역양에서 거병하여 환수를 베어 죽이고 수도 건강에 진입하여 환현을 내쫓고 건강을 장악했습니다. 환현은 건강을 장악한지 3개월만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유유는 환현을 계속 추격해서 강릉에서 환현을 비롯한 환씨 일족을 죽이고 폐위되었던 안제를 다시 복위시켰습니다. 이 때가 405년이었습니다. 환현을 주살한 유유는 형주를 동생인 유도규(劉道規)에게 잠시 맡겼다가 쿠데타 공모자이자 오른팔인 유의를 도독(都督)*형(荊)*영(寧)*진(秦)*옹(雍) 4주제군사(四州諸軍事)*위장군(衛將軍)*형주자사에 임명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동진은 환현의 쿠데타 이후 힘을 잃어버린 귀족들 대신 쿠데타를 계획하고 진두지휘한 유유를 중심으로 굴러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유유가 국정을 총괄하려면 비록 힘은 잃었어도 귀족들의 도움은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유유는 환현과 인척관계 있었다는 이유로 태원 왕씨들을 주멸하고 그리고 그가 가난해서 궁핍했을 때 돈을 주었던 낭야 왕씨는 극진히 우대하는 등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쓰면서 귀족들을 자신의 발 밑에 둡니다. 특히 그가 낭야 왕씨를 우대했던 것은 왕도와 왕돈 등을 시작으로 하는 낭야 왕씨는 수많은 동진 귀족가문들 중에서 일급에 속하는 것이기에 낭야 왕씨가 유유에게 협력의 의사를 밝히며 나머지 귀족들은 자연히 자신에게 머리를 숙일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이후 귀족들은 유유의 기세를 살피며 그의 뜻에 영합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대충 급한 일을 정리한 유유는 환온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북벌을 감행합니다. 그의 첫번째 목표가 된 것은 모용초(慕容超)가 다스리고 있던 남연(南燕)이었습니다. 유유는 조정의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남연 정벌을 감행했습니다. 북부군단을 필두로 유유의 남연 정벌군은 회수(淮水)로부터 지류를 거슬러 북상하여 태산산맥을 통과했습니다. 남연의 수도인 광고는 이 태산산맥의 북측 평야에 있었습니다. 모용초는 수도인 광고에 전력을 집중하여 방비태세를 엄중히 갖추고 동진군을 기다렸습니다. 이후 광고성을 사이로 동진군과 남연군 사이에 지루한 공성전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문제는 농성을 하는 남연군의 물자가 떨어지느냐 아니면 공격측인 동진군의 물자가 다 떨어지느냐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유유는 이미 이러한 계산을 다 한 상태였습니다. 유유는 남연군을 확실하게 광고성에 몰아넣고 남연이 가을수확을 하지 못하게 하여 남연군을 기근에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나 409년 2월 광고성 안은 식량이 부족하여 병에 걸리거나 굶주리는 자들이 속출하고 동진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여 광고성은 함락되고 남연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모용초는 건강으로 송환되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유유의 남연 정벌에 동진 사람들은 환호했습니다. 환온의 세번째 북벌이 실패한 이후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북벌의 승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유는 정복지인 남연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바로 손은의 잔당들이 노순을 앞세워 호남과 강서 두 길로 나눠 진군하여 동진군을 격파하고 건강으로 진군하고 있었다는 급보가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유유는 광주 지방에서 광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노순을 광주자사로 임명하여 비위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만약 강력한 수군을 지니고 있는 그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동진의 남해무역은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유유가 없는 틈을 타서 건강을 향해 진격한 것이었습니다. 유유가 급히 수도로 되돌아보니 노순의 군대는 건강 부근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었습니다. 그 수효는 10여 만명에 이르렀습니다. 유유는 서둘러 건강성 밖 가까운 선착장에 요새를 쌓아올려 상륙하려는 노순의 군대를 저지하였습니다. 노순의 군대는 장강 상류의 여러 요소를 점령한 후 건강을 경제적으로 봉쇄하고 물질적으로 궁핍하게 할 전략을 세우고 건강 공격을 일단 멈추고 되돌아갔습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유유는 이번 반란 평정에는 육군이 아닌 수군전력의 증강에 있다 판단하고 급히 전선(戰船)들을 건조하고 선원들을 모아 해로를 우회 남하하여 적의 근거지인 광주를 직접 공격한다는 전술을 세웠습니다. 일부에서 반대가 있었지만 유유는 남연 정벌 때와 같이 강인하게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였습니다. 동진의 수군은 광주를 직접 공격하였고 이를 예상치 못한 노순의 수비군은 전멸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수군이 근거지를 제압했다는 소식을 들은 유유는 직접 수군과 기병들을 거느리고 장강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여 노순의 본군과 결전을 벌였습니다. 유유는 바람이 없을 때는 노순군이 자랑하는 수군도 그리 힘을 쓰지 못한 다는 것을 알고 육상에서 화공(火攻)을 펼쳤습니다. 백전노장인 유유와 마찬가지로 동진 최고의 정예부대인 북부군단과의 전면 대결에서 노순의 군대는 패배하고 노순은 교주(交州)까지 도망쳤지만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동진군에게 토벌당해 완패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노순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유유는 그들이 개척한 해상교통로를 정부가 직접 장악케 했습니다. 이 때가 411년이었습니다.

