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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를 끼고 발달한 에르도니아는 작지만 콘텐츠가 많은 국가였다. 기업들은 정교한 생산기술을 기반으로 수출액을 매년 갱신했으며 음악, 영상, 음식과 같은 문화 역시 뉴욕, 파리, 서울 같은 대도시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이토록 성공적인 에르도니아에도 큰 고민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인구감소였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았고 인구가 고령화 된 탓에 국가 전체의 사망자는 매년 늘어나는 중이었다.
의회 일각에서는 이민자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했다. 캐나다, 호주, 독일처럼 적극적으로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인구수를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이를 반대했다. 최근 3연임에 성공한 대통령 알렉산더 베르마이어는 민족주의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강력하고 유능한 에르도니아 민족 정신을 살려 국가를 부흥케 하겠다는 정치 슬로건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인물이라, 지지자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민자법에 반대하는 행보를 보였다.
문제는 하나의 영상에서 시작됐다. 기자인 엘라윈 레오나드가 방송국에 고발 영상을 하나 보낸 것이었다.
영상 속에서 엘라윈은 영부인인 카트린 베르마이어와 앉아 있었다. 엘라윈은 카트린에게 값비싼 골프채 세트를 건넸고, 카트린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를 받았다. 엘라윈은 자신이 UN과의 관계 문제에 대해 생각이 많다고 말했다. 그러자 카트린은 안 그래도 자신이 UN문제에 좀 나설 생각이라며,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곧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이 짧은 영상은 곧 에르도니아를 뒤흔들었다. 시민사회와 지식인층은 즉각 영부인이 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검찰이 움직이지 않자 야당에서 나서 특검법을 제정했으나 알렉산더가 이를 거부했다. 친정부 인사들은 오히려 엘라윈을 가택침입죄로 수사해야 한다고 맞불을 놨다.
두 패거리가 서로 싸우는 동안 알렉산더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알렉산더는 참모들을 모아 놓고 엄중하게 주문했다. 지지율 하락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을 당장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참모 중에는 데이터 전문가가 있었다. 구글에서 10년 넘게 데이터 분석 일을 했던 그는 곧장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시민들이 대통령에 대해 검색할 때, ‘카트린’ ‘골프채’ ‘특검’을 연달아 검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모들은 곧 이를 알렉산더에게 보고 했다. 보고를 받은 알렉산더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카트린이 무죄라는 논리를 만들어와.”
알렉산더는 늘 그렇듯이 말 끝에 “멍청아”라고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명령은 반부패 국가 기관인 에르도니아 청렴 위원회, 즉 에청위에 떨어졌다. 에청위는 곧 규정을 면밀히 조사했고, 카트린이 대가성으로 고가의 선물을 받았다면 공직자인 알렉산더가 이를 에청위에 신고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알렉산더를 적으로 돌렸다간 뒤끝이 있을 텐데… 에청위의 고위직들은 전전긍긍했다. 그때 누가 아이디어를 냈다.
“핵심은 최초 제보자인 엘라윈입니다. 문제는 엘라윈에게 있다는 것으로 프레임 전환을 하지 않으면 이 국면을 타개할 방법이 없습니다.”
고위직들은 그 말이 맞다는 데 뜻을 모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3일 밤을 새어 엘라윈을 몰아 세울 스토리를 짰다.
며칠 뒤, 에청위의 대변인이 기자회견장에 섰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온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에청위는 이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기 위해 대단히 많은 자원을 투여했습니다. 그리고 카트린 여사의 평소 청렴했던 생활방식과 이번 엘라윈의 고발 사이에 무언가 맞지 않는 게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사 중, 우리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엘라윈이 마인드콘트롤, 즉 심리를 조종하는 초능력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갑작스런 발표에 취재진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대변인은 지체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에청위는 조사 중에 카트린 여사의 집무실에 CCTV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대변인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준비된 영상을 틀었다. 화면에 등장한 것은 엘라윈의 모습이었다. 영상 속에서 엘라윈은 카트린을 바라보며 골프채 세트를 가리켰다. 그때 대변인이 영상을 멈추었다.
“여러분, 지금부터가 엘라윈이 초능력을 쓰는 순간입니다. 영상 속 엘라윈의 눈을 잘 보세요.”
