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짧게 보는 오나라의 세병제
게시물ID : history_154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5
조회수 : 201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4/24 13:10:35

손오정권에는 위(魏)나라나 촉(蜀)나라와는 다른 특수한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명 세병제(世兵制)라는 것으로 오나라의 장군들은 부자형제 사이에 휘하의 군대를 세습하는 것이 제도로서 인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세병제는 손책시대부터 시작된 제도였습니다. 세병제 하에서 군대는 군대를 이끄는 장군의 사병(私兵)의 성격이 강했고 각각 요지에 위치한 군단들은 그 독립성 또한 매우 강했습니다. 위(魏)나라와는 대조적으로 오나라의 군대는 사병집단의 연합체의 성격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병집단의 연합시키는 핵심은 손권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 사이의 주종관계였습니다.

 

 

어떠한 인물이 한 군단의 장군으로서 강남으로 진출한 후, 그들은 세습을 허락받은 군대를 양성하기위해 경제적인 기초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장군들에게는 봉읍(奉邑)이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봉읍은 하나 또는 몇 개의 현(縣)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봉읍을 받은 장군은 그 현의 상급관리를 자유로이 임명할 수 있었고 거기에서 나오는 조세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상 봉읍을 받은 장군은 봉읍 전체를 지배하는 영주나 다름 없었습니다.

 

 

※ 이러한 봉읍을 받은 장수들의 출신을 보자면 대부분이 강북 출신자들이고 강남 출신자들의 수는 매우 적었습니다. 실제로 강남의 재지호족으로써 오군(吳郡)의 사성(四姓)인 주(朱)*장(張)*고(顧)*육(陸)씨나 회계(會稽)의 사성(四姓)인 우(虞)*위(魏)*공(孔)*하(賀)씨들 중 오나라의 장수인 자로 봉읍을 받은 예는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이러한 강남 재지 호족은 오나라 정부에 봉읍을 받지 않아도 자신의 사병 부대를 먹여 살릴 만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강남의 호족들은 필요하면 다수의 전객(佃客)들을 언제라도 사병으로 전용하고 평시에는 전객으로 사역시킬 수 있었고 자신의 토지 안에 무기고와 같은 설비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병사들은 법적으로는 관병(官兵)이었지만 실제로는 호족들의 사병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봉읍제는 222년에 오나라가 정식으로 성립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오나라 정부는 봉읍을 모두 폐지하면서 이러한 봉읍들을 모두 둔전(屯田)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리하여 각 장군들이 이끄는 사병적인 세습군단은 평소에는 둔전을 일구며 자급에 힘쓰며 전투에는 군인으로써 종사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봉읍이었던 오나라의 수도 건업 동쪽의 비릉(毗陵)부터 무석(無錫)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둔전이 설치되고 수도 동쪽의 단양(丹陽)과 진릉(晉陵) 일대에도 대규모의 둔전지대가 설치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나라와 촉나라의 접경지대에 배치된 국경수비군의 주둔지를 비롯해 군대가 배치되 있는 곳에 둔전이 개척되었습니다.

 

 

※ 봉읍제가 폐지됨과 동시에 오나라는 장수 개인의 명예와 영광과 그 일가(一家)의 경제를 고려하는 봉작제(封爵制)를 만들었습니다. 봉작에는 정후(亭候)*향후(鄕候)*현후(縣候)의 등급이 있었고 오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孫皓) 때는 여러 왕자들을 각 지역의 왕으로 봉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봉작제 아래에서도 세습적인 영병(領兵)은 존속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배치한 둔전군은 아직 광대한 황무지와 미개간지가 도처에 널려 있던 강남 개발의 첨병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광대한 황무지와 미개간지를 개발하려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하지만 둔전군만으로는 광대한 황무지와 미개간지를 개발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나라 정부는 이러한 개발의 노동원으로 강남의 산월(山越)을 삼았습니다. 오나라 정권을 구성하는 장군들은 자주 산월을 토벌했고, 이 토벌에 정복당하거나 항복한 산월민들은 장군과 부장들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이렇게 분배된 산월민들 중 강한 자는 병사로서 둔전군에 속하게 하고, 약한 자는 군현의 호적에 집어넣었습니다. 군현의 호적에 들어간 산월민은 병역은 면제되었지만, 논밭을 강제로 할당받아 강제적으로 농경노동에 종사했습니다. 따라서 일반 군현에도 이와 같은 둔전민들이 있었고, 또 둔전군을 이끄는 장군들 중에는 군현의 장관에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개발도상에 있던 강남의 많은 지역에서는 이러한 장군들이 세습을 허락받은 사병적인 둔전군을 통솔하여 각각의 미개발지에 군림하고, 그 무력과 재력을 기초로 엄한 군정지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장군들로 구성된 군현의 장관들도 자신이 이끄는 사병적 색채가 매우 강한 둔전군(그냥 사병으로 봐도 무방합니다.)을 중심으로 관할하의 군현의 호적에 편입된 피정복민을 둔전지의 농경에 결박시키고, 이를 사사로이 부리는 사적인 군정지배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장군들의 엄한 군정지배는 당시 농경사회였던 일국(一國)의 재정 건전성과 사회의 건강함을 나타내는 시금석인 자립농민의 성장을 방해하였습니다.

 

 

이러한 개발둔전군을 중심으로 하는 군정지배와 오(吳)와 회계(會稽)의 강남재지호족의 개발호족화는 오나라의 정권을 지지하는 두 개의 기둥이었습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진남북조사, 위키백과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