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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일만 단편선] 램프의 요정 : 중편
요정이 사라진 날로부터 10년 동안 대략 이런 일들이 있었다. 먼저 일표의 엄마가 죽었다. 일표가 초등학교 때 위암 판정을 받았다가 완치됐던 엄마의 암이 재발한 것이었다.
엄마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된 뒤부터 일표는 엄마 옆에서 잤다. 돌아가시기 전,엄마는 일표에게 말했다.
“즐겁게 살아. 그리고 겸손하게.”
엄마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크나큰 슬픔 속에서 장례를 치르고, 일표는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갔다.
요정과의 만남, 그리고 엄마의 죽음은 일표에게 중요한 교훈들을 남겼다.
첫째, 어느날 갑자기 벼락 부자가 되는 인생 따위는 없다. 실력을 키워 돈 벌 궁리를 해야 한다.
둘째, 외모 같은 건 인생에서 중요한 게 아니다.
셋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건강이다.
넷째, 기타 따위 잘 쳐봐야 별로 쓸 데가 없다.
다섯째, 즐겁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이러한 교훈들을 되뇌이면서 일표는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그는 또래들이 신경쓰는 브랜드 옷 따위에 관심두지 않고 차분히 내신을 올렸다. 밴드 동아리 같은 건 당연히 하지 않았다. 동갑내기들의 연주 실력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만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부란 하면 할수록 재밌는 거였다. 국영수 위주로 공부하던 그는 어느새 철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역사, 정치, 문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독서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일표가 서울대에 간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서울대 안에서도 똑똑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교내에서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일이학년 시절을 보냈다. 그럼에도 엄마의 유언을 잊지 않아 겸손하기까지 했다.
물론 절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과에서 만난 인연과의 첫사랑은 뜨거웠지만 일표를 많이 힘들게 했다. 술도 마셨고 담배도 피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올바르게, 즐겁게, 겸손하게 살고자 하는 태도를 그는 결코 잃어버리지 않았다.
또 항상 램프의 요정에 대해 생각하는 날들이었다. 그날이 오면 무슨 소원을 빌지? 일표가 생각키로, 좋은 소원을 빌려면 좋은 사람이 먼저 되어야 했다.
스물네 살에는 군대에 갔다가 (입대전날 ‘군면제를 빌걸!’ 하고 후회했다) 전역해서는 한층 더 훌륭해진 지성과 인품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요정에게 외친 10년이 마침내 지나간 것이다.
*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펑! 소리를 내며 나타난 요정은 기세 좋게 외쳤다.
“마지막 소원을 빌 준비는 됐나?”
반대로 일표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응. 준비됐어.”
“그럼 가보자구.”
“잘 들어. 소원이 좀 기니까.”
“엥?”
요정은 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썹을 퉁겼지만, 일표는 아랑 곳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언제까지나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줘. 너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성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텐데, 지금부터 그걸 설명해줄테니 잘 들어.
내가 지금처럼, 때때로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며 그리움과 감사함, 미안함과 쓸쓸함, 충만함과 아늑함을 고루 느끼게 해줘. 시간이 지나면서 보니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는 내 태도가 계속 변하더라도. 빈도도 줄어들고, 예전만큼 슬프지도 않고. 그럼 앞으로는 그게 더 심해져서 언젠가 엄마를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거나, 심지어는 떠올리지도 않게 될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내가 가족의 소중함을 잊지 않는 사람이 되게끔 해줘. 그게 인간성의 1번 조건이야.”
“더 있…”
요정이 입을 열었지만 일표는 요정의 말을 막듯이 말을 이어갔다.
“또한 내가 살아가면서 돈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주변 사람을 챙기는 마음을 잊지 않도록 해줘. 내가 공부를 하면서 역사를 좀 살펴봤는데, 돈과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결말을 맺더라고. 처음엔 추종자들로 인해 우두머리라도 된듯 으시대다가, 결국 그 추종자 중에 배신자가 나와 제거되는 삶 말이야. 왜 그런 패턴이 반복될까 생각해봤더니, 돈과 명예의 추종자들은 1인자에 열광하는 척하면서, 언제나 자신이 1인자가 될 기회를 탐탐 노리는 것 같더라. 즉 그런 무리들에 속하게 되면 해피엔딩은 맞이할 수가 없어. 그러니 내가 돈과 명예라는 최종목표가 아닌, 함께 하는 사람들과의 순간순간을 감사하게 느끼도록 만들어줘. 그것이 인간성의 2번 조건이야.”
“어이, 이제 그만하라”
“거의 다 왔어. 조금만 힘내. 마지막으로, 죽을 때까지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줘. 살면서 보니까 유머는 가장 높은 지능이고, 가장 세련된 소통이면서 동시에 가장 힘 있는 메시지이기도 하더라. 또 동물과 인간의 다른 점 중 하나가 유머인 것 같더라고. 동물들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소통은 하지만 그것은 정보 전달에 그치는 수준이지. 하지만 인간은 유머를 통해 분위기를 바꾸기도 하고 상대방과의 거리를 좁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유머로 날선 비평까지 할 수 있더라고. 게다가 어떤 내용을 포장 없이 전달하면 듣는 쪽에서 거부하는 경우가 많지만, 유머로 포장하면 누구나 즐겁게 그걸 받아들이더란 말이야. 그러니 유머가 인간성의 3번 조건이라고 보고, 나를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줘. 다시 요약해, 내가 인간성을 잃지 않게 해줘.”
“방금의 소원… 틀림없이 이루어줬다.”
일표의 말이 끝나자 요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고마워.”
일표가 평온한 얼굴로 대답하자 요정이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이제 간다. 잘 지내라.”
“잠깐!”
그때 일표가 준비해온 물건을 꺼냈다.
사진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