대변인이 영상을 다시 틀자, 기자들은 숨을 멈추고 엘라윈의 눈을 바라봤다. 과연, 엘라윈의 눈이 잠깐 초록색으로 빛났다.
“헉!”
기자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세상에 저런 게 있을 줄이야. 정말 초능력이 존재하는 거였다니! 초능력자들이 나서서 여사를 유린하고 반정부 활동을 하고 있었다니!
기자들은 초능력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에르도니아 국민들은 뜨겁게 논쟁을 벌였다. 시끄러워졌다. 저딴 걸 해명이라고 하느냐… 저런 삼류 CG영상을 누가 믿느냐… 초능력자들을 빨리 색출해야 한다… 엘라윈은 외계인이다… 외계인들은 이전부터 이 땅에 있었으며 우리 모르게 그들은 주요 관직에 올라 있다… 야당대표도 외계인이다…
언론은 금세 장사가 되는 키워드를 금세 찾아냈다. 많이 클릭되는 기사에는 늘 ‘초능력’이란 키워드가 있었다. 신문지상은 초능력 기사로 뒤덮여 갔다. 그러다 누가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 엘라윈은 어딨지?
사람들은 그제서야 엘라윈을 찾아 나섰다. 알고보니 모두가 초능력의 진실에 목을 매고 있을 때, 엘라윈은 검찰 조사를 받는 중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검찰에서 발표한 엘라윈의 혐의는 초능력 규제 및 관리법 위반이었다. 기자들은 그런 법이 대체 언제부터 존재한 거였냐고 물었다. 검찰측 관계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국가법령정보센터에 접속해 확인해보라고 했다. 기자들이 그 자리에서 사이트에 접속해 확인해보니 초능력 규제 및 관리법은 행정안정부가 관장하는 실재하는 법이었으며, 무려 2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다 치고, 그럼 엘라윈에 대한 수사 결과는?
기자들이 묻자 검찰은 말했다. 엘라윈이 범행 일체를 자백했으며, 자신이 국가에 정식 신고되지 않은 초능력자임을, 그리고 마인드 콘트롤 능력으로 카트린을 꼬셔 뇌물을 받게 한 것이라고 말이다.
기자들은 엘라윈의 입에서 직접 답변을 듣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검찰은 그 정도는 미리 예상했다는 듯, 갑자기 엘라윈을 연단을 등장시켰다. 엘라윈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자들이 앞으로 막 쏟아져나오는 바람에 잠시 회견을 중단해야 했을 정도로 이제 기자회견장의 열기는 최고조에 다른 상태였다.
“방금 들으신 말이 다 맞습니다… 카트린 여사의 뇌물 수수 고발영상은 처음부터 기획된 것이었고, 제가 현장에서 초능력을 써서 여사가 뇌물을 수수하시도록 만들었습니다…”
“배후가 누굽니까!”
기자석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러자 검찰측은 엘라윈을 연단 밖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마무리멘트를 했다.
“배후가 있는 것인지 하는 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수사를 해서 다시 국민 여러분께 소상히 보고 드리겠습니다.”
*
그날 저녁, 엘라윈을 수사한 실베리아지방검찰청의 담당 검사들은 건배를 하며 자신들의 성과를 자축했다. 큰 숙제를 했으니 이제 곧 위에서 보상이 내려올 거란 말과, 고생했다, 한잔 해, 불판에 고기 좀 더 올려라, 이런 말들이 마구 섞여 흩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잔을 비우며 말했다.
“이제 초능력에 대한 관심은 어디로 돌리지?”
“그러게 말이야. 초능력자가 실존하고, 대부분 검사가 된다는 걸 세상이 알아서는 안되는데…”
그러자 관록 있어 보이는 선배격 검사 한 명이 말했다.
“뭔 걱정들이 그렇게 많어. 영화배우 아리아 벨라모어 알지? 그 여자 사건 준비 돼 있어.”
그러자 다들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뭡니까? 마약? 폭행? 탈세?”
“섹스.”
그러자 모두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거 터뜨리기 전에 우리끼리 함 보시죠!”
“좋지!”
경쾌한 대답을 마친 검사는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을 했다. 그 순간 검사의 눈이 잠깐 초록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그의 손 위에 USB가 몇 개 등장했다.
“하나씩 나눠 줄테니 집에 가서 자기 전에 보고가!”
그러자 후배들은 “오오 좆간지 초능력~”이라면서 박수를 마구 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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