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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보니 서아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이거 좀 건강하지 않은 거 아닌가 싶었지만 고작 열 살 꼬마인데, 하루쯤 그러면 어떤가 싶어 놔두었다. 그런데 그 애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자마자 찬장에서 젤리를 꺼내 먹었다. 지금은 옆에서 초콜릿을 먹고 있다. 이거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
저녁에 주문한 비전프로 4가 아침에 도착했다. 나는 서아를 불러 연예인 놀이를 하자고 말한다. 서아는 눈을 크게 뜨고 뛰어온다. 비전프로를 쓰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나는 이 놀이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걸 미리 파악해 둔 참이었다.
서아는 비전프로를 쓰고 “피어싱의 이어링”이라고 말한다. 피어싱은 그 애가 가장 좋아하는 걸그룹이고 이어링은 그 팀의 센터다. 나는 서아가 이어링과 마음껏 놀도록 둔다.
나는 비전프로를 받자마자 한 가지 세팅을 해두었다. 서아에게 단 것을 그만 먹으라고 가르치라고 주문해둔 것이다. 이어링이든 누구든, 서아가 불러낸 연예인은 서아에게 단 음식이 충치, 비만을 유발한다고 친절하게 알려줄 것이다. 아빠가 하는 말은 잔소리로 듣지만 좋아하는 연예인의 말은 들을 거다. 이미 수 많은 아빠들이 유튜브에서 검증한, ‘인플루언서 교육’이란 실험이다.
그날 저녁, 저녁식사를 마친 딸이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뭘 하나 살짝 엿보니 그냥 음악을 들으며 놀고 있었다. 뭘 먹고 있는 건 분명히 아니었다.
잠시 후 딸은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군것질 거리를 찾는 듯 부엌을 기웃거리다가, 뭔가 체념한 듯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비전프로 만세. 이어링 만세.
한 달쯤 지나자, 딸 아이는 설탕 들어간 음식은 일절 찾지 않게 되었다. 나는 비전프로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채소와 생선 위주로 남기지 않고 먹으라고 가르치란 것이었다. 서아의 식습관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
스무살이 된 서아는 요새 유난히 명품에 집착한다. 평범하게 학교 다니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소용없다. 그 애는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해서 가방, 지갑, 스카프 같은 것을 사 모았다. 언젠가 살펴봤더니 모두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루미에르 로열 제품이었다. 대체 왜 이런 것에 빠진 걸까. 그 또래 여자애들 사이에서 유행인가. 뭐가 됐든, 이렇게 명품에 중독되는 것은 결코 장려할 만한 일은 아닐 게 확실했다. 나는 몇 번 얘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서아는 짜증을 냈다. 간섭하지 말아라, 밥은 끊어도 쇼핑은 끊을 수 없다, 아빠가 돈을 주는 것다 아니지 않느냐… 나는 싸움을 포기했다.
그날 저녁 비전프로 14를 주문했다. 그리고 한 시간 뒤에 제품이 도착했다. (배송속도는 대체 언제까지 빨라지려는 걸까?) 그리고 고가의 제품을 사는 게 진짜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루미에르 로열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루미에르 로열 같은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주도록 세팅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10년 동안 변한 게 하나 있었던 것이다. 서아는 비전프로 같은 것을 가지고 놀고 싶어하지 않아했다. 젠장. 이제 뭘로 사상교정을 해줘야 하지. 어쩔 수 없지 뭐. 저러다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서아가 내팽개쳐 둔 비전프로를 보고 있자니 돈이 아까웠다. 그래서 나라도 가지고 놀기로 했다. 나는 비전프로 14를 쓰고 클라우드에 로긴했다. 그리고 어릴 적 서아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다.
막 태어나 녹색 보자기에 쌓여 있는 서아. 바닥을 기는 서아, 입 주변에 잔뜩 이유식을 묻힌 서아, 젊은 내 품에 안겨 있는 서아, 처음 몸을 뒤집은 서아, 처음 일어선 서아… 잊고 있던 과거의 서아들이 휘리릭 눈 앞을 지나갔다. 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비전프로는 서아의 열 살 무렵을 재생했다. 낯익은 방. 그래, 서아 초딩 때 저런 집에 살았었지. 당시 서아가 방 안 곳곳에 걸그룹의 사진들을 붙여 놨었다. 저 가수가 누구더라. 그래, 피어싱의 이어링이란 가수였다.
앗.
그러다가 나는 발견한다. 이어링이 거의 모든 사진에서 루미에르 로열 제품을 착용하고 있다는 것을.
사진 출처 : unsplash.com (무료 라이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