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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언론의 확증편향성 ‘자뻑’ 잔치 집에 초대받은 손님이 진수성찬의 음식을 먹은 뒤, 주인에게 ‘돈이 많은가 봅니다.’라는 말은 덕담일까? 빈정거림일까?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입 진보 언론(?)’의 세 치 혀와 현란한 글쇠판은 요란하다.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물타기식 논조를 먹물들에게 하달하고 있는 모양새다. 요상한 글품쟁이들의 손가락이 하나 둘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한 번 해보자는 야살이자 몸태질이다. 인지부조화가 심각하게 진행되면 확증편향 증세가 나타난다. 지금이 바로 그 지점인 것 같아 보인다. 이런 증세가 나타나는 부류는 대부분 지적 우월감과 직업적 소명의식이 낡은 이념과 결합 된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만의 논리와 특별한 학설로 독자를 설득 할 수 있다고 믿는 지식형 확신범이다. 진보적 애국주의자들(?)이 잘 걸리는 고질병이자 몽짜이다. 일부 기자나 논객들의 주관적 잡필(雜筆)이나 주필(酒筆)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고 항의하고 반박하는 독자를 ‘빠’, ‘개떼‘로 규정하는 멍청한 짓이 더 심각하다는 말이다. 독자의 연령층은 다양하다. 할매할배를 ‘빠’, ‘개떼’로 규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여 독자를 ‘빠’로 규정하고 전선을 만들어가는 자칭 ‘입 진보언론’의 입과 손가락 논조는 옳지 않다. 격동기를 살아도 더 살았고 체험을 해도 더 해 온 꼰대들도 있다는 경고다. 독자들의 요구는 단순하고 명확하다. 비판은 하되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직필은 하되 조롱을 하지 말라는 요구다. ‘입 진보 언론’이 싸질러 놓은 모든 자료는 ‘아카이브 파일’로 찾아내는 시대다. 사실과 상황을 파악하고 기사를 쓰라는 말이다. 모든 자료나 기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새롭게 드러나고 모든 것이 재조명 된다. 기자의 이름과 함께 말이다. 기성 진보 언론인들이 이제는 제발 버려야 할 게 있다. 바로 먹물근성, 계몽사상, 순혈주의, 선민의식, 학벌동지애, 사상운동 등의 닫힌 언론관 말이다. 열린 언론관이 필요할 때다. 사회민주시민세력과 자생적으로 태동한 열린 ‘신진보 세력’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흐름과 변화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논리와 직관, 이성과 정서가 균형을 이루는 기사와 논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입 진보언론’의 교조적 언론관과 도제식 교육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다. 그들만의 화학적 결합과 언론관은 그래서 죽은 언론이자 박제된 조직이다. 편향된 시각과 동지적 공생과 공존에 편승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껍질을 깨지 않고는 빛을 볼 수 없다. 언론을 사유화 하여 자신들의 사고, 가치, 신념, 울분, 정치적 성향을 배설하는 지면으로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다. 언론인은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나온 기사에 대해 독자에게 변명이나 고마움을 표시 할 필요가 없다. 그 내용이 다중(多衆 Multitude)과 독자들의 비난과 비판, 호응과 격려라도 말이다. 기자는 사실 보도와 진실 보도 사이에 끼여 있는 글품쟁이에 불과하다. 개인의 사상, 주관, 가치가 배제 된 기사가 필요하다. 만약 주의주장이 필요하다면, 사설, 칼럼, 시론으로 주장하면 된다. 이 또한 ‘곡학아세’는 하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 이 논쟁도 사그라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오판이다. 시간과 세월이 ‘크로노스(Cronus)의 시간이라면 일상화 되는 과정에서 희미해진다. 그러나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라면 결단과 영속성이 생긴다. ’빠‘의 결단과 영속성은 ’입 진보언론‘의 세속적 시간관을 넘어선다. 