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얀 쪽방 (White Box)
작가: Chromosome
원문: http://www.fimfiction.net/story/20116/1/White-Box/White-Box
Part 2/4: http://todayhumor.com/?pony_15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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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에 눈이 따가웠다.
전등은 언제나 눈이 부시게 밝았다. 언젠가 간수에게 불을 낮춰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무시했다가 조르자 거칠게 뿌리쳤다. 전등은 아직도 너무나도 밝다. 불빛이 하얀 쪽방의 벽에 반사되어 눈을 찌른다.
항상 이렇게 밝았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침대 건너편 벽까지 몇 발자국 거리인지 아까 전에 분명 세본 것 같았지만, 그 마저도 기억나지 않는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한 느낌에 벌떡 일어났다. 내 이름? 내 이름?! 침대에서 굴러나와 안절부절하며 방의 반대쪽 구석으로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찌르는 듯한 불빛에 눈을 찡그려 벽에 거칠게 새겨진 자국을 힘겹게 읽었다.
캔버스. 캔버스. 캔버스. 머리에 조금이라도 오래 담기기를 바라면서 단어를 되뇌었다. 아니, 단어가 아니지. 이름이었다.
캔버스. 내 이름은 캔버스다. 소리 내서 말해보려고 했지만, 말라 갈라진 신음 소리만이 흘러나왔다. 목에 낀 먼지를 기침으로 뱉어내고 다시 말해보았다.
“캔버스.” 목소리에 몸이 움찔했다. 내 목소리가 무섭다. 나 같이 나쁜 포니에게 당연한 일인가. 아무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괜찮을 거란 위로를 받을 자격은 없었다. 여기까지 오는 포니는 다 나쁜 포니니까.
벽에 새겨진 단어를 다시 한번 읽자 마음이 놓였다. 침대로 향하는 동안 속이 빈 뼈다귀 같은 발소리가 벽에 부ㅤㄷㅣㅊ혀 울렸다. 열 두 발자국. 세보고 세보고 그래도 틀렸을까 싶어 다시 세어본 것은 알지만, 그래도 제대로 센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기분이 내키면 다시 세기로 하였다. 이름도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 읽고, 먹고, 마시고, 자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가만히 있어야 했다.
하얀 쪽방 안에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건너편에서 자물쇠와 손잡이가 덜컹이는 소리에 귀가 쫑긋했다. 소리가 나는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에 보았던 곳과 무언가 달라보이는 위치에서 조그만 직사각형 구멍이 열렸다. 구멍 건너편의 無로부터 금속 식판이 비닐에 싸인 먹을 것을 싣고서 미끄러져 쩔그럭거렸다. 구멍은 흔적도 없이 없어졌다.
나와 식판과 하얀 쪽방만이 있었다.
아직 입에 대지 않았다.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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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전부 다! 말대답 할 시간에 어서 끄집어 내!”
“시행하겠습니다. 죄수 167번! 당장 일어나!”
옆구리를 찌르는 앞발굽에 꿈 없는 꿈에서 깨었다. 옆구리보다 귀가 아팠다. 눈을 올려보다 꽉 끼는 하얀 조끼를 입은 페가수스 간수의 험한 눈과 마주쳤다.
“일어나라니까!” 화난 간수가 다시 외쳤다. 다시 옆구리를 찌르는 통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네발로 섰다.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시끄러웠다.
비몽사몽간에 방 구석에 있어야 할 벽 대신, 식판이 들어올 때보다 크게 열린 구멍이 보였다. 구멍 밖으로 밀쳐지는동안 나를 밀치는 간수를 그대로 베낀듯 한 다른 간수가 서서 나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쪽방 밖을 나서면서 간수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난리통에 머리가 아팠다. 이런 데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바깥은 간수들이 “점호실”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다른 하얀 쪽방이 내 하얀 쪽방과 함께 늘어서 붙어있는 큰 하얀 쪽방이었다. 바깥 불빛은 쪽방 안보다 덜 밝아 약간 나았다. 하지만 더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다른 포니들이 서있는 줄로 밀쳐졌다. 옆구리에 기타 모양이 박힌 숫말이 보였다. 이름은 스무스 송(Smooth Song)이라 했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슬픈 눈에 천이 입을 가렸다. 언젠가 자기는 음악을 연주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무얼 어떻게 했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옆구리가 휑한 숫말이 보였다. 크고 잘 생긴 얼굴과 몸에는 쪽방처럼 하얀 색이 덮여있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간수들이 알비노 유니콘이라던가 불렀던 기억이 났다. 쳐다보기 무서운 눈매는 안대로 가려져 있었다.
내 옆의 암말은 포르테(Forte)라 했다. 한번도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만난 기억은 있었지만 언제 만난 것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이 나려고 하는 것 같은 때 간수 하나가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다들 주목!” “잘 들어라! 오늘 너희 자식들을 보러 오시는 분이 있으니까 정중하게 대해드려라! 안그러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줄 알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간수가 먼저 묻지 않는 한 입을 다무는 것이 나았으니까. 그런데 “더 힘들어진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힘들어할 게 있었던가?