 

 

바깥으로는 남연을 정벌하고 안으로는 노순의 난을 진압하면서 유유의 무공(武公)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그런 유유에게도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함께 환현 쿠데타를 주모한 그의 오른팔과 같은 동지이자 형주의 도독이었던 유의였습니다. 약간의 학문적 교양을 갖추고 있던 유의는 귀족사회에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렇기에 유의가 있던 형주는 반(反) 유유 일파의 근원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1]. 유유에게는 이런 불손세력은 당연히 없앨 필요가 있었습니다. 421년 유유는 자신의 심복인 왕진악(王鎭惡)을 시켜 형주를 급습하고 유의와 그 당파를 몰살시키고 유의가 죽음으로써 공석이된 형주도독 자리에 동진황족의 일족은 사마휴지(司馬休之)를 임명했습니다. 사마휴지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동진 황족들 중에서도 그나마 나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유는 건강에 머물러 있던 사마휴지의 아들인 사마문사(司馬文思)의 흉폭함을 비난하며 그의 직함을 박탈하고 형주로 보내 사마휴지보고 처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유유는 사마휴지가 아들을 죽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유유의 예상대로 사마휴지는 아들을 죽이지 못했습니다. 유유는 이에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형주를 공격했고, 패배한 사마휴지는 북으로 달아나 후진국 요흥에게 망명했습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형주를 공격에 함락시킨 유유는 도간 이후 환현에 이르기까지 구성된 서부군단의 토대를 완전히 쓸어버리고 자신과 자신을 지지하는 북부군단의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이렇게 유의와 사마휴지를 연달아 제거한 유유의 지위는 점차 안정되었습니다.

 

 

이렇게 반대파들 제거와 영토 확장, 반란 진압에 바쁜 유유였습니다만 이와중에도 그는 413년 토단(土斷)을 실시하였습니다. 이 토단의 실시로 정부재정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증가한 재정을 바탕으로 유유는 다음 북벌을 계획했습니다. 그의 다음 북벌 목표는 중원의 중심부인 낙양과 장안을 지배하고 있던 후진(後秦)이었습니다. 유유는 전군을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주력인 동로군(東路軍)는 유유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회수로부터 운하를 타고 황하를 통해 진군했고 그리고 이 삼군 외에 따로 수군을 편성하여 군수품 보급을 담당케 했습니다. 유유는 보급의 중요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말보다 수십 배나 많은 짐을 실고 나를 수 있는 배로써 군의 보급을 담당케 하였습니다.

