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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전한의 화폐 정책
게시물ID : history_154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3
조회수 : 142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4/24 23:04:21

한나라의 화폐제도는 진(秦)의 반량전(半兩錢)의 형태를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고조 유방은 화폐의 민간 주조를 허가해서 화폐 한 개의 중량이 점점 작아져 나중에는 느릅나무의 꼬투리 크기로까지 축소되었습니다. 이렇게 축소된 돈을 유협전(楡莢錢)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량전의 중량이 약 7.5g인데 비해서 유협전은 1.5g 전후였고 가장 작은 것은 0.2g에 불과했습니다. 유방의 화폐의 민간 주조 정책은 오히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말을 남긴 그레샴의 법칙을 실현시키고 말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나라의 중앙정부는 여후 2년(기원전 186년)에 중량 8수(銖)의 반량전을 주조하고 민간의 화폐주조권을 중앙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 반량전도 4년 후에는 오분전(五分錢), 즉 그 중량이 반량전의 5분의 1(2수銖 4루累)이 되고 1전의 무게는 또다시 축소되었습니다.

 

문제 5년(기원전 175년)에 한나라 정부는 4수전(무게 4수의 반량)을 만들고 동시에 다시 민간의 화폐 주조를 허가했습니다. 단 그 품질을 일정하게 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이 조치로 오왕 비(고조 유방의 형인 유중의 아들)는 국내의 동산(銅山)을 개발하여 화폐를 주조하고 등통(登通)이 촉군의 동산을 받아 화폐를 주조한 것은 이때의 일이었습니다.

 

경제 중원(中元) 6년(기원전 144년)에 정부는 다시 화폐의 민간주조를 금지하고 위반자는 사형에 처했지만 여전히 민간에서는 이 4수전의 주위를 깎아서 몰래 유통시켜 화폐제도는 여전히 혼란스러웠습니다.  

 

시간은 흘러서 한무제 시기로 넘어옵니다. 한무제가 실시한 수많은 외정들은 심각한 재정난을 수반했습니다. 한무제와 상홍양, 공근, 동곽함양 등을 중심이 된 관료들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염철전매제, 균수평준법, 고민령, 산민전' 등의 정책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이 정책들은 화폐유통을 전제로 입안된 것이었고 이 정책들이 성공을 거둘려면 이전과는 다른 통일된 화폐제도가 절실히 요구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화폐 정책은 어지러웠습니다.

 

 

 사기 평준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전합니다.


 

「 (중략) 천자와 공경들이 상의하기를, 돈을 바꾸어 새로운 화폐를 주조해서 재정을 충당하는 동시에, 거만하고 불법적으로 토지를 겸병한 그들을 억압하고자 하였다. 당시 황제의 금원(禁園: 황실의 정원)에는 흰 사슴이 있었고, 소부(少府)에는 많은 은과 주석이 있었다. 효문제(문제)가 사수전으로 바꾸어 주조한 지가 이해로 이미 40여 년이 흘렀다. 건원(建元) 이래로 재정이 계속 어려우므로 정부는 자주 동산에 가서 돈을 주조하였는데, 민간인들 역시 몰래 돈을 주조하였으므로, 그 수량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돈은 날이 갈수록 많아져 그 가치는 떨어지고, 물건은 날이 갈수록 적어져 그 값은 올라갔다. 담당관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옛날 가죽 화폐는 제후들이 다른 나라에 사절로 가거나, 천자께 토산물을 바칠 때 사용되었습니다. 금에는 세 등급이 있는데, 황금(黃金)이 상등(上等)이고 백금(白金: 은)이 중등(中等)이고 적금(赤金: 동)이 하등(下等)입니다. 현재 반량전의 표준 중량은 사수(四銖)인데, 나쁜 사람들이 몰래 글자가 없는 한쪽 면을 마모시켜 동가루를 얻으니, 돈은 날이 갈수록 가벼워지고 물가는 게속 뛰고 있습니다. 따라서 반량전을 먼 곳에서 사용함은 번거롭고 비경제적입니다."」

