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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새벽의 병원은 고요함 속에 잠겨 있었다. 긴 복도를 따라 움직이는 유일한 존재는 은은한 빛을 내뿜는 병원 안내 로봇이었다. 차가운 금속 외관에 부드러운 목소리를 지닌 이 로봇은 환자들과 방문객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 로봇 안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숨겨진 마음이 존재하고 있었다.
1장: 어둠 속의 외침
수아는 소아과 간호사로 일하며 아이들의 웃음을 지켜주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하지만 병원의 현실은 그녀를 점점 갉아먹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선배 간호사들의 텃세는 수아를 한없이 지치게 만들었다.
"수아 씨, 이 약물 투여 시간 틀린 거 알아?" 민정은 차갑게 물었다.
"아기들은 성인과 달라서 투여 시간이 엄격하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수아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서둘러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잘못 확인했어요."
민정은 차트를 집어들었다.
"죄송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아기에게 무슨 일 생기면 책임질 수 있어?"
수아는 고개를 숙였다. 작은 실수도 엄청난 잘못처럼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 수아는 남편 재현과 마주 앉아 있었지만 대화는 짧고 무미건조했다.
"오늘 일은 어땠어?"
"별일 없었어." 재현은 무심히 답했다.
수아는 더 묻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식탁에 앉아 있던 포크만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가 변한 걸까, 아니면 자신이 문제인 걸까?
잠자리에 들기 전, 수아는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진 결과 나왔어? 괜히 신경 쓰이네."
재현은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회사 근처 병원에서 받았어.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의 차가운 대답에 수아는 무언가가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재현이 멀게 느껴졌고, 그가 진심으로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장: 차가운 금속 뒤의 눈물
병원에서의 실수와 괴롭힘, 그리고 남편의 냉대는 수아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점점 피로가 쌓여가면서 수아는 아침마다 신경이 예민해져 갔고, 작은 소리나 일에도 깜짝 놀라며 심장이 두근거렸다. 출근길,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는 한숨을 내뱉었다. 이대로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물러설 곳도 없었다. 남편 재현은 여전히 차갑게 대했고,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수아는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그는 절대 먼저 말해주지 않았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아는 자신의 차트를 확인했다. 아기들의 약물 투여 시간과 상태를 다시 점검한 뒤 병실로 향했다.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직장이었기에 매 순간 불안함에 시달렸다.
"수아 씨, 이 약물 배합 맞는지 확인했어?" 민정 선배가 물었다. 수아는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두 번 확인했습니다."
민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이번에도 틀리면 정말 큰일 난다, 알지?"
그날 하루도 간신히 버텼다. 하지만 퇴근 무렵, 수아는 결국 몸과 마음이 지쳐 눈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근무시간동안 맞고있던 링거바늘을 빼며, 수아는 자신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병동에서 나와 퇴근 길, 수아는 병원 입구에 서 있는 안내 로봇을 마주쳤다. 평소라면 그저 지나치기 바빴겠지만, 오늘따라 그 로봇이 자신처럼 보였다.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 로봇. 수아는 이 로봇처럼, 매일 병원에서 마치 기계처럼 그저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장: 뜻밖의 선물
"축하합니다. 임신 8주차 이십니다." 의사의 말에 수아는 멍해졌다. 잠시 전까지 쓰러져 있던 그녀에게, 임신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임신이요...? 그런 계획이 없었는데요." 수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의사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선물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건강 관리에 유의하셔야 해요."
퇴원 수속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온 수아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휴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인사과를 찾아갔다.
"임신을 해서 잠시 휴직을 하고 싶습니다."
담당자는 무심하게 말했다.
"가능해요. 하지만 이번에 진행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시면, 육아휴직 후 복직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연구 프로젝트요?" 수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원격 조종 안내 로봇을 활용한 실험입니다. 집에서 로봇을 조작하며 근무하실 수 있어요."
수아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수락했다.
"참여하겠습니다."
