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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이광리의 대완국 원정
게시물ID : history_155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4
조회수 : 214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28 12:40:02

초 원년(기원전 104년) 8월에 무제는 한혈마를 얻기 위해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에게 6천 기마병과 군국의 백수건달(惡小年) 수만명을 거느리게 하고 대완국을 향해 출격했습니다[1]. 식량은 도중에 작은 나라들을 공략하여 징발할 예정이었지만 도상의 소국들의 방어가 튼튼해서 점령하지 못하고 간신히 대완의 동쪽 욱성(郁城)에 당도했을 때 남은 병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게다가 그 상태에서 대원군의 공격까지 받아 이광리의 서정군(西征軍)은 다음해인 태초 2년(기원전 103년)에 간신히 돈황에 철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광리는 무제에게 글을 보내 고하였습니다.

 

 

「길은 멀고 식량은 거의 떨어졌으니, 병졸들은 싸움을 걱정하지 않고 굶주림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군사가 적어 대원을 함락시키기에는 부족합니다. 바라옵건대 잠시 병력을 거두고 새로 증강하여 다시 나가게 해주시옵소서.」

 

 

이광리의 글을 보고 대완 원정이 실패한 것을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사신을 보내 옥문관을 막고 이광리에게 말하였습니다.

 

 

「군사로서 감히 들어오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

 

 

무제의 엄명에 이광리가 옥문관(玉門關)을 넘지 못하고 돈황에 머무르며 재원정을 준비했습니다.

 


역시나 재원정의 주축이 된 병사들은 1차원정 때와 마찬가지인 사면된 죄인들이나 건달들이었습니다. 죄수들 가운데 재관(材官: 전한 무렵 지역적 특징을 이용하여 각 병단을 훈련시켰는데, 그 중 평원과 산조 지역에서 훈련한 병졸들을 재관이라 하였습니다.)의 죄를 용서해주고 더 많은 불량한 자들과 변경의 기병들을 징발하였습니다. 그들의 수는 6만에 다다랐으며, 저번 원정에 실패를 뼈저리게 알고 있는 이광리는 1차 원정에서 처럼 적지에서 보급을 해결한다는 작전을 버리고 10만 마리의 소와 3만여 마리의 말, 각각 수만의 당나귀와 낙타, 노새 및및 대량의 양식과 무기를 준비했습니다. 게다가 혹시 모를 후방 공격에 대비하여 정규병 18만이 내군(內郡)에서 하서(河西) 땅으로 배치해주천과 장액 북쪽으 수비하게 하고, 거연(居延)과 휴도(休屠) 두 현을 새로 설치하여 주천을 방위하게 하였습니다. 또 이광리의 서역 원정군의 보급을 위해 7과적(七科謫)[2]이 징발되었습니다. 그리고 말(馬)에 정통한 사람 두 명을 집구교위(執驅校尉)로 임명하여 좋은 말을 고르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이렇게 꼬박 1년간 준비한 끝에 이광리의 대원 원정군은 태초 3년(기원전 100년)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진군 역시 이광리가 원정군의 수가 너무 많아 보급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해서 군사를 몇개 부대로 나누어 남쪽 길과 북쪽 길로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2차 대완 원정은 1차 원정보다 순조로웠습니다. 저번과는 달리 작은 나라들의 저항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식량을 공급해주었습니다. 오직 윤두만이 저항을 했는데, 이광리는 며칠을 공격하여 윤두를 멸망시켰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순조롭게 진군하여 이광리의 원정군은 대완의 수도 부근의 욱성에 당도했습니다. 이 때 도착한 한나라 군사는 3만 명이었습니다. 처음에 대완의 군사들은 한나라 군사를 맞아 싸웠지만 패배하여 나중에는 성 안에 들어가 방어전에 치중했습니다. 이광리는 서둘러 욱성을 치고 싶었지만 욱성 공략에 시간을 지체하면 원정군이 불리해짐을 알고 서둘러 대완성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이광리는 수리기술자를 동원하여 대완성의 수원을 끊어 물이 흐르는 방향을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겹겹이 대완성을 포위하여 40여 일 만에 그 외성(外城)을 함락시키고 대완의 귀인 중에 용장(勇將)인 전미를 사로 잡았습니다. 대완의 군사들은 내성으로 퇴각했습니다. 남은 대원의 귀인들은 서로 상의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나라가 대완을 치는 이유는 우리 왕인 무과(毋寡)가 좋은 말을 감추어 두고 한나라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지금 왕 무과를 죽이고 좋은 말을 내놓으면, 한나라 군사는 분명히 포위를 풀게 될 것이다. 설사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그때 가서 힘껏 싸우다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대원의 귀인들을 그것이 옳다고 여기고 그들의 왕인 무과를 죽이고 귀인 한 사람이 그 머리를 가지고 이광리에게 가서 약속하며 말했습니다.