 

 

무제 원수 3년(기원전 120년). 한 정부는 기존의 4수 반량전을 폐지하고 3수전을 제정했습니다. 이것은 한 개의 중량을 3수로 하고 표면의 반량이라는 문자를 그만두고 중량 그대로 3수라고 적은 것이었습니다. 원수 3년에 제정된 3수전으로 인해 진시황 이후부터 전해지던 반량전의 형태는 모습을 감추게 되었습니다. 또 동시에 피폐(皮幣), 백금(白金) 제도가 정해졌습니다.

 

피폐란 평방(平方) 1척(一尺: 사방 23cm)의 흰 사슴 가죽을 사방 색실로 자수를 뜬 가죽 화폐를 말했습니다. 피폐 1장의 가치는 40만 전에 해당하였습니다. 이 피폐는 각 왕후 종실에서 입조하여 천자를 배알하거나 혹은 국가간에 사절로 방문하거나, 제후가 토산품을 헌납할 때 반드시 쓰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금은 은과 주석을 합금해서 만든 화폐였습니다. 백금의 세 종류로 나뉘었는데 그 중 제일종은 무게가 8량(兩)이었고 둥근 모양에 용 무늬를 하고 그 이름을 백선(白選)이라 하였습니다. 이 제일종의 가치는 3000전에 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이종은 제일종에 비하여 무게가 비교적 가볍고, 사각 모양에 말 무늬를 하였습니다. 이 제이종의 가치는 500전에 해당하였습니다. 제삼종은 무게가 제일 가벼웠고 타원모양에 거북 무늬를 하였습니다. 제삼종의 가치는 300전에 해당하였습니다.

 

3수전과 피폐, 백금을 주조 및 유통함과 동시에 중앙정부는 각 지방정부에 기존의 반량전을 녺여 삼수전으로 개주토록 하고 실질가치와 중량이 같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종 백금이나 사수전을 몰래 만들어 유통시키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중앙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간의 화폐 사주(私鑄)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1년만에 3수전을 비롯한 피폐, 백금 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중앙정부는 그 실패를 거울 삼아 새로운 화폐제도를 실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수전 제도였습니다. 이 오수전 제도는 원수 4년(기원전 119년)에 제정되어 그 다음해인 원수 5년(기원전 118년)에 주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오수전은 중량이 5수이고 그 표면에는 오수(五銖)라는 두 글자를 주철한 원형 방공전(方孔錢)이었습니다. 이 오수전의 형태는 이후 중국화폐의 기본형식으로 답습되어 훗날 당나라 초에 만들어진 개원통보(開元通寶: 621년 제정) 출현할 때까지 70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오수전은 이전의 화폐들과는 달리 민간에서 몰래 동전 주위를 깎아내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주변에 곽대(郭帶: 테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조치에도 여전히 민간에서 몰래 깎아내리거나 주조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에 위반죄로 사형에 처해진 자가 몇년 사이에 수십만에 이르렀습니다.

 

 

사기 평준서는 이를 이렇게 전합니다.


 

「백금과 오수전을 주조한지 5년째가 되던 해, 돈을 몰래 주조한 죄로 사형선거롤 받은 이민(吏民: 관리와 백성)이 수십만 명을 사면하였다. 또한 자수한 자 백수십만 명을 사면하였으나, 자수한 자는 절반도 채 안 되는 숫자였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돈을 몰래 주조하였기 때문이다.

 

범법자가 너무 많아서 모두 체포하여 죽일 수가 없자, 조정에서는 박사(博士)인 저대, 서언 등을 파견하여, 여러 조(組)로 나누어 각 군국을 순행하도록 하여, 토지를 겸병하고 있는 무리나 사욕을 위해서 부정을 저지르는 군수나 재상들을 검거하게 하였다.

