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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전한의 봉작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55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2
조회수 : 127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5/02 15:43:09

한(漢)나라가 일어난 뒤로, 봉작은 왕(王)과 후(候)의 두 가지로 나눠졌다. 고조 말년에 유씨가 아니면서 왕이 되거나, 혹은 공이 없어 천자가 봉하지 않았음에도 후가 된 자는 천하 사람이 모두 그를 토벌할 수 있게 맹약하였다. 그때 고조의 자제 또는 종실의 사람으로 왕이 되었던 자는 9명이었는데, 단지 장사왕(長沙王: 오예吳芮가 봉해진 왕국. 오예는 장사왕에 봉해진 해인 고조 5년에 죽었으며 그 나라는 5대까지 계승되다 문제 말년인 기원전 157년에 후계자가 없어 페지되었습니다.)만이 성이 달랐다. 그리고 공훈이 있어 후가 된자는 백여 명이었다(고조 시대에 열후에 봉해진 사람은 143명이었습니다. 덧붙여서 한 고조 유방이 봉한 공신은 모두 137명이고 여기에 외척과 왕자는 6명이었습니다.). 안문(雁門), 태원(太原)으로부터 동쪽으로 요양(遙陽)에 이르는 것이 연(燕)과 대(代)나라였다.

 

상산(常山) 남쪽의 태행산(太行山)부터 동쪽으로는 향해 황하(黃河, 제수(濟水)를 건너 동아(東阿), 견성(甄城) 동쪽으로 곧장 바닷가에 이르는 것이 제(濟)나라, 조(趙)나라였다. 진현(陳縣) 서쪽에서 남쪽으로는 구의산(九疑山)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장강(長江), 회하(淮河), 곡수(穀水), 사수(泗水) 및 회계산(會稽山)에 근접한 것이 양(梁), 초(楚), 회남(淮南), 장사(長沙)였다. 이들 제후국들은 밖으로는 흉노(匈奴)와 월족(越族)을 접하고 있었다. 내지(內地: 장안 주위의 관중을 의미합니다.)의 북쪽에 있는 효산 동쪽부터는 모두 제후의 봉지로, 큰 제후국은 5, 6개의 군(郡)을 소유하여 몇십 개의 성시(城市)가 연달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조정을 설치하였는데 참람하게도 천자와 같은 수준이었다. 당시 중앙정부는 삼하(三河), 동군(東郡), 영천(潁川), 남양(南陽)과 강릉(江陵) 서쪽의 촉군(蜀郡), 운중(雲中), 농서, 내사(內史)를 합쳐 겨우 15개의 군을 관할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公主), 열후(列候) 등의 식읍이 이 지역에 많았는데 이는 무슨 이유 때문인가? 천하가 막 평정되었을 때에는 왕이나 후가 될 만한 황실의 인물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한나라 황실의 여러 자손들이 힘을 보태어 천하를 다스리고 한나라를 보좌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 고조 유방은 황제 즉위 다음해 2월에 공신들의 봉건을 실시했습니다. 고조시대에열후에 봉해진 사람은 총 143명이었는데 그 중 유방의 동족 4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공식들이었습니다. 열후란 20등작의 최상위로 당시에는 철후(徹候)라고 불렸는데 나중에 무제(武帝)의 이름이 철(徹)이었기 때문에, 이후 철후를 통후(通候)라 하고 또 열후라 불렀습니다.

 

열후는 봉읍을 부여받고 그 작위를 세습할 수 있었습니다. 봉읍은 대개 한 현(縣)을 단위로 하였는데 현이 봉읍되면 현이라 부르지 않고 국(國)이라 했습니다. 열후의 명칭은 그 봉읍의 이름을 따서 예를 들어 찬현에 봉해진 소하는 찬후라 불리고, 평양현에 봉해진 조참은 평양후라 불렸습니다.

 

열후는 그 봉읍에서 징수하는 조세를 수입으로 하고, 거기에는 현의 령(令) 혹은 장(長)에 해당하는 상(相)을 설치하고, 또 가승(家丞) 이하의 속관(屬官)을 배치하여 봉읍의 통치와 그 재정관리를 맡겼습니다. 고조시대의 열후는 큰 현에 봉해진 자가 봉읍 1만호 남짓이었고, 작은 현의 경후는 5백~6백 호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전란이 수습되고 민력(民力)이 회복되면서 봉읍의 호수는 자연히 증가하고, 그에 동반해서 열후의 수입도 증가했습니다. 예를 들어 소하가 처음 봉해진 찬후나 조참의 평양후 등은 여러 대를 거친 이후에는 그 봉호가 4만 호에 달했습니다. 또 '사기'에 따르면 무제시대에 1천 호의 봉읍을 가진 열후의 연 수입은 20만 전이었다고 합니다.