 

 

왕진악[2]과 단도제(檀道濟)가 이끄는 중로군(中路軍)은 하남성을 북상하여 낙양을 공격하였고 심전자(沈田子)가 이끄는 서로군(西路軍)은 장안으로 진격했습니다. 왕진악이 이끄는 중로군은 낙양을 함락시키고 도망가는 적을 쫓아 장안의 관문인 동관(潼關)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유유의 중로군은 왕진악의 중로군과 합류하고 황하로부터 위수로 들어가는 지점에 수군을 상륙시켰습니다. 또 그 틈에 심전자가 이끄는 서로군이 적의 후방을 어지럽혔습니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인 동진군의 공격에 요홍을 항복하였고 유유는 417년 왕진악의 마중을 받으면서 장안에 입성했습니다. 317년 유총이 세운 한의 장군 유요의 공격에 의하여 장안이 함락되고 난지 꼭 100년만에 동진이 장안을 회복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유에게 항복한 요홍은 건강에 보내어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장안을 회복한 그는 동진 개국의 일등공신인 왕도의 손자이자 현재는 자신의 참모인 왕홍(王弘)을 수도 건강으로 보냈습니다. 건강에 도착한 왕홍은 조정의 귀족들을 움직여 유유에게 「구석(九錫)」[3]이라는 특권을 수여하는 조서를 내리도록 하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어짜피 황제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기에 구석의 특권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유유는 일부로 이 구석의 예우를 거절하고 동시에 내려진 상국(相國)과 송공(宋公)으로 봉하는 칙령도 거절해 버렸습니다. 유유는 동진황족 중 한 사람인 사마회지(司馬恢之)를 불러 서진시대의 능묘를 복원하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유유는 장안에 아들 유의진(劉義眞)을 머무르게 하고 유의진을 보좌하는 역으로 왕진악과 심전자를 임명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장안은 시골에 불과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는 장안보다는 건강이 일할 보람이 있는 무대였습니다. 유유가 철수한다는 소식에 주변의 부로(父老)들이 만류했지만 물론 그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도에서 보다 큰 일을 계획하고 있던 유유는 건강으로 철군했습니다.

 

 

유유가 건강으로 철군한 직후, 기회를 엿보고 있던 흉노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장안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유유가 철군했다 하더라도 군사경험이 부족한 유의진은 그렇다치더라도 왕진악이나 심전자는 모두 역전의 용사들이라 그들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혁련발발의 침공은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부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왕진악은 심전자에게 반란의 야심이 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고 이 심전자는 독단적으로 왕진악을 처형했다는 이유로 다시 왕수(王修)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왕수 역시 지나치게 방자하여 유의진의 명령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 역전의 용사들이 모두 없어진 마당에 제아무리 동진군이라도 혁련발발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어려웠습니다. 동진군은 패배하고 유의진은 동진으로 도망쳤습니다. 혁련발발은 장안에서 제위에 오라 국호를 하(夏)라고 하였습니다.

 

 

장안에서의 패배 소식을 듣고 있던 유유는 머리가 아파왔습니다. 이제 몇가지 일만 더하면 더할 나위없는 영광과 권위 속에서 당당하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패배로 인하여 그가 지난 수십년동안 쌓아왔던 명성이 진흙탕 속에 빠질 우려가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유유는 천자가 제의한 송공책봉, 상국임명, 구석하사를 일시에 수락하였습니다. 그리고 안제에게 압박하여 그를 목매달아 죽게 만들고 사마덕문(司馬德文)을 황제에 즉위케 했습니다. 그가 바로 동진 최후의 천자인 공제(恭帝: 385 - 421)였습니다. 그리고 유유는 공제의 딸을 자신의 장자인 유의부(劉義符)와 결혼시켰고 황실 일가 중에서 재능이 있거나 기골이 있는 자들을 차례로 죽였습니다. 이윽고 송왕(宋王)의 자리에 까지 오른 유유는 1년 뒤인 420년에 공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황제에 오릅니다[4]. 이렇게 동진은 공제를 마지막으로 13대 103년만에 멸망하고 유유를 시조로 하는 송(宋) 왕조가 탄생하였습니다. 황제에 오른 그는 연호를 영초(永初: 420년 - 422년)라 하고 자신의 아버지인 유교를 효목황제(孝穆皇帝)에 추숭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부군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이자 훗날 무제의 뒤를 이어 문제(文帝)가 되는 의도왕(宜都王) 유의륭(劉義隆)을 형주자사에 임명했습니다.