 

(중략)

 

천자가 이미 민전령(緡錢令)을 반포하고, 복식(卜式)을 존숭하도록 하였으나, 백성들이 끝까지 돈을 내어 조정을 도우려고 하지 않자, 사람들로 하여금 민전(緡錢)을 부실하게 신고한 상인들을 고발토록 하였다.

 

군국(郡國)에는 교묘한 방법으로 주조한 돈이 대단히 많았는데 그 돈은 대부분이 매우 가벼웠다. 그리하여 공경은 경사(京師)의 종관(鍾官)들로 하여금 적측전(赤側錢)을 주조하도록 청하여, 그것의 1전을 5전으로 하였고, 정부에 돈을 낼 때에는 적측전이 아니면 안 되게 하였다. 그러고 나니 백금이 점점 가치가 떨어져서 백성들이 사용을 꺼리자, 정부는 명령을 내려 이러한 상황을 종식시키려고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로부터 1년 후에 백금은 마침내 폐기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중략)

 

장탕이 죽은 뒤 2년이 되던해, 적측전의 가치가 떨어지자, 백성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배척하여, 통용이 되지 않자, 다시 폐기하였다. 그리하여 군국에서 주전하는 것을 완전히 금지하고 상림삼관(上林三官)에게 주전할 것을 명령하였다. 돈이 이미 주조된 것이 너무나 많아서 삼관전(三官錢) 이외에는 통용을 불허하고, 또한 각 군국에서 이미 만들어놓았던 돈은 모두 폐기하여 녹여서, 그 동은 삼관(三官)으로 보낼 것을 천하에 명령하였다. 백성들의 주전(鑄錢)이 점점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주전하는 비용이 그 돈의 가치를 초과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기술이 교묘한 부호들만이 몰래 주조를 계속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사기 평준서에서 말하듯 민간에서 몰래 화폐를 주조해서 유통시키는 행위가 오수전 유통 이후에도 심각하자 한 정부는 테두리 주위에 붉은 구리를 두르게 한 적측전(赤側錢)을 주조하여 이것을 오수전 5개와 같은 가격으로 하여 조세 납부 시 이것을 사용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적측전도 나중에 그 가치가 떨어져 결국에는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삼수전, 피폐, 백금제도의 실패와 적측전의 실패 등을 면밀히 분석한 한 정부는 이 원인이 화폐 주조권의 분산으로 인한 통일되지 않는 화폐 품질이라는 것을 깨닫고 원정 4년(기원전 113년)에 중앙관청으로 하여금 화폐주조권을 독점하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형도위(水衡都尉) 소속의 상림삼관(上林三官)이 5수전을 주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수형도위는 원정 2년(기원전 115년)에 새롭게 신설된 부서로 소부와 함께 제실의 재정을 관장하였습니다. 수형도위의 신설과 함께 종래 소부 소속인 상림원(上林苑)이 수형도위로 이관되었는데, 그 결과 상림원에 설치되어 동전을 주조하던 상림삼관 즉 균수(원료인 동광 운반), 종관(鍾官: 화폐 주조), 변동(弁銅: 원료 선별)의 이 3관도 이 수형도위 소속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림삼관의 화폐주조 독점과 함께 지방의 군국에서 행해지던 화폐주조가 모두 금지되고, 상림삼관 이외에서 주조된 화폐 역시 유통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사기 평준서에서 전하듯 군국에서 주조된 화폐는 모두 녹여 상림삼관에 수납하여 동전주조의 원료로 삼았습니다. 이런 강력한 조치는 곧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민간에서 화폐주조는 상당한 설비를 가진 자를 제외하고는 크게 줄었습니다. 이러한 유통화폐의 안정화에 따라 신재정정책에 의한 국가재정의 회복과 유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 출처: 사기 평준서, 중국의 역사 '진한사', 한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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