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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누수 (4)
게시물ID : freeboard_20339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노일만
추천 : 0
조회수 : 78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4/10/19 12: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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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노일만 단편선: 누수 (4)


그날 저녁까지 규태가 겪은 일들은 일일이 다 열거하기 어렵다. 그저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모든 신병들이 자대 전입 첫날밤에 겪었을 수모와 고통을, 규태가 그날밤 거의 다 겪었다는 정도로만 말해둔다.

저녁때가 되자 꼬맹이가 불쑥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제 뭐지. 난 뭐해야 하는 거지.

사리가 말했다.

“렛츠 겟 아웃.”

으잉? 규태는 이게 뭔가 싶어서 벙쪘지만 사리의 단호한 태도에 따라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사리는 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마이바흐에 다시 규태를 태운 사리는 시내로 갔다. 그리고 식당에 들어가 규태에게 중국 요리와 중국 술을 사주었다. 기름진 음식에 뜨거운 백주가 들어가니 몸이 좀 풀렸다. 규태는 그제야 긴장이 좀 풀리는 것을 느끼며 꼬맹이가 어디로 간 거냐고 물었다.

“히 고 투 베드. 잇츠 레이트.”

시계를 보니 밤 10시였다. 아… 초딩은 잘 시간이었구나. 규태는 새삼 꼬맹이가 얼마나 어린놈의 새끼였는지 실감했다.

“왓 어바웃 마이 드래곤볼?”

규태가 묻자 사리가 말했다.

“투모로우. 위 고 어게인.”

그렇구나. 중국의 비지니스란 이런 것이구나. 차근차근, 주변부터 훑어가며, 관계부터 만들어가며, 사람을 병신 만들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악마 새끼와 또 놀아야 한다는 건 끔찍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든 6성구를 손에 넣어야 했다. 놈이 발바닥을 핥으라고 한대도, 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다음 날 꼬맹이와의 한바탕 놀이가 또 시작됐다. 오늘 종목은 사냥이었다. 꼬맹이는 정원으로가 ATV를 꺼내왔다. 그걸 타고 규태를 쫓아오면서 비비탄총을 난사하는 거였다. 

규태는 짐승 우는 소리를 내며 정원을 뛰어다녔다. 비비탄총인데 뭘 어떻게 개조라도 한건지, 맞으면 허벌나게 아팠다.

점심은 꼬맹이네 집에 있는 식당(100명쯤 앉을 수 있는)에서 먹었다. 요리사가 솜씨가 무척 좋아, 밥 먹는 시간만큼은 규태도 좋았다. 꼬맹이가 계속해서 규태의 얼굴을 향해 땅콩을 집어 던져 좀 짜증이 나긴 했지만.


밥 먹고 차를 한잔 마신 뒤, 꼬맹이는 다시 심심하다고 했다.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즐거운거지 이 새끼는.’

사리도 나도 말이 없자 꼬맹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또 얼마나 끔찍한 발상을 하는 거지… 잠시 후 눈을 번쩍 뜬 꼬맹이가 말했다.

“워먼 다두 바.”

꼬맹이는 방안에 있는 전화기를 집어 들고 뭐라고 떠들었다. 그러자 잠시 후 이 저택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이 뭔가를 가지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규태가 살펴보니 그건 룰렛이었다. 꼬맹이가 규태를 향해 뭔가를 말하자, 사리가 통역했다.

“유 플레이 룰렛. 이퓨 윈, 유 겟 드래곤볼. 이퓨 루즈, 위 컷 유어 핑거.”

“와, 왓?”

제대로 들었다면 정말 끔찍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룰렛을 해서 이기면 드래곤볼을 주고 지면 손가락을 자른다니! 

“원 투 써티 식스. 유 추즈.”

꼬맹이이가 사리의 영어를 빌려 말했다. 

“웨, 웨잇.”

룰렛에는 여러가지 방식이 있었다. 빨강이나 검정 중에 고르는 방식도 있었고 1~18이나 19~36에 거는 방법도 있었다. 이런 것들은 이길 확률이 2분의 1였다. 해볼만 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놈은 1부터 36중에서 숫자 하나를 찍으라고 했다. 카지노에서 배당을 가장 높게 쳐주는 류의 베팅이었다. 다만 승률이 36분의 1밖에 안되었다. 바꿔 말해, 36분의 35 확률로 손가락이 날아간다는 얘기였다.

규태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지금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 아닌가? 왜 내가 북경의 한 대저택에서 싸가지 없는 꼬맹이랑 룰렛을 하려는 거지? 그것도 손가락을 걸고? 애초에 내가 원한게 뭐였지? 누수?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문제였나? 손가락 걸고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맞았나? 우리집에 누수이 그렇게 심했나? 그냥 잠깐 좀 쿵쿵댄 거 아닌가?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지? 맞지? 지금 짐 싸서 이 집에서 나가야 돼지?

그때 갑자기, 모락산 정상에서 들었던 음성이 떠올랐다.


한번 해볼까? 그렇게 생각을 바꿔보자 머릿속에 숫자가 하나 떠올랐다. 

36.

계시였다. 모락산의 신선이 내게 힌트를 주는 것 아닐까… 그래. 한번 해보자! 규태는 칩을 집어 36에 힘차게 내려놓았다.

“하하하.”

꼬맹이가 웃으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시중 드는 사람들 중 장갑을 낀 사람(집에 딜러가 있어?)이 노련한 솜씨로 룰렛을 돌렸다.

타다다다다다다…. 구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작아졌다. 왜 작아지나했더니 내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거기에 소리가 묻히는 거였다. 쿵쾅쿵쾅 심장이 폭주기관차처럼 뛰었다. 구슬 돌아가는 속도가 점차 줄어들고 모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룰렛의 회전이 거의 멈추고, 구슬이 마침내 멈췄다.

“얼 쉬 지올라!”

“잇츠 트웬티 나인!”

꼬맹이와 사리의 말에 규태가 눈을 부비고 다시 한 번 룰렛판을 바라봤다. 29였다.

“시발!”

규태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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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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