 

공신들은 이와 같이 최고의 작위를 받고 봉읍을 지급받음에 따라 한제국에서 공적인 신분과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분과 지위를 황제가 보증한 것이 이른바 '봉작(封爵)의 맹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철권(鐵券)에 "황화가 허리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평평해져도 한에 종묘가 있는 한 너의 지위는 영원할 것이다."라고 하는 문언을 빨간 옻칠한 피륙에 쓴 것으로 이것을 나누어, 그 반은 각각의 열후에 주고 다른 반은 금궤석실에 넣어 종묘에 보관했다고 합니다.

 



※ 이 열후 위에는 다시 제후왕이라는 한 단계 높은 신분을 가리키는 지위가 있어 황제의 근친 및 고인 중에서도 특히 공적이 많은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한왕 유방이 황제에 추대되었을 때 그를 추대한 여러 왕들의 게보를 이어받은 것인데, 황제 즉위 후 교체가 이루어져 다시 근친자나 특별 공신에게 왕위가 주어져 이들을 제후왕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즉 즉위한 해에 연왕(燕王) 장도가 모반으로 주살되자 대신해서 유방과 동향 출신으로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난 유년 시절부터의 친구 노관이 연왕에 봉해지고, 또 팽월이 양왕(梁王)에, 원래의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가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지고 제왕(濟王) 한신(韓信)은 초왕(楚王)에 한왕(韓王) 신은(信)은 태원군(太原郡)의 진양(晉陽)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한신은 모반을 꾀한다는 의심을 받아 회음후(淮陰候)로 떨어지고 한왕 신도 다음 해 흉노에게 항복하여 왕위가 폐지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고조는 여러 공신을 열후에 봉건할 때 그의 근친, 동족을 제후왕에 봉건하여 처음으로 동성의 제후왕이 출현했습니다. 6년(기원전 201년) 정월에 형인 희(喜)를 대왕(代王)에, 배다른 동생인 교(交)를 초왕(楚王)에, 서자 출신인 비(肥)를 제왕(濟王)에, 동족인 가(賈)를 형왕에 봉건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후에 고조는 형의 아들인 비를 오왕(吳王: 오왕 비는 훗날 오초 7국의 난을 주동한 인물입니다.)에 봉한 것 외 자신의 왕자들을 각지의 왕에 봉건했습니다.

 

제후왕과 열후를 비교하면 제후왕은 그 신분이 열후보다 상위였습니다. 봉지의 넓이도 여후와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즉 열후의 경우 봉읍이 한 현에 불과했지만, 제후왕의 경우에는 수군 수십 현에 이르렀습니다. 예를 들면 형왕 유가의 봉지는 3군 53현, 초왕 유교의 봉지는 3군 36현, 대왕 유희의 봉지는 3군 53현, 제왕 유비의 봉지는 6군 73현이었습니다. 이들의 봉지는 군, 현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곡 형국, 초국, 대국, 제국이라고 하듯이 각각 국이라 불렸습니다. 제후왕은 각국의 국내 통치권을 장악하여 중앙정부와 거의 같은 독립된 관료기구를 두었습니다. 왕을 보좌하는 태부(太傅)를비롯해서 국내의 인민을 통치하는 내사(內史). 군사를 담당하는 중위(中尉), 관리들을 통괄하는 상국(相國) 및 어사대부(御史大夫), 정위(廷尉), 소부(少府), 종정(宗正), 박사(博士), 대부(大夫) 등의 왕국 중앙기구가 있었습니다.

 

또 열후의 대부분은 봉읍이 아니라 수도 장안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제후왕은 반드시 국도(國都)에 거주하고 수도에는 숙박소인 저사(邸舍)를 설치했습니다. 제후왕의 나라는 거의 독립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한나라가 천하를 평정한 100년 동안, 황실의 친척들은 서로 멀어져갔으며 어떤 제후들은 교만하고 사치하여 간사한 신하의 말에 젖어들고 반란을 꾀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에는 크게는 반역을 일으키는 자도 있었고 작게는 국법을 무시하여 몸을 위태롭게 하고나라를 잃는 자도 있었다.