 

 

「한나라는 우리를 치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좋은 말을 있는 대로 모두 내어 마음대로 골라 가도록 맡기고, 또 한나라 군사에게 식량을 공급하겠습니다. 만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좋은 말을 모조리 죽여버릴 것이며, 그리고 강거의 구원병이 곧 도착할 것입니다. 도착하게 되면 우리 군사는 성 안에 있고, 강거의 구원병은 성 밖에서 한나라 군사와 싸울 것입니다. 한나라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쪽을 따르겠습니까?」

 

 

이때 강거의 후(候: 정찰병)는 한나라 군사의 형편을 살피고 있었는데, 한나라 군이 여전히 강성해서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광리는 조시성, 이차 등과 상의하며 말했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대완성 안에서는 최근에 진(秦: 한나라 사람을 말합니다. 이 당시 서역인들을 중국을 진秦이라고 불렀습니다.)나라 사람을 찾아내서 우물을 파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성 안에는 식량이 아직도 많다고 한다. 우리가 온 것은 괴수인 무과를 베어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 무과의 머리는 이미 와 있는데, 그래도 군사를 풀지 않는다면, 대완은 성을 굳게 지킬 것이고, 강거가 우리 군사가 지친 것을 엿보고 있다가 대완을 구하러 오면 우리 군사가 무너질 것은 분명하다.」

 

 

이광리의 말에 다른 장수들은 그러리라 생각하고 대완의 약속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대완은 이에 좋은 말을 꺼내와서 한나라 군사에게 마음대로 고르게 하였고, 많은 식량도 가져와서 한나라 군사에게 제공해주었습니다. 한나라 군사는 좋은 말 몇십 필과 중등 이하의 암수 3000여 필을 고른 다음 대완의 귀인 가운데, 매채(昧蔡)를 대완왕으로 세우고 함께 맹약을 한 후에 군사를 거두었습니다. 이리하여 끝내 중성(中城)으로는 들어가지 못한 채 전쟁을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한편 이광리를 비롯한 원정군 본대가 대원을 굴복시킬 때, 교위 왕신생(王申生)과 홍려(鴻臚: 외국 빈객을 접대하는 벼슬)였던 호충국(壺充國) 등 1000여명은 따로 떨어져 욱성에 이르렀습니다. 욱성은 성을 굳게 지키며 그들에게 식량을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왕신생은 본군의 위세에 힘입어 욱성에 식량 제공을 요구했지만 욱성에서는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왕신생의 군대가 줄어듬을 알고 그들을 공격하여 왕신생 등을 죽이고 그들의 군대를 무찔렀습니다. 몇몇 살아남은 병사들이 본군에 돌아왔습니다. 이광리는 수속도위(搜粟都尉) 상관걸(上官桀)을 시켜 욱성을 함락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상관걸은 욱성을 함락시키고 욱성왕은 강거로 도망치고 상관걸은 그를 쫓아 강거에 이르렀습니다. 강거는 한나라가 이미 대원을 깨뜨렸음을 알고 있었기에 욱성왕을 상관걸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상관걸은 네 명의 기사에게 욱성왕을 묶고 감시하여 이광리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네 명의 기사가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욱성왕은 한나라가 싫어하는 사람인데, 지금 산 채로 데리고 가다가 갑자기 뜻밖의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했는데도 서로 먼저 죽이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기사들 중 가장 어린 상규의 기사 조제(趙弟)가 칼을 뽑아들어 욱성왕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들고 갔습니다. 

 


한편 이광리의 2차 대원 원정이 진행되고 있었을 무렵, 무제는 오손에게 사신을 보내 군사를 동원하여 힘을 합쳐 대완을 치자고 했습니다. 오손은 2000기의 기병을 보내 출정했지만 망설이며 전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광리가 대완을 정복하고 돌아오고 있을 때 도중의 여러 작은 나라들이 항복한 것을 들었기에 그들은 그 자제들을 한나라 군에 딸려 보내 공물을 바쳤습니다. 마침내 원정을 끝내고 이광리의 원정군이 태초 4년(기원전 101년)에 옥문관에 도착했을 때, 남은 군사들은 만여 명이었고 군마는 1000여 필 정도였습니다. 비록 철저한 준비를 했지만 장수와 관리들의 부정으로 군량이 많이 빼돌려져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1] 무제가 대완원정에 총책임에 이광리를 임명한 것은 당시 무제의 총애를 받다가 죽은 이부인(李夫人)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부인은 황후 위자부가 50세를 넘겨 그녀를 대신해서 무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부인이 왕자 한 명을 남기고 짧은 생애를 마치자 무제는 슬퍼하며 이부인의 일족에 대해 은혜를 베풀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부인의 형제들은 아직 서민이었기에 무제로써는 이들에게 작위를 주기 전에 이 작위를 줄 만한 명분 즉 공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부인의 오빠인 이광리가 이사장군에 임명되어 대원원정의 총책임을 맡게된 것입니다.



[2] 7과적(七科謫) : 7종의 죄인과 같은 천민입니다. 제1은 관리로써 죄를 범한 자이고, 제2는 망명한 자(본적지에서 이탈한 자), 제3은 췌서(贅壻). 스스로를 데릴사위로 팔아 노비가 된 자, 제4는 고인(賈人: 상인), 제5는 원래 상인이었던 자, 제6은 부모가 상인이었던 자, 제7은 대부모 즉 조부모가 상인이었던 자입니다.




* 출처: 사기 대원열전, 중국의 역사 '진한사', 한무제

[출처] (덧붙이는 글) 이광리의 대원국 원정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작성자 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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