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가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건 한국이나 일본의 치안이 너무 훌룡하다고 세계인들이 감탄한다는 것입니다. 밤에 여자가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가 세계에 얼마 없으며 심지어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그게 안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미국이 망해간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마약 환자가 너무 많아졌다고 합니다. 좀도둑들이 너무 뻔뻔 해져서 이제는 아예 가게를 닫아버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팁문화가 너무 과해져서 사람들이 외식을 안한다고 합니다. 물론 세계 어느 나라나 다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세계를 선도하는 진정한 선진국이라는 미국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요즘 미국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는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는 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를 생각하면 우리도 진보가 뭔지에 대해 고민할 여지가 있습니다. 문제는 근대화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근대화의 핵심은 사람들이 과학적 사고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즉 근대화의 핵심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아서 근대인이 되는 겁니다. 조선이 일본에게 패망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근대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서양 물건 들여오고, 서양 제도를 들여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결국은 사람들이 근대적 인간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그 나라는 근대라는 시기에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그렇지 못하면 외국에서 온 근대인들에게 수탈당하고 나라가 식민지가 되는 것이죠. 공장도 학교도 이제는 근대적 시스템에 따라서 돌아가는데 거기서 양반 천민 따지고, 인정이 어쩌고 저쩌고 하고, 우리가 남이냐같은 소리나 하고 있어서는 결국 본인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는 겁니다.
근대화는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근거없는 관행들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에게는 해방이었죠. 근대화를 퍼뜨리자는 운동인 계몽주의는 해방이었습니다. 인종 차별이나 여성 차별을 비판하게 된 것이 대표적입니다. 건축에서 조차 전통의 장식들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재료인 철근콘크리트로 장식없이 짓는 모던 스타일이 20세기의 주류를 이뤘습니다. 근대화는 표준화이고 객관화이며 과학화입니다.
문제는 근대화도 다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변해서 팽팽 돌아가게 된 것은 좋았지만 근대인은 개성을 억누르고 역사를 부정하고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부정하면서 물질주의적으로만 사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게다가 여러 문제가 나타날 때 마다 더 복잡한 법체계를 만들다 보니 나중에는 세상에 감당하지 못하게 복잡해져서 개인들을 억누르는 경향도 있습니다. 보통 시민들은 그 시스템을 다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낭만주의 같은 것이 나타나서 계몽주의에 반대하기도 했고 그 낭만주의는 20세기로 오면서 실존주의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역사가 문제가 뭔지를 보여줍니다. 근대화를 오래전에 통과한 선진국들은 그간 근대화의 열매를 즐기면서, 근대화 과정에서 생긴 제도를 믿으면서 근대화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넓은 눈으로 보면 그건 진정한 대안적 삶을 제시했다기 보다는 임시적인 처방을 제안했거나 근대화를 역행하는 흐름을 만들어 냈습니다. 표준화에 반대해서 개성을 강조하면 근대화의 해독을 줄일 수는 있지만 반대로 근대화의 이득도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래서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주장들이 실은 시대역행적 주장이 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교육에 의해서 만들어진 근대인을 그냥 태어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냥 이러저러한 가치가 있다는 점에만 주목하지 근대인이 되지 못한 인간이 근대사회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를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쁜 사람을 보는게 아니라 무슨 짐승을 보는 것같습니다. 몇천 몇만불 어치의 파괴를 하면서 겨우 몇백불을 훔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러니까 수리비가 몇만불 나오는 고급차를 부셔서 그 안에 있는 3백불을 훔치면 나중에 3백불이 문제가 아니라 책임질 돈이 훨씬 많다같은 생각을 안하는 겁니다.