그렇게 수아는 원격으로 로봇을 조종하며 병원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4장: 상처와 오해
로봇은 기본적으로 AI로 작동했지만, 수아는 사람이 직접 개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원격으로 로봇을 조종해 사람들을 도왔다. 그러나 대게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칠 뿐이었다. 수아는 로봇의 눈을 통해 그들의 냉담한 태도를 보며 자신이 점점 쓸모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호출 알람이 울렸다. 수아는 빠르게 접속해 환자를 맞이했다. 중년의 남성이 다급한 얼굴로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왔다.
"항문외과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딘가 불편해 보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듯했다.
수아는 부드럽게 안내했다.
"네, 3층 외과 진료실로 가시면 됩니다."
남성은 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갈 수 있는 길은 없나?"
수아는 그를 배려하고 싶어서 한참을 고민하다 비상계단을 권했다.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비상계단을 이용하시면 눈에 덜 띌 거예요."
그러나 그 말에 남성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그가 버럭 화를 냈다.
"비상계단이라고? 내가 치질 때문에 앉기도 힘든데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을 것 같아?"
수아는 당황하며 급히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좌측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불쾌한 얼굴로 로봇을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거 사람이 조종하는 거지? 이런 일은 장애인들이나 하는 거라더니... 참 세상 좋아졌네."
그의 날카로운 말에 수아는 충격을 받았다. 그날 이후, 수아는 사람들 앞에서 AI인 척하며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인간임을 밝히기엔 너무나 지쳐 있었다. 차라리 감정을 숨기고, 그들에게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5장: 작은 만남, 큰 변화
며칠 후, 수아는 로비에서 휠체어를 탄 아이가 병원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로봇을 보자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안녕! 너는 이름이 뭐야?" 아이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원격으로 접속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병원 안내 로봇이에요.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이의 어머니가 다가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이가 로봇을 정말 좋아해요. 잠깐 이야기해도 될까요?"
수아는 기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언제든지요."
아이와의 대화는 순수하고 따뜻했다. 아이는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로봇 공학자가 돼서 다리를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로봇을 만들 거예요! 그러면 저도 친구들이랑 같이 뛰어놀 수 있겠죠?"
수아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이의 꿈은 단순히 자신의 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로봇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정말 멋진 꿈이네요. 꼭 이룰 수 있을 거예요."
아이의 눈은 빛났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고마워요!"
아이의 미소는 수아에게 오랜만에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작은 대화가 수아의 마음을 살짝 치유하는 듯했다. 아이는 자신처럼 육체적 한계를 겪고 있지만, 그 안에서도 밝고 희망찬 꿈을 꾸고 있었다. 수아는 그 아이가 이뤄갈 미래를 응원하며 마음속 깊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날 늦은 오후, 수아는 또 다른 호출 알람을 받았다. 이번엔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고 있었고, 수아는 원격으로 접속해 그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수아는 로봇을 통해 물었다.
노인은 수아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잘 안 보여서 그런데, 안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수아는 부드럽게 답했다.
"2층 안과로 가시면 됩니다. 제가 손잡이를 제공해드릴까요?"
노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로봇의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구만. 나는 예전에 로봇을 만들던 사람이었어. 그때는 이런 로봇들이 나올 줄은 몰랐지."
수아는 놀라며 물었다.
"정말요? 어떤 로봇을 만드셨나요?"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만든 로봇들은 주로 공장에서 쓰였어. 사람들을 대신해 반복 작업을 해주던 단순한 기계들이었지. 하지만 그때 만든 로봇들이 이제 이렇게 병원에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걸 보니, 참 뿌듯하구먼."
수아는 그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노인은 자신이 만든 단순한 로봇이 이제 병원에서 인간의 삶을 돕고 있는 모습을 보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세요. 그 로봇들이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어요."
노인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만든 로봇들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직접 도움을 받으니 감회가 새롭네. 그동안 내가 해온 일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어."
