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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남북조 시대 북조의 화폐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55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3
조회수 : 59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26 19:28:42

북위 초기에는 돈은 통용되지 않아 「포(布)*백(帛)*곡물(穀物)」들이 화폐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련의 여러 개혁들로 북위 군주들 중에서 제일 유명한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19년(495)에야 비로소 「태화 5전(太和五錢)」이 주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효장제(孝壯帝) 때에는 「영안 5전(永安五錢)」이 주조되었습니다. 이 「태화 5전, 영안 5전」은 매우 정교하여 구리도 필히 잘 단련해야 했기에 그 수량은 많지 않았고 주로 수도 부근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 남북조 시대에 돈을 주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단양(丹陽)의 구리광산은 오랫동안 개발되지 않았고, 사천(四川)의 공래(邛崍)의 구리광산이 개발되었지만 생산량은 많지 않았습니다. 다만 운남(雲南)의 주제(朱提)*당낭(堂琅)은 본래부터 유명한 구리광산이었습니다. 그곳은 한나라 무렵에 서남이(西南夷)가 개발을 시작했지만 무제(武帝) 이후에는 이곳의 구리를 이용하여 돈을 주조하였습니다. 서진(西晉) 시대에 영주(寧州)는 여전히 반통치 지역으로 어떠한 방법도 없었고 이로 인해서 서진의 돈 주조는 한나라보다 못하였습니다.

 

구리의 생산량이 부족했기 때문에 남조의 초기와 북조의 초기*중기는 모두 돈이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조의 경우 송(宋)나라 문제(文帝) 원가(元嘉 : 424-453년) 시대에 북조의 경우에는 북위(北魏) 효문제(孝文帝) 태화(太和 : 477-499년) 연간에 이르러 각기 나라가 안정되고 생산이 풍부해지면서 활발한 상업활동이 일어나면서 비로소 돈을 주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서(隋書) 권24 「식화지(食貨志)」》

 

『북조(北朝)의 신무제(神武帝 : 북제의 고조高祖입니다.)가 정권을 장악한 초기에는 북위(北魏)를 계승하여 여전히 영안 5전(永安五錢)을 사용하였다. 업성(鄴城)으로 천도한 후에는 백성들이 사사로이 주조하여 체제가 점점 달라지고 드디어는 각각 이름을 갖게 되었다. (중 략) 기주(冀州)의 북쪽은 모두 돈이 통용되지 않아서 교역하는 자들은 모두 견(絹)과 포(布)를 사용했다. 신무제가 이에 영토 안의 구리와 돈을 거두어 옛날에 주조된 화폐의 중량에 의거하여 새롭게 주조하여 국내에 유통하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점차 가늘고 얇게 되었으며 거짓되고 교활한 방법이 다투어 생겼다.

 

 

선무제(宣武帝)가 선양을 받고 즉위한 후에 영안전을 없애고 상평5전(常平五錢)을 주조했는데 그 무게는 5수(銖)이다. 이 돈은 매우 귀하고 또 만든 것이 매우 정교하였다. 제남왕(濟南王) 건명(乾明. 560년)과 효소제(孝昭帝) 황건(皇建. 560년) 연간에 가끔 사사로이 주조하기도 하였다. (중 략) 후주(後主) 무평(武平 : 570 - 575년) 이후에는 사사로이 주조하는 것이 매우 심했고 어떤 자들은 생전(生錢)과 구리로 만들었다. 북제가 망할 때까지 금지하지 못했다.

 

 

북주(北周) 초기에도 여전히 북위의 돈으 사용하였다. 무제(武帝) 보정(保定) 1년(561) 7월에 포천전(布泉錢)을 주조하였는데 한 개가 5개의 가치가 있었고 5수(銖)와 더불어 사용하였다. 이때 양주(梁州)와 익주(益州) 경계에서는 옛날에 발행한 화폐를 섞어서 교환하였다. 하서(河西)의 여러 군(郡)에서는 서역의 금(金)*은전(銀錢)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관청에서는 금하지 않았다.

 

 

건덕(建德) 3년(574년) 6월에 다시 5행대포전(五行大布錢)을 주조했는데 한 개가 10개의 가치가 있어서 상업상의 이익을 크게 거두었고 포천전과 같이 사용하였다. 건덕(建德) 4년(575년) 7월에 변방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래 주조하므로, 이에 5행대포전의 사용을 금지했고 네 곳의 관문 안으로 들여와서 유통을 못하게 하였으며, 포천전은 관문 안으로 들여올 수는 있어도 가지고 나가지는 못했다. 건덕 5년(576년) 정월에 포천전은 점점 가치가 떨어져 사람들이 쓰지 않았고 드디어는 폐지하였다.

 

 

선제(宣帝) 대성(大成) 1년(578년) 11월에 영통만국전(永通萬國錢)을 주조하였다. 한 개가 10개의 가치가 있었고 5행대포 및 5수와 더불어 세가지가 같이 통용되었다.

 

 

수(隋)의 고조(高祖)는 이미 북주의 선양을 받았고 천하의 화폐 중량이 균등하지 않아서 다시 신전(新錢)을 주조하였다. 이 돈은 뒷면의 모양이 좋고 모두 윤곽이 있으며 「5수(五銖)」라고 쓰여 있고 무게 또한 5수(銖)이다. 1천 전이면 무게가 4근 2량이다. 당시 돈이 이미 새로 나왔는데도 백성들도 사사로이 쇠를 녹여 틀에 넣어서 만들었다. 개황(開皇) 3년(583년) 4월에 사방 여러 관문에 조서를 내렸고 각각 100전(錢)을 주고 견본으로 삼게 하였다. 관문 밖으로부터 들여온 것도 모양이 비슷한지를 살핀 후에 통과시켰다. 모양이 다른 것은 곧 부숴서 구리로 만들고 관청에서 몰수하였다. 조서로써 신전이 이미 통용된 후에도 이전 시대의 돈인 오행대포*영통만국 및 제상평(濟常平)이 무역에 사용되어 그칠 줄 몰랐다. 개황(開皇) 5년(585년) 정월에 조서를 내려서 엄격히 금지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화폐가 비로소 하나로 되어 소재지에서 유통하니 편하게 여겼다.

 

 

양제(煬帝) 대업(大業 : 605 - 618년) 이후에 국가의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져서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드디어는 많이 사사로이 주조하니 돈이 점점 얇아지고 조잡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1000전은 무게 2근과 같고 그 후에는 점점 가벼워져서 1근이 되었다. 어떤 자는 쇠조각을 자르거나 가죽을 자르고 종이를 붙여서 돈으로 하여 진짜와 서로 섞어 사용하였다. 돈의 가치는 천박해지고 물건의 가치는 귀해져서 망하게 되었다.』

 

 

※ 출처 : 위진남북조사 (노간),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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