그럼 왜 그 사람들은 그럴까요? 진보주의자들은 좋은 의도였겠지만 학교를 점차로 근대화를 하지 못하는 곳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근대화 교육이란 획일적이고 야만적인거라고 비판만 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학교는 성적을 매겨서 경쟁을 유도해도 안되고 그냥 언제나 칭찬만해야 하고 공부를 안해도 졸업은 하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엄하게 처벌해서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처벌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감고 아는 걸 파는 지식 소매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지적이 진보주의자들이 지적하는 과거 교육의 악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위 보수적 전통적 교육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단순하고 무식했던 교육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교육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재능있고 성실한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근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에게 가해졌던 폭력은 교육이 아니라면서 이런걸 교육에서 빼내는 것이 좋은 교육을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잊혀진게 있다는 것이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근대인도 되는데 실패하고 전근대적인 사고 방식으로 야만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은 물론 순식간에 세상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관례에 따라 기존의 기성세대에 의해서 움직이니까요. 하지만 진보적인 교육에서 배출해내는 사람들이 누적되면서 세상이 이미 망가지기 시작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좀 깨달아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걸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근대화를 먼저 통과했던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입니다. 이런 식이면 원숭이나 침팬지가 나라를 통치할테니 그들이 선진국의 자리를 언제까지 유지할지 알 수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약간 늦게 근대화되었던 일본도 요즘은 비슷한 병을 앓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일본하면 사람들이 친절하고 근면하며 거리는 깨끗하고 치안이 좋다고 알려졌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세대의 경우에는 꼭 사실이 아닙니다. 최근에는 회전초밥집에 가서 돌아다니는 초밥에 더러운 짓을 하는 청년때문에 큰 소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류의 소동은 계속 됩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근대인이 아닙니다. 새로운 진보적 교육을 받은 세대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는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싸움의 제대로된 이름은 아마도 전근대와 근대의 싸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에 워낙 압축적으로 발달한 나라라서 전근대 시대를 살았던 분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그들은 왕과 대통령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법치가 뭔지 따위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이 스스로를 보수 정치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젊은 세대가 보수화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보수화되는게 아닙니다. 그들은 다시 전근대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전근대를 살고 있는 노인세대와 정치적으로 합쳐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근대화는 민족국가를 거쳐 공화정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의 보수세력이 민족 정신을 부정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그들이 전근대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왕에게 충성한다는 개념을 제외하면 이기적이라는 말이죠.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충성심이 없고 그저 강자에게 머리를 조아려 이득을 취하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그 옛날의 군대식 교육, 체벌이 넘쳐나던 무식한 교육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해법을 찾자면서 교육을 하염없이 복잡하게만 만드는 현실을 멈춰야 한다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법과 제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입시는 이제는 전문가가 아니면 시스템이 이해가 안될정도로 복잡해졌습니다. 이런 복잡한 시스템이 누구를 소외시킬까요? 애초에 누구를 구원하기 위해서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었습니까? 크게 보면 허무한 이야기인 겁니다. 시스템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패러다임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미국의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제도적 문제가 이런 현실을 만들었냐고 생각할 겁니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한국이 제도가 좋아서 미국보다 치안이 좋은게 아닙니다. 그냥 한국은 근대화를 가장 최근에 통과한 선진국일 뿐입니다. 그리고 가장 빠르게 선진국들을 쫒아가면서 망국의 길을 가고 있죠.
저는 이것이 세계 모든 나라가 겪고 있는 문명적 위기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고 위기를 경감시킬 수는 있지만 진보적 방식들이 치료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근대화의 시작은 너무 복잡한 세상을 만들었고 중간에 진보주의자들이 이러니 저러니 떠들었지만 그 말들은 시대역행적이거나 대안이 될 수는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복잡한 도시의 현실을 떠나 낭만적으로 시골에 가봐야 결국 일거리도 없고 생활도 불편해서 얼마지나지 않으면 다시 도시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 대안이 되지 못했던 진보주의 실험이었던 것이죠.
이 문제의 진짜 대안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연결이 강화된 초연결 사회를 만들어 사회적 가치를 뿌리부터 뒤집는 정도의 개혁을 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을 대안으로 내놓는 것이죠. 그리고 그 답은 AI 혁명에 있습니다. AI가 인간의 일을 대신해주는 미래가 아니라 AI를 통해 사람들이 소통하고 일을 처리하는 AI 에이전트의 사회가 되어야 세상은 새롭게 바뀔 겁니다. 인터넷의 발달 이후 온라인 판매사업, 넷플릭스나 스포티파이같은 구독경제 사업, 공유경제 사업, 온라인 교육 사업, 핀테크나 암호화폐 사업등 새로운 사업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사람들이 AI를 통해 서로 소통하는 AI 에이전트의 사회는 5년안에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가 오면 우리는 진정한 초연결사회가 뭔지를 느끼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은 근대화가 시작된 이래 최초로 더이상 근대적 인간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AI 패러다임은 과학 패러다임과 다르기 때문이죠. AI들이 관리업무들과 소통업무들에서 복잡한 부분들을 대행해주는 시대에는 인간들이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직업이 없어지면 어쩌냐고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사실 해방을 걱정하는 노예의 걱정과 비슷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미래도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근대화는 저절로 오는게 아니라 근대인이 된 사람들이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진국들 중에서도 이 미래사회로 가는 나라만이 근대화의 비참한 결말을 피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나라는 점차로 근대인도 되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 사회를 장악해서는 스스로 전근대적인 시대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미래가 점점 멀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시스템이나 기계 이전에 사람이 중요합니다. 근대인이 없이 기계만 있다고 근대적 국가가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미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미래는 그런 사람들이 생길 때까지 올 수 없을 겁니다. 그때까지 교육은 점차 무기력해지기만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