소리 지르던 간수가 만족스러운 듯 흥 소리를 내며 들어오는 포니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쪽방과 같은 하얀 색이 아니었다. 벌써부터 꼴 보기 싫어졌다.
단정하게 자른 단발 머리에는 색깔이 다른 숱이 나있었고, 머리칼 가운데 뿔이 솟아있었다. 하얀색 등자 가방에는 전에 본 적이 없는 이상한 문양이 박혀있었다. 보면 볼수록 보기 싫어졌다. 줄 서있는 우리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 건너편의 하얀 벽을 바라보느라 못본 체 했다.
“이 분은 트와일라잇 스파클 양이시다.” 간수가 이상하게 생긴 포니를 소개하며 소리 질렀다. “위대하신 셀레스티아 공주님의 수제자시다. 무슨 이유에서든 간에 너희같은 놈들과 만나기 위해 귀중한 시간을 투자하셨으니 크나큰 영예로 알아라. 정중하지 않게 대했다는 말이 내 귀에 들리지 않도록 해라.“
“그러니까,” 간수가 기침을 하고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앞으로 너희들을 만나러 방에 직접 찾아오신다는 뜻이다. 질문을 하시면 제깍 대답하고! 궁금하신 게 있으면 바로 말씀드린다! 알았어?”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소리 지르던 간수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떡이며 흥 소리를 냈다. 마치 비밀리에 신호를 받은 듯 다른 간수들이 일제히 무리를 쪽방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소리 지르던 간수와 대화하고 있는 새 포니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쪽방과 같은 하얀 색이 아니었다. 내 방에는 오지 않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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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렀다. 잠시나마 이상한 포니에 대해 잊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방 구석이 열리면서 간수가 들어왔다. 발자국 수를 세고 있던 내게 고개를 까딱이면서 말 없이 침대에 앉으라고 시켰다. 시키는대로 하자 수갑을 꺼내더니 한 쪽을 앞발에 채우고 다른 쪽을 침대 기둥에 걸었다. 다른 쪽 벽으로 비켜서서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동안, 트와일라잇 스-뭐시기 하는 이상한 포니가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를 향해 억지 웃음을 짜내고서 잠시동안 가만히 있었다.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있던 간수에게 살짝 고개를 끄떡이자 마지못한 듯 방을 나섰다. 그가 무슨 채소 이름을 중얼거리는 동안 등 뒤로 방이 닫혔다.
나와 보기 싫은 포니와 하얀 쪽방만이 있었다.
불빛에 눈이 따가웠다.
그녀가 방을 둘러보는가 했더니 나와 시선이 마주치가 예의 그 억지 웃음을 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방 건너편 벽까지 몇발자국인지 미처 세보지 못한 숫자가 무엇일지를 생각했다. 그녀가 먼저 말을 열었다.
“아... 안녕하세요! 트와일라잇 스파클이라 해요! 그 쪽은...” 그녀가 무언가에 집중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의 뿔을 밝히고, 등자 가방에서 메모장을 띄워 눈 앞으로 올려 종이를 넘겼다. “아! 죄수 번호 167번님 맞으신가요?”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 쪽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어색한 듯 기침을 하고서 종이를 한장 더 넘기고는 하얀 쪽방 바닥에 앉았으면서 가방에서 펜을 꺼내 띄웠다. “그러면 간단한 질문부터 시작할게요.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 본격적으로 대화라는 것을 해보려는 듯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소리 지르던 간수가 하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좋아요” 내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지만, 밖으로 내비치지 않았다. 앞발을 바라보면서 빨리 질문을 끝마치기만을 기다렸다.
“좋다고 하셨나요? 그러면... 167번님, 여기 오시게 된 이유를 말씀하시겠어요?” 그녀가 내 말투에 감을 잡지 못했는지 계속 물었다.
“무언가 나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나쁜 일이요? 무슨 일인지 기억 나시나요?”
“아뇨.” 사실 그대로 말했다.
“어떻게 오시게 되었는지를 기억 못하실 수도 있나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기억이 안나면 기억이 안나는 것인데 더 설명하라는 것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계신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목소리가 조금 굳어진 것이 들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얼마나”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앞머리를 훅하고 불면서 코를 찡그렸다.
“그러면 여기 오시기 전에 무얼 하셨는지는 말씀하실 수 있나요?” 짜증을 감추려 하지도 않고서 물었다.
무슨 질문이 그런지, 대체 어떻게 답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전혀 가지 않았다. “전에”이라니? 언제나 하얀 쪽방만 있었는 것을. “여기”라니? 하얀 쪽방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말도 되지 않는 말을 지껄이는 통에 안그래도 보기 싫었던 것이 더더욱 보기 싫어졌다. 빨리 나가주기만을 바랬다.
그래서 “아니오”라 답했다.
안되겠다는 듯 한숨을 푹 쉬더니 또다른 질문을 하는가 싶었지만, 짜증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서 펜과 메모판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구석 벽을 두드려 구멍이 열리더니 방에서 사라졌다. 간수가 들어와 수갑을 풀고 방을 나섰다. 나와 하얀 쪽방만이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까 세다 만 발걸음을 다시 세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