 

천자는 고대의 정치 득실을 관찰해서 제후에게 은혜를 베푸니 그들은 자손들에게까지 국읍(國邑)을 나누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제(濟)나라는 일곱, 조(趙)나라는 여섯, 양(梁)나라는 다섯, 회남(淮南)은 셋으로 나뉘었다. 천자의 방계로서 왕이 된 자와 왕자의 방계로서 제후가 된 자는 백여 명이었다. 오초(吳楚)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제후들이 벌을 받아 봉지가 삭감되어 연(燕)과 대(代)는 북쪽의 군, 오(吳), 회남(淮南), 장사(長沙)는 남쪽의 군을 잃었고, 제(濟), 조(趙), 양(梁), 초(楚)의 지군(支郡)은 명산, 못과 바다는 모두 한나라 조정에 귀속되었다. 제후들이 점점 약해져서 큰 제후국도 불과 십여 개의 성을 소유할 뿐이었고 작은 제후국은 겨우 몇십리의 땅을 점유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후들이 위로는 나라에 진상하고 아래로는 조상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고, 수도를 둘러싸서 호위케 하려 한 것이다. 한나라 조정이 설치한 군은 팔구십 개로 제후국 사이에 얽혀지듯이 자리하여 그 형세가 개의 이빨이 단단히 맞물린 듯하기 때문에, 조정은 천하의 요새를 장악하여 중앙의 힘은 강화하고 제후는 약화시켜 존비의 관계가 명확해지고 모든 일이 제대로 행해지게 되었다. 

 

 

※ 오초 7국의 난 이후 중앙정부는 제후왕에 대해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새로운 규제를 가했습니다.

 

첫 번째는 제후왕을 국정에서 분리하였습니다. 종래 제후왕의 관리는 중앙에서 파견하는 승상을 제외하고 모두 제후왕이 임명하였지만, 7국의 난 후에는 왕국의 승상을 상이라는 명칭으로 바꾸거, 어사대부*정위*소부*박사 등 중앙정부와 같은 이름의 관직을 폐지했을 뿐 아니라 그 밖의 관리들도 모두 감원하여 왕국의 정치는 중앙에서 파견하는 상에 의해서 집행되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늘었는데, 그들은 제후왕에게 봉사하기보다 오히려 중앙정부의 관리로서 제후왕을 감시하는 것을 자신의 직책이라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제후왕의 행동은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변혁의 결과 제후왕은 왕국 내에 있으면서도 직접 국정을 담당하지 못하게 되고, 동시에 그의 수입도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거둔 왕국 내의 조세를받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 오왕 비가 실시했던 것과 같은 제동, 제염과 같은 사업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각 제후왕의 봉지를 축소했습니다. 예전에는 한 명의 제후왕의 봉지가 수군 수십 성에 미치기도 했지만 7국의 난 후에 새로 제후왕이 된 자는 황제의 왕자가 봉해진 대국에서조차 10여 성에 불과했습니다. 또 7국의 난 이전부터 존속하고 있던 대제후왕도 현재의 왕이 죽으면, 그것을 왕자들에게 각각 나누어 분봉함으로써 한 국가의 봉지는 줄어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경제의 동생으로 7국의 난에서 공을 세웠던 양왕 무의 봉국은 북쪽으로 태산을 경계로 하고 서쪽은 고양에 미쳐 그 가운데 큰 현 40여 성을 포함하는 대국이었지만, 그의 사후 이 나라는 5명의 왕자에게 분봉되었습니다.

 

이 왕국 분봉의 방침을 제도화한 것이 경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제의 추은령(推恩令)이었습니다. 이것은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년)에 낭중 주부언의 헌책에 따라 실시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황제의 은덕을 제후왕의 자제에게 동등하게 미치게 한다는 명목 아래 제후왕은 반드시 그 봉지를 자제에게 분할하고 그에 따라 자제를 열후로 삼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명목은 황제의 은덕을 베푸는 것이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제후왕의 봉지가 1세대 내려갈 때마다 분할 축소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추은령의 발포로 인해 가의나 조조가 주장한 제후왕의 억제책은 완성되었습니다.

 

더구나 무제시대에는 제후왕 억제책으로 좌관율(左官律), 부익률(附益律) 및 아당률(阿當律)을 시행했습니다. 좌관율이란 사람들이 멋대로 제후왕과 군신관계를 맺는 것을 금한 법률이고, 부익률은 제후왕을 위해서 왕국의 부세를 늘리거나 다른 부담을 인민에게 부과하는 것을 금한 법률이었습니다. 또 아당률이란 중앙정부에서 왕국에 파견한 상 등의 관리가 제후왕의 죄과를 알면서 중앙에 보고하지 않을 경우 적용하는 법률이었습니다.

 

 

* 출처: 사마천 사기 본기와 표서(表書), 중국의 역사 '진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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