수아는 그와 함께 걸어가며 뿌듯함을 느꼈다. 비록 그녀는 로봇을 통해 사람들을 돕는 일이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 노인의 말이 그녀에게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제가 계속 안내해 드릴게요." 수아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노인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수아는 자신이 로봇을 통해 단순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수아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더욱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날, 수아는 다시 호출 알람을 받았다. 이번에는 한 여학생이 병원 로비에 서 있었다. 배가 불룩해져 있었고, 그녀는 산부인과를 찾고 있는 듯했다. 수아는 원격으로 접속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산부인과를 찾으시나요?" 수아는 부드럽게 물었다.
여학생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처음 와봐서요. 산부인과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수아는 로봇을 통해 길을 안내하며 말했다.
"제가 함께 가드릴까요?"
산부인과로 가는 길 동안, 여학생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임신한 걸 부모님께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아직 저도 너무 혼란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수아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공감하며 답했다.
"많이 걱정되시겠어요. 하지만 아기와 자신의 건강을 위해 검진을 받으셔야 해요. 나중에 천천히 상황을 정리해보세요."
여학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기가 건강한지 확인하고 싶어요. 그게 제일 걱정돼요."
수아는 산부인과 문 앞에 도착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기가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여학생은 수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들어갔다. 수아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도 뱃속에 있는 아이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순간, 수아는 두려움 대신 새로운 생명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이 점점 커져감을 느꼈다.
6장: 닫힌 문과 열린 마음
수아는 로봇을 통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이어가며 조금씩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하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남편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도 재현과의 대화는 여전히 짧고 무심했다.
수아는 몇 번이나 용기를 내어 먼저 대화를 시도했지만, 재현은 그럴 때마다 피곤하다며 대화를 피했다. 한 번은 간신히 저녁 식사를 준비해 그와 함께 앉았지만, 그는 숟가락을 들고 잠시 먹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미안해. 오늘은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냥 쉬어야겠어."
수아는 실망한 마음을 감추며 말했다.
"그래... 푹 쉬어."
재현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수아는 홀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 끼적거리며 밥을 먹던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어느 날은 수아의 생일이었다. 재현은 늦은 시간 작은 케이크를 사서 집에 들어왔다. 수아의 방 앞에 케이크를 두고 조용히 노크했다.
"수아, 생일 축하해. 케이크 놓아뒀으니까 꼭 먹어."
그의 말에 수아는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다. 재현이 돌아서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후, 수아는 문을 열고 작은 케이크를 손에 들었다. 방 안에서 케이크를 바라보며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왜 이렇게 차갑게 대하면서도 챙겨주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어."
그녀는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슬픔과 고마움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그녀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미워하려 해도 미워할 수 없는 마음에 혼란스러웠다.
7장: 진실과 화해
며칠 후, 수아는 로봇을 통해 근무하던 중 또 다른 호출 알람을 받았다. 그녀는 화면을 확인한 순간 깜짝 놀랐다. 화면에는 남편 재현의 얼굴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우리 병원에...?" 수아는 순간 당황했다.
수아는 원격으로 접속해 로봇을 통해 재현을 맞이했다. 재현은 피곤한 얼굴로 로비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수아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재현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채 답했다.
"신경외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수아는 그가 왜 병원에 왔는지 궁금했지만, 차분하게 안내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제가 함께 안내해 드릴까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수아는 재현의 모습을 보며, 그의 몸 상태가 예전과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재현의 눈가에는 피로와 어딘가 깊은 고민이 스며들어 있었다. 수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재현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다지 좋지 않아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수아는 그의 옆에서 마음이 무거웠다.
"가족분들은 알고 계신가요?"
재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어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수아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대답했다.
"아내 분께서는 분명히 당신을 많이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재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도 요즘 많이 힘들어 보여서요."
수아는 그가 차갑게 굴었던 이유를 이제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요? 혼자서 이겨내기엔 너무 힘든 일이잖아요."
재현은 잠시 침묵했다가 낮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얼마전 시한부 판정을 받았어요. 그녀에게는 말하지 못했어요. 혼자서 이겨내려 했는데, 점점 힘들어지네.."
수아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왜... 왜 말하지 않았어요?"
재현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녀에게 짐이 되기 싫었어요. 내가 사라지면 그녀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에요."
그 순간, 병원 스피커에서 재현의 이름이 불렸다.
