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하나 주세요." "2500원입니다." 퇴근 후, 집 앞 편의점에 담배를 하나 사려고 들렀습니다. 알바 학생의 2500원이라는 말에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찾는데 지갑이 없는 겁니다. 양복 안 주머니부터 바지 뒷주머니까지 샅샅히 찾아도 지갑은 없었습니다. "아, 죄송해요. 다음에 살께요." 편의점을 나와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회사에 놓고 왔나? 아니지. 지하철 개찰구에서도 지갑채 삑 찍었는데. 그럼 어디에?' 제가 원래 잘 잃어버리고 다니는지라 아내에게 많이 혼나곤 했었는데 오늘도 불꽃싸다구를 맞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아니,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일단 카드 분실 신고부터 하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일단 아내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거 말은 해야겠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겁니다. 아내는 역시나 뭔가 냄새를 맡았는지 킁킁거리며 저를 탐문합니다. "당신, 뭐 할 말 있어요?" "으...응? 저...저기 그러니까..." "또 무슨 사고쳤죠?" 뭐, 눈치 100단 아내에게 안 걸린다면 그 날은 로또라도 사야 되겠지만 그건 거의 로또 2번연속 1등 맞는거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저기 지...지갑을 잃어버렸어요." "네? 지갑이요? 어쩌다가요?" "그...그게 분명히 지하철역에서도 있었는데, 그러니까 그 후에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갔는..." "당신, 저번에도 핸드폰 잃어버려놓고 이번에는 지갑이에요?" 10분동안 아내 입에서, 제가 잃어버렸던 물건들이 계속 흘러 나옵니다.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거까지 무슨 가래떡 뽑아내듯 쭉쭉 나옵니다. 민정이는 TV를 보다가 엄마가 아빠를 혼내고 있으니 불쌍한 표정으로 다가옵니다. '그래, 민정아. 아빠를 도와다오. 아빠도 민정이가 혼날 때 많이 도와줬었잖냐.' "아빠, 지갑 잃어버렸어?" "그래! 으이구, 이번엔 지갑이시란다." "아빠는 더 혼나야 돼!" 헛. 이게 아닌데. 민정아! 이럴때 얼라이를 푸는 게 어딨어! "그래도 민정이가 당신 안 닮아서 다행이에요. 민정이는 자기 물건 잘 챙기잖아요." 그렇게 아내의 잔소리를 들으며 그날밤은 깊어만 갔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 냉장고에 물을 꺼내 마시려는데 식탁에 쪽지가 놓여있습니다. "뭐지?" 반쯤 접힌 쪽지를 펼쳐드니 천원짜리 몇장과와 동전 몇개가 떨어집니다. ----------------------------- 아빠! 지갑 잃어버려서 어떡해. 이거 내 비상금인데 아빠가 써. ----------------------------- 헛. 여기까지 읽고 이게 꿈인가? 내가 잠이 덜깼나? 볼을 꼬집기 까지 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천원짜리 네장과 백원짜리 여섯개. 지갑을 잃어버린 데미지와 아내에게 혼난 정신적 데미지가 마치 메딕의 레스토레이션을 쓴 것처럼 깨끗하게 날아 가버렸습니다. 4600원을 손에 쥐고 벅찬 감동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 이 돈은 내게 너무나도 빛나고 너무나도 큰 돈이라 쓸 수 없을 거 같았습니다. 마저 쪽지를 읽어내려갔습니다. ----------------------------------------------- 6600원이 있는데 2000원 뺐어요. 저번에 아빠가 통닭 시킬 때 2000원 모자르다고 나중에 준다고 해 놓고 안 준거 뺀거야. 아빠! 물건 잘 챙기고 아빠랑 민정이 둘 다 이제 엄마한테 혼나지 말아요. 아빠! 사랑해요! ------------------------------------------------ 헛. 저번에 민정이가 통닭 먹고 싶다 그래서 시켰는데 2000원이 부족한겁니다. 민정이한테 나중에 줄께하고 빌려 놓고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약속도 못 지킨 아빠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장실에서 나온 아내가 민정이의 쪽지를 보더니 제게 말합니다. "아니, 당신 지난번에도 일요일에 민정이랑 자전거 타러 간다고 그래놓고서는..." 약속 못 지킨 일들이 또 아내 입에서 가래떡 뽑아내듯이 쭉쭉 나옵니다. 4600원을 손에 쥐고 출근을 하며 뿌듯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이따가 퇴근하며 통닭집에 들러야겠습니다. -출처: 다음 아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