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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폭동 또는 광주사태는 어떻게 일어났나??
게시물ID : sisa_1555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친Book좌파
추천 : 14/5
조회수 : 898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1/12/28 00:05:32
http://ko.wikipedia.org/wiki/%EA%B4%91%EC%A3%BC_%EB%8C%80%EB%8B%A8%EC%A7%80_%EC%82%AC%EA%B1%B4

1971년 7월 7일에 이주민들에게 처음 약속한 평당 200원으로 불하했던 땅 값을 평당 8천 원에서 최대 1만 6천 원까지 대폭 올린 뒤 토지 대금을 일시불로 납입하라고 통지했고, 이는 입주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정부와 서울시 당국은 비싼 분양가, 철거민 우선권이 무시되고 외지인들의 분양 증가, 땅투기, 주변지역 일자리 부족 등의 문제 해결과 정책의 시정, 생계수단을 마련해 달라는 주민의 절박한 요구를 번번이 묵살했다. 8월 10일에 5만 명의 이주민이 경기도 성남출장소 앞에 집결했다. 이들은 박정희 정부를 향해 무상분양 및 분양가 인하, 세금감면, 공장과 상가 등의 건설, 작업장 알선, 주민 구호사업 추진 등을 요구하면서 성남출장소에 불을 질렀고, 출장소 소속 기물과 차량을 파괴했다.

같은 날에 최고책임자인 서울시장이 주민과의 대화 약속마저 일방적으로 어기자 이에 격분한 주민들은 도시를 점령 지역 내 토지 불하 가격 인하, 취득세 감면, 세금 부과 연기, 긴급 구호 대책 마련, 취역장 알선 등을 요구하며 도시를 점령하였다.[2] 시위대가 수만 명으로 증가하자 내무부와 서울시는 700 ~ 800여 명의 경찰 기동타격대를 광주대단지로 투입했으나, 이들의 소요사태를 진압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참다 못한 시민 일부는 버스를 대절해 서울로 올라와 집단으로 항의 시위를 벌였다.[1]

사건을 보고 받은 당시 중앙 정부는 행정안전부 차관과 경기도지사를 현장으로 파견해 이주민들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은 물론, 주민대표에게 정식 사과하고 이주민들의 화를 달랬으며, 8월 12일에 서울시장이 방송 담화를 통해 이주단지의 성남시 승격과 함께 주민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시민들이 자진 해산한 끝에 사태는 3일만에 최종 진정되었다.


용산참사의 대선배격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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