"김재현 님, 신경외과 3번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재현은 로봇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당신과 이야기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어요."
수아는 그가 진료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복잡한 심정에 빠졌다. 그녀는 그가 혼자서 너무 오랫동안 힘들어했음을 깨달았고, 이제 더 이상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8장: 진실을 마주하다
수아는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원격 제어 장치를 벗어 던지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오랜만에 보는 병원 입구를 지나, 익숙한 로비와 복도를 달렸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진료실 앞에 도착한 수아는 조종하던 로봇과 마주 보았다. 차가운 금속 외관 속에서 수아는 복잡한 감정으로 몸을 떨었다.
"당신이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었는데도 난 아무것도 몰랐어..."
그녀는 로봇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고마워. 네 덕분에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어."
그 순간, 로봇의 눈이 깜빡였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듯했다.
진료실 문이 열리고, 재현이 피곤한 표정으로 걸어나왔다. 수아는 그를 보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수아...? 어떻게 여기..." 재현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아는 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당신이 그렇게 힘들어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제는 나 혼자 모른 척하지 않을게. 우리 함께 이겨내요."
재현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알아줘서 고마워..."
수아는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혼자 아파하지 마요. 내가 함께할게."
재현은 수아의 눈을 보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래, 우리 함께하자. 이제 나도 너에게 더 솔직해질게."
그 순간, 수아의 뱃속에서 태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재현의 손을 자신의 배로 이끌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이도 함께 이겨낼 거야."
재현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이야?"
수아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우리 셋이서 함께 이겨내요."
에필로그
몇 달 후, 재현은 의사로부터 마지막 진단을 받았다.
"현재의 의학으로는 더 이상 치료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새로운 연구에 참여하시면 의식을 유지하며 가족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재현은 무겁게 물었다.
"어떤 연구인가요?"
의사는 설명했다.
"뇌를 인공지능 시스템에 연동하여 의식을 유지하는 연구입니다. 아직 실험 단계이지만, 가족과의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재현은 잠시 고민했다. 수아와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상관없었다.
"참여하겠습니다." 재현은 결심을 굳혔다.
몇달간 진행된 수술이 끝나고 재현은 인공지능 시스템에 연동되어 병원 로비에 설치된 안내 로봇의 눈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차가운 금속 외관 안에서 사람들과 다시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수아와 그녀의 배에서 태어난 아이가 병원을 찾았다. 수아는 로비에서 안내 로봇을 바라보며 걸어왔다. 로봇의 눈에 작은 빛이 깜빡였다. 재현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수아, 다시 만났구나."
수아는 로봇 앞에 서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로봇의 눈에는 그녀를 향한 따뜻한 빛이 깜빡였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재현은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안에는 그녀를 향한 깊은 사랑이 담겨 있었다.
수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이에요. 우리 함께 산책할까요?"
로봇은 부드럽게 움직이며 수아와 아이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아이는 로봇의 손을 잡고 깔깔 웃으며 즐거워했다.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수아는 기쁘게 웃었다.
"아빠랑 노는 거 너무 재미있어!" 아이가 소리치며 로봇의 손을 잡고 뛰어다녔다.
수아는 놀란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니?"
아이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냥 느낌이야!"
수아는 아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참았다. 아이의 말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이가 그 어떤 말보다도 아버지의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새로운 가족으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재현은 로봇의 시선 속에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수아와 아이가 만들어갈 미래를 응원했다. 비록 그의 몸은 사라졌지만, 그의 의식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였다.
수아는 재현과의 새로운 소통 방식을 받아들이며, 그와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매 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삶이란 육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두 깨닫게 되었다.
재현은 마지막으로 마음속으로 말했다.
"내가 사라지더라도, 우리 가족은 언제나 함께할 거야."
로봇의 눈에 깜빡이는 빛이 다시 한 번 작게 흔들렸다. 그 안에는 여전히 재현의 사랑이 담겨 있었다.
끝
출처 | https://youtube.com/shorts/sWnZ_DL3utk?si=i5HLSeIzBa_jgRJ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