하여 '입 진보언론’은 시대가 요구하는 언론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2009-04-30일 18:54에 모 언론사의 ‘아침 햇발’에 올라 온 글이다. “‘비굴이냐, 고통이냐.’”라는 칼럼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한 번 보자. “조금 매정하게 말하면, 노 전 대통령의 앞에는 비굴이냐, 고통이냐의 두 갈래 길이 있을 뿐이다.” 이 문장 하나로 ‘노빠’는 오늘까지도 깊은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오늘 이 치욕의 문장을 ‘입 진보언론’에게 되돌려 줄까 한다. ‘조금 매정하게 말하자면, ‘입 진보언론’ 앞에는 비굴이냐, 고통이냐의 두 갈래 길이 있을 뿐이다.‘ 선택은 자유다. 그러나 그 자유로움의 선택은 마냥 아플 것이다. 그 아픔의 상흔을 기억하면서 한 문장 더 들어가 보자. 확실한 답을 던져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보자. 그 저주의 ‘레토릭’을 빙자한 저주의 문장을 말이다. “‘사즉생 생즉사’의 자세가 필요한 때다. <중략> ‘나를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고 깨끗이 목을 베라’고 일갈했던 옛 장수들의 기개를 한번 발휘해 볼 일이다. <중략> 사즉생’을 말하는 것은 노 전 대통령 개인의 부활을 뜻하는 게 아니다. 노 대통령이 선언한 대로 그의 정치 생명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중략> 그의 ‘마지막 승부수’는 아직도 남아 있다.” “그의 ‘마지막 승부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자결하라는 은유적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아직도 이 문장의 진의를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상흔이 있다. ‘입 진보언론’에게 그대로 돌려주고자 한다. 제발 아팠으면 좋겠다. 아니면 송연한 척이라도 해 주면 좋겠다. 경고성 문장치고는 너무 점잖은 내용이다. ‘사즉생 생즉사’의 자세가 필요한 때다. ‘입 진보 언론을 더 이상 욕되게 하지 말고 깨끗이 목을 베라’고 일갈했던 옛 장수들의 기개를 한번 발휘해 볼 일이다. <중략> ‘사즉생’을 말하는 것은 입 진보언론의 부활을 뜻하는 게 아니다. 입 진보언론이 선언한 대로 자신의 언론 생명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중략> 입 진보언론의 ‘마지막 승부수’는 아직도 남아 있다. 참으로 예지력이 깊은 글이다. 이 글이 오늘 ‘입 진보 언론’의 앞날을 위한 글일 줄이야 누가 알았던가? 진보적 언론이면, 모든 것을 비판하고 단죄하고 죽음을 강요하는 듯한 독설과 저주의 글을 적어도 되는 권한이 있는가? 보수 언론은? 아무리 비판하더라도 그 비판의 칼날 속에 측은지심은 녹아있어야 한다. 아픔이 아픔에서 멈추면 회복이 되지만, 아픔이 상흔으로 남으면 한(恨)이 되기 때문이다. 이 상흔의 한을 정치사회적 공간으로 승화시키고 새롭게 태동한 세력이 있다. 바로 ‘빠’에서 진화한 ‘다중(多衆 Multitude)’이라는 ‘신 진보 세력’이다. 공감하되 쏠리지 않고, 공유하되 소유하지 않고, 뭉치되 자율적이고, 이질적이되 창조적인 이 세력은 다수의 개성을 보장하는 자유롭고 진보적인 공동체이다. ‘노빠’의 아픔과 상흔이 ‘문빠’로 전이된 것은 바로 이런 아픔과 고통과 한이 녹아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부탁한다. ‘빠‘를’ 까는 시간에 시대적 소명과 언론인이 가야 할 길을 되짚어 보는 것이 더 옳다. ‘입 진보언론’의 진정성과 경직성은 늘 의문으로 남는다. 하여 소위 ‘빠’라는 틀 속에 갇혀 있는 이 세력은 늘 ‘트라우마’에 시달려 왔다. 특히 진보언론이 퍼부은 흑역사(비난, 멸시, 차별, 조롱)는 늘 가슴을 후벼 팠고 상처를 덧나게 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오늘의 이 사태는 바로 ‘입 진보언론’들의 ‘자뻑’으로 생긴 헛발 짓이자 자살골이다. ‘입 진보언론’의 ‘자뻑’은 이번 사건으로 족하다고 본다. ‘노짱’의 8주기 추도일을 맞아 진심으로 부탁한다. ‘빠’는 이제 없다. 오직 거듭나고 진화한 ‘빠’의 신 모델인 ‘다중(多衆 Multitude)’만 있을 뿐이다. 2017년 푸른 달.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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