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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개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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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uphony
추천 : 5
조회수 : 100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28 18:22:27
St.Peter4.jpg


상트 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는 202년간(1712-1728, 1732-1918)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도시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유럽화를 계획, 추진한 표트르 1세에 의하여 계획건설된 도시이며, 그의 개혁방향에 걸맞게 서유럽의 도시계획, 건축술을 큰 부분 참조하여 건설되었으며 이후에도 유럽문화수입의 첨병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왔다.
그렇기 때문에 모스크바가 '전통적인 러시아'를 상징하는 도시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화된 러시아'를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과거 대제국 수도의 위광은 현재에도 남아있는데, 일례로 도시의 행정구역내(Urban proper) 인구규모는 러시아에서 2위, 유럽에서 4위 규모를 형성하고 있는 거대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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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잉그리아'라고 불리는 지역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잉그리아는 중세로부터 바이킹-스웨덴, 독일 기사단, 동슬라브 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거쳐간 지역이다. 중세시대 초기 잉그리아는 스웨드족(오늘날의 스웨덴인)의 통치하에 있었다. 하지만 1019년 스웨드족 왕의 딸이 노보고로드와 키예프의 대공이었던 현자공 야로슬라브 1세에게 시집을 가면서 잉그리아 지역을 혼수선물로 바치게 되고, 이로부터 이후 100년간은 스웨덴과 노보고르드의 중첩지역적인 성격을 가지며 존속하게 되나, 12세기 중엽 노보고로드가 공화국화된 이후 이 지역은 노보고로드의 세력권으로 확실히 편입된다.

이후 400여년간 이 지역에서 노보고로드와 스웨덴, 그리고 독일 기사단 간의 전쟁이 빈번하게 벌어져 이 지역전체를 확고하게 통제하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나 14세기경부터 독일 기사단, 노보고로드의 쩌리화가 가속화되어 지역쟁탈세력의 대열에서 이탈하는 대신, 각각 독일 기사단과 노보고로드를 흡수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러시아가 새로운 지역쟁탈세력으로 등장한다.

다만 이러한 잉그리아 주변세력들의 혼란기가 도래하면서 상대적으로 혼란에서 빗겨가있던 스웨덴의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증대한다. 비록 리보니아 전쟁 전후처리조약으로 1595년에 스웨덴이 잠깐동안 잉그리아 지방을 러시아에게 양도하나, 22년만에 잉그리아 전쟁에서 러시아를 쳐바르고 1617년에 이 지역을 재접수한다.
1617.gif



표트르 1세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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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43년간 통치하며 러시아를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군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표트르는 어려서부터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을 전전하며 유럽의 문물을 몸으로 때워가며 습득하였고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는지 러시아의 유럽화를 추진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표트르 1세의 재위기간 북유럽의 판도를 뒤흔든 대북방전쟁이 발발한다. 이 전쟁은 21년간 이어졌으며 러시아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오늘날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은 1703년에 이미 스웨덴의 나이엔 시를 함락시킴으로서 러시아의 수중으로 떨어지는데, 해상진출을 꿈꾼 표트르 대제에게 있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형과 지정학적 위치는 매우 이상적인 그것에 가까웠던 듯 하다. 그는 즉시 4만명의 농노를 동원하여 이 지역에 도시건설을 시작하였으며 1712년 완성된 이 도시로 제국의 수도를 이전하게 된다.

훗날 1728년 표트르 2세에 의해 다시 제국의 수도가 모스크바로 이전되나 표트르 2세는 즉위 2년만에 붕어하고 그 뒤를 이은 짜리나인 안나에 의하여 4년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재이전하게 된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917년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혁명세력에 의하여 1918년 수도지위를 박탈당할때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존재한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구조와 문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인구 450만을 수용하는 거대도시이자 문화도시이며,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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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의 위치한 항구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네바 강의 하구에 위치한 도시이기도 하며, 이 강이 도심을 관통하는데 이 강줄기 사이에 형성된 하중도가 42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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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사진에서 우측에 존재하는 섬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최대의 하중도인 바실리에브스키 섬이며 20만명의 인구가 이 섬 내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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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미타쥬(Hermitage) 박물관 : 상트페테르부르크 최대의 박물관이며 단일박물관으로서 세계 최다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기도 하다. 1764년에 예카테리나 대제(짜리나)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건설된 이후 줄곧 점차적으로 확장되어왔으며, 혁명 이후에는 에르미타쥬 주변의 황실 겨울궁과 거처궁과의 합병을 통해 한층 더 규모가 거대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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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450만명이 수용된 도시인만큼 다양한 인프라가 필요하다. 윗 사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역이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특징.







20세기의 상트페테르부르크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러시아 제국이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러시아 사회의 반독감정이 강해지자, 러시아 제국정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사실 이 이름은 독일어식 이름이다.)에서 독일어식 단어인 '상트(Sankt)'와 '부르크(Burg)'를 빼버리고 '표트르의 도시'라는 러시아어식 이름은 '페트로그라드'로 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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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존재했던 레닌 동상>

러시아의 공산혁명으로 인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918년 수도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박탈당하고 '페트로그라드'라는 이름은 개명된지 10년만에 1924년의 레닌의 사망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레닌그라드'라는 명칭으로 개명된다. 러시아 제국 시절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며 역시나 도심지 주변의 외곽에도 유럽에서 가장 큰 슬럼가 중 하나가 조성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 정부는 1920-30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주요도시 외곽의 재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이는 슬럼가를 값싼 공동주택형 아파트(Apartment 혹은 Commie-block / 한국에서 매우 흔히 볼수있는)로 대체하는 것을 그 골자로 한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대체로 성공을 거두어 1930년대 70%의 인구가 문화주택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히틀러의 독일이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잠시 주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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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독일의 기습공격 및 전략적 승리, 그리고 소련 지도부의 무능에 힘입어 독일군은 러시아 평원의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한다. 하지만 동장군의 힘과 소련인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레닌그라드-모스크바 근교-스탈린그라드 라인에서 독일군은 저지당하게 되며, 그 치열한 각축장 중 하나인 레닌그라드에서도 영웅적인 전투가 펼쳐지고 결국 소련군이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독일군에 의한 점령이라는 위험으로부터 해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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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닌그라드 당시의 폐허를 테마로 한 상트페테르부르크 길거리 전시물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광장에 있던 레닌의 동상도 함께 성난 군중에 의하여 무너졌다.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본래의 이름을 되찾게 된다.
비록 연방해체의 충격과 IMF라는 후속타로 인하여 10여년간 경제가 상당히 불안정하였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자원수출과 내부산업진흥으로 인한 러시아 경제의 활황세, 그리고 서구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자본투자의 창구역할을 톡톡히 수행하여 빠르게 경제를 회복하고 있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지만,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머지않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서유럽의 주요도시들의 경제수준을 따라잡을 전망이며 예전의 전통적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차지했던 문화적인 지위도 회복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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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매도시인 대구시가 기증한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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