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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가 좋아하는 한정식 집은 서울 외곽 산기슭에 있었지.
게시물ID : freeboard_20404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압생트.
추천 : 10
조회수 : 1947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25/03/03 04:54:12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집은 차를 타고 멀리멀리 나가야 하는 외곽에 있었지. 주인양반은 약초를 캐러 지리산이며 어디 두메산골을 샅샅이 다니느라 식당에 붙어있지를 않고 반백 머리를 꾸밈 없이 질끈 묶고 생활한복을 입은 사모님이 사진찍으려고 기다리지 말고 음식이 나오는 대로 먹으라, 일갈했더랬다.

순서대로 차려지는 음식들 차례 사이 마치 그림같은 요리 한 접시가 나왔는데 아주 작은 게를 튀겨 띄엄띄엄 두고 접시 윗켠에 유자 소스로 둥근 호선을 그어 달마중 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 요리를 퍽 기꺼워했다. 자랑스레 너무 예쁘지 않냐, 딸을 돌아보던 아버지의 환한 얼굴. 

옛정취어린 음식점들이 그랬듯 식사를 마치면 자리를 옮겨 차를 한 잔 하는 공간이 있었다. 이층이었던가. 다실 한켠에 놓인 기타를 아버지는 손에 들고 현을 퉁겨보았더랬지. 나는 아주 오래전 앨범에 꽂힌 사진을 떠올렸다. 사진 속에 아빠는 20대였고 긴머리를 하고 기타를 들고 돌아보며 웃고 있었다.


8살엔 부친을 여읜 아이였고 10대 어느날은 발작처럼 방을 뒹굴던 소년이었고 20대는 촉망받는 의대생이었고 30대때는 정신병인 와이프와 이혼을 했고 이후 20년을, 정서적으로 망가진 두 딸을 키우다 재혼을 하고 셋째를 낳은 게 딱 쉰이었던 아버지. 60까지 어디에서나 40대 취급을 받았고 본인도 그렇게 사셨다.

칠순이 넘어가자 그때 태어난 아이는 대학생이 되고 
아버지는 이제까지 외면해온 노화가 시작되듯 정신의 모서리들이 둔탁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많이 닮은 나는 그 모습에서 나의 노년을 목도한다. 그러나 난 아버지보다 모자라고 서투르게 늙어갈 것이다. 내가 아는, 또 모르는 아빠의 찬란한 순간을 몇번이고 떠올리면서. 영영 그리워하면서.


이제는 그림을 그리고 약초를 캐던 사장님도 돌아가시고 한정식 집도 없어지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청년같던 아버지도 시간 앞에 노인으로 접어들고 나는 마흔 목전에서 욱신거리는 허리를 술로 잠재우며 지금의 내 나이를 훌쩍 뛰어넘고도 푸르른 나무같던 아버지의 시간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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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삭제]압생트.
2025-03-03 04:56:43추천 0
댓글 0개 ▲
2025-03-03 05:24:14추천 3
잡았다!!!!! 안 주무시는 분, 혹은 일찍 깨신 분!!!

일단, 선 추천 하고 감상하겠나이다~~!!!!!
댓글 2개 ▲
2025-03-03 07:06:04추천 2
아아 다시 읽어도 작가님이 쓰신 수필같아요~~
오늘 대체휴일이니 아버님과 통화한번 해보셔요
저도 작성자님 덕분에 공원에 앉아서
보고싶은 외할머니와의 추억들 떠올리고
았어용!!!
2025-03-03 09:36:07추천 3
저녁 반주 후 졸려와 한숨 찐하게 잤더니 어우 새벽까지 배는 고프지 잠은 안오지 라면끓여 술 퍼마시다가ㅋㅋㅋㅋㅋ 감성에 젖어부렀네요 이따 카톡 한번 드려야겠어요
이른 시간에 공원 산책 가셨나봐요. 날이 많이 풀렸지요? 저희 동네엔 나뭇가지가 물을 머금고 끝이 통통해졌어요. 봄기운이 충만하네요.
2025-03-03 10:55:11추천 2
아래 사진....음식이라기 보단 한폭의 그림이네요
댓글 1개 ▲
2025-03-03 11:08:39추천 0
맞아요.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어요. 없어져서 아쉽습니다. 찾아보니 찾아보니 양평의 산당이라는 상호였네요. 유명하신 산채 요리연구가이자 화가인 임지호 선생님이 운영하셨고 2021년에 소천하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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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4 12:41:37추천 1
그런 멋진  아버지 아래서 자라
멋진 여인이 되셨군요.....
나는 내 딸들의 기억 속에 어떤 아버지로 기억될 것인가.....
하는 생각에 좋은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아려 옵니다.
댓글 2개 ▲
2025-03-04 12:44:47추천 0
베스트 보내드렸네요 ~
고맙다고 안 하셔도 돼요~ㅎ
2025-03-04 22:15:20추천 0
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따님분들 기억에 미께레 님은 분명히 멋진 아버님으로 기억될 거예요. 제가 장담합니다.
2025-03-04 13:40:38추천 1
제가 너무 좋아하는 압생트. 불꺼진 각설탕 아래에서 당분과 알콜이 섞여가며 아지랑이처럼 흐들거릴때 한모금 물고 음미하면 저절로 가글이 하고 싶어지는 마성의 알콜이죠.
댓글 1개 ▲
2025-03-04 22:15:50추천 0
압생트 좋아합니다 후후
2025-03-04 14:10:18추천 2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내가 사드리면서부터 세월을 실감하게되는듯..
민물생선 매운탕을 좋아하시는데 같이 드실분이 없어서 못드시다가..
내가 가끔 볼땐 민물매운탕집을 갈 수 있으니 매우 좋아하셨음.
나도 매운탕은 별로고, 아이들도 잘 못먹어서 손주들 데리고 갈땐 아버지는 아이들 잘 먹는데로 가자고 하시지만..
애들도 자기들 먹고싶은건 자주 먹으니 오늘은 할아버지 좋아하는거 먹으러가요~라며 또 매운탕집을 가고는 했음.
작년에 돌아가신 이후론 매운탕집에 갈 이유도 사라졌지만, 아직도 매운탕집 간판을 보면 가끔 아버지 생각이 남.
댓글 1개 ▲
2025-03-04 22:18:29추천 1
이 글이 너무 좋네요.
추억이 이렇게 대를 이어 가는군요.
저도 아버지에게 집에서 소고기를 구워먹으면 그 팬에다 라면을 끓이는ㅎㅎ 레시피를 배웠는데
이제 아버지는 건강문제로 그렇게는 못드시고 저만 가끔 해먹습니다.
저희는 아이는 없지만 어린 동생한테 한번 해줘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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