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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정말 명군이었는가?
게시물ID : history_15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사일런트힐
추천 : 11
조회수 : 2421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1/05/30 19:24:26

1. 광해군 재평가는 언제부터 시작?

이병도가 친일 행위를 했다고 그의 학설은 무조건 친일이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왜 광해군 재평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지 개인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않습니다.
광해군 재평가는 조선시대에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반정 세력뿐 아니라
우리에게 친숙한 실학자들인 이익, 홍대용, 정약용등의 학자들도 마찬가지의 평가를 내렸다는 것이지요.

그럼 광해군의 재평가는 언제 처음 이루어졌냐.
바로 일제 식민지 시대입니다. 일본 식민사학자이자 조선사편수회의 간사로 활동했던
이나바 이와키치가 광해군을 처음으로 '실용주의 외교를 펼친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렸지요.

현대에 와서 불운한 제왕 소리를 듣는 광해군이 조선 시대 그 어느 때도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가
일본식민사학자에 의해 재평가가 시작되었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이나바의 해석은 후에 이병도의 중립외교라는 해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2. 광해군은 정말 대동법을 추진했는가.

가장 대표적인 오해가 아닌가 싶습니다. 
'광해군이 추진했던 대동법이 당시 기득권측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광해군은 조선 왕실의 우두머리로서 기득권층의 정점에 서 있던 사람이었고
그 광해군은 대동법을 추진하기는 커녕 추진되고 있던 대동법조차 가로 막았던 인물입니다.

선혜청은 임란 직후 선조 때 창설 된 경기 지역의 대동법 시행을 위한 관청이었는데,
광해군 즉위 후 이를 확대 실시 하자고 여러번 요청이 이루어졌으나 광해군에 의해 계속 무산 되었습니다.

광해군일기를 보면 분명히 작미로 세금을 내는 대동법을 반대합니다.
오히려 대동법을 '근원을 맑게하지 않고 하류만을 맑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리지요.
실록의 기록만 봐도 선혜청의 요구나 현재 방납의 폐단에 대한 보고가 올라와도
광해군은 계속해 미루는 듯한 답변을 볼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광해군 6년 호조의 선혜청 더 설치하자는 호조의 의견에 광해군은 

“우리 나라가 토지에 따라 공물을 바치게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경기에서 쌀로 거두는 것이 한갓 본청(本廳)의 하인들이 교활한 짓을 하는 소굴이 되어 구애되는 점이 많으니 먼 장래를 경영하는 방법이 아닐 것 같다. 팔도에는 절대로 경솔하게 동시에 시행할 수 없다. 이 공사(公事)는 시행하지 말라.”
(광해 80권, 6년(1614 갑인 / 명 만력(萬曆) 42년) 7월 3일(계축))

라고 대동법은 먼 장래를 경영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며 반대 의견을 확실히 어필합니다. 
그렇게 대동법은 광해군에 의해 좌절되고 인조반정 이후에나 다시 논의가 시작됩니다.



3. 중국에 최초의 뇌물의 길을 트인 인물.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서 그 위에 형 임해군이 있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임해군은 귀양을 간 후 목졸려 죽임당하게 되었는데 이 임해군의 죽음으로 인해
대내적으론 광해군의 입지를 좁히게 만들었고 대외적으론 명나라와의 외교적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둘째 아들인 광해군이 왕위를 계승한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던 명나라는 사신을 파견하는데,
당연히 옥사한 임해군으로 인해 적당한 변명거리를 조선 정부에선 찾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무마하고자 명나라 사신에게 엄청난 양의 은과 인삼을 뇌물로 주었고
이 때문에 광해군 대의 호조는 명의 사신들에게 줄 뇌물인 은을 마련하느라 허리가 휠 정도였다. 
라고 말하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청병할 때조차도 중국에 뇌물을 쓰지 않았는데, 
이 때 처음으로 뇌물을 먹이는 길을 틔웠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4.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부러워할 인물.

청계천, 4대강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 
토목 공사하면 바로 떠오르는 한국사 인물은 당연히 이명박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이 이명박 대통령을 우습게 만들어버리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게 광해군입니다.

임진,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궁궐 복원은 선조 때부터 시작해 광해군 때 이어집니다.
문제는 이 궁궐공사가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이지요.
원래 궁궐 공사의 첫 번째 목적은 왕권 강화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나라가 망하는 가장 지름 길 역시 궁궐공사입니다.

선조 때 짓기 시작한 창덕궁은 광해군 원년에 완공됩니다.
그리고 광해군은 8년 창경군을 또 완공합니다.
또 경운궁 수리도 마칩니다.
9년에는 경덕궁과 인경궁 공사를 시작했고 12년 경덕궁이 완공되었습니다.
인경궁은 광해군이 폐위 될 때까지도 완성되지 못하다 인조반정에 의해 중단됩니다.

다시 말하면,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 경덕궁, 인경궁 자수궁의 공사가
모두 광해군 정권 때 이루어진 것이지요.
거기에 경복궁의 중건까지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실록을 보면 광해군일기에 가장 빈번히 나오는 말이

궁궐공사 중지를 요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공사를 위한 재목을 재촉하다
궁궐 공사를 위한 벼와 베를 미리 거두게 하다입니다.

공사 중지를 위해 신하들이 그렇게 간곡히 요청해도 절대 윤허하지 않고
공사를 위해서는 세금조차도 미리 걷어버리는 폐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게 광해군이었습니다.
또한 결포라 하여 이미 토지에 정해진 세금 이외에 토목 공사를 위한 세금을 추가 부과하기도 했습니다.

이 궁궐공사에 들어간 비용을 수치로 환산하면 어 어마어마한데, 
단지 3개월동안 들어간 공사 비용이 
쌀 6,830여석
포목 610여동 = 7,300여석
당주홍 600근 = 720석
정철 10만근 = 12,000석
합계가 26,850석이고 이는 전체 국가 예산의 25%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수치입니다.
(출처 : 조선의 힘)

특히 저기의 정철 10만근은, 당시 무기를 담당하던 군기시에서 1년 동안 거두는 철이 1만근이었는데,
그의 10배에 해당하는 철을 군비가 아닌 토목공사를 위해 지출합니다.
즉 10년간의 군사 목적으로 쓰일 철을 궁궐을 짓는 데 썼다는 것이지요.

거기에 한 수 더 해 부족한 공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관직을 팔고
군역을 면제해주는 등 망국의 폐단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매관 매직을 손수 보여줍니다.

토목공사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었고 다 했던 광해군.
아마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부러워할 인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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