 


황제에 올라 사실상 이룰 것은 다 이룬 것처럼 보인 유유였지만 그에게도 걱정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황제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58세였습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는 아직 활발한 현역의 나이였지만 당시로썬 평균 수명도 짧았던 시기였고 게다가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그에게 있어서는 활발한 현역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은 장남으로써 태자에 오른 유의부가 15세에 불과했고 막내인 의계(義季)는 6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집안은 가난했기에 친척도 거의 없었고 대대로 봉직해온 신하조차 없었습니다. 지금 그에게 충성을 바친 자들은 모두 자신 1대에 길들여진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기에는 유유의 몸은 늙고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유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지 2년만인 422년에 유유는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유유는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서를 신하들과 태자에게 남겼습니다.

 

 

1. 경구(京口)는 군사상의 요지이고 또한 옛 수도인 건강에 가깝다. 고로 황제 내지 근친 이외의 자를 그 장관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

2. 형주(荊州)는 장강 중류지대의 요충지이다. 황자를 순차적으로 그 장관에 임명하라.

 

 

죽기 직전까지도 송의 앞날만 걱정한 유유였습니다. 유유는 사후 고조(高祖) 무황제(武皇帝)에 추존되었습니다. 참고로 유유가 남긴 이 유언은 송(宋)왕조 전반에 걸쳐 상당히 잘 지켜졌고 그 뒤를 이은 제(濟) 왕조에서도 대체적으로 잘 지켜졌다고 합니다.



[1] 유의는 유유에게 은근히 경쟁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 유유가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기 전까지 두사람은 종종 도박으로 실력을 다툴 정도로 친했는데 정(丁)이 나올지 반(半)이 나올지 유유의 눈은 혈안이 되었지만 항상 주사위는 유유의 손을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2] 왕진악은 전진의 명재상인 왕맹(王猛)의 손자였습니다. 부견이 요홍에게죽음을 맞이하자 어린 그는 동진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리고 유유의 북벌 때 건강을 출발하면 그는 「이번이야말로 진을 멸망시키지 않으면 살아서 장강을 건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3] 구석(九錫)

1. 이동시 두 대의 수레를 움직일 수 있다.한 대는 제후가,한 대는 호위무사가 탄다.검은 소 두필, 누런 말 여덟필로 수레를 이동시킨다.

2. 의복, 곤룡포에 면류관을 사용한다.붉은색 신발을 신는다.

3. 조정이나 집에서 음곡이나 가무를 틀 수 있다.천자 앞에서는 팔일무,왕 앞에서는 육일무를 추도록 한다.

4. 거처하는 집 대문과 나무기둥에 붉은색을 칠한다.(朱戶)

5. 궁중에서 신발을 신고 전상에 오를 수 있다.

6. 300명 가량의 호위병을 데리고 다닐 수 있다.

7. 도끼를 가지고 다닐 수 있다.

8. 붉은 활 한벌과, 붉은 화살 백개, 그리고 검은 활 열벌과 화살 3천개를 가지고 다닐 수 있다.

9. 옥으로 만든 제기로 술을 빚을 수 있다.


[4] 공제가 유유에게 선양의 조서를 내릴 때 그 조서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고 합니다.

 

「동진은 벌써 환현 때에 한번 멸망했던 왕조다. 이를 유유의 힘으로 다시 일으켜 그 뒤 20년이나 목숨을 부지한 것이므로, 이제 천명이 향하는 것을 살펴 유유에게 제위를 물려준다.」

 


※ 출처 :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중국의 역사「위진남북조」, 중국중세사,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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