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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손은과 노순의 난(亂)
게시물ID : history_156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3
조회수 : 157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5/04 21:09:20

손은(孫恩)은 원래 청주에서 회계로 피난해 온 손태(孫泰)[1]라는 인물의 아들(조카라는 말도 있습니다.)이었습니다. 이 손태라는 인물은 오두미도를 신봉하는 도교신자였는데 특별히 무술(巫術)이 좋았는지 아니면 의술(醫術)이 좋았는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다고 합니다. 점점 민중들 사이에서 신으로 추앙받으면서 세력을 키워나간 손태는 당시 건강의 중앙정부와 북부군과 서부군의 대립을 조용히 지켜보며 동진의 명맥이 끝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에 불안해하던 민중들에게 행복을 내려줄 것을 약속하며 장강 하류 삼각주 지대에서 많은 신자를 포섭해 나갔습니다.

 


종교지도자인 손태의 도를 넘은 정치적 발언과 그의 행동으로 인해 동진의 중앙정부는 그를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죽이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를 따르던 사름들은 그가 「등선(登仙)」, 즉 영원히 사는 선인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욱주(郁州)라고 불린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피해 있던 손태의 아들 손은은 이를 이용하여 손태 사후 와해될 수도 있었던 그의 종교집단을 더욱 굳건히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은밀하지만 꾸준히 그가 있는 섬으로 공물을 보내왔고 손은은 신자들이 보낸 공물을 이용하여 세력을 축적해 나가며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때마침 399년 동진정부는 장강 하류 삼각주 일대의 소작인들을 병사로 징발한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은 동진에서도 가장 발전된 지역에 살고 있는 장강 하류 삼각주 일대의 민중들을 분노에 휩싸이게 만들었습니다. 손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동안 웅거해 있던 욱주에서 회계로 나와 민중들을 선동하여 지방관청을 습격하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손은은 회계군을 중심으로 도처에서 살육과 약탈전을 강행하면서 건강으로 조금씩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스스로 「장생인(長生人 : 영원히 사는 사람)」이라고 칭한 손은은 결전을 각오한 신자들에게 데리고 있는 갓난아이들을 물 속으로 던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수선신앙(水仙信仰)」, 즉 입수하여 영생자가 된다고 하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미 손은의 말에 광신한 어머니들은 그의 말에 따라 아이들의 행복을 기원하며 아이들을 모두 물 속으로 던졌습니다.

 


손은의 급속한 세력 확장에는 민중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북방에서 망명해 온 귀족들에게 불만을 품은 남방토착 호족들의 지원도 상당했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지원 속에 손은이 이끄는 이 종교집단의 세력은 순식간에 장강 하류 삼각주를 석권하고 이윽고 수도 건강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낱 종교집단이라 생각하여 우습게 생각하던 동진정부는 손은이 이끄는 이 광신적인 종교집단의 위험성에 대해 깨닫고 곧바로 행동에 들어갑니다. 비수의 전투 이후 서부의 환온과 함께 동진을 대표하는 무장으로 성장한 유뢰지는 중앙정부의 명령을 듣고 동진 양대 정예군들 중 하나인 북부군의 장으로써 이들을 이끌고 손은의 부대를 토벌하기 시작합니다. 이 유뢰지가 이끄는 북부군에는 훗날 송나라를 세우는 유유라는 젊은 군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북부군과 손은의 반란군의 전투는 꽤나 격렬하게 이어져 나갔습니다. 특히 401년에는 손은이 이끄는 수십만의 수군은 장강을 거슬로 올라가 수도 건강의 입구이자 북부군단의 중심 도시인 경구를 급습하였습니다[2]. 이 급습으로 인해 경구가 함락될뻔하였지만 유유의 재빠른 행동으로 손은의 수군은 패퇴하였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벌어진 해전에서도 손은의 수군은 북부군의 맹공에 격퇴당하고 맙니다. 401년 경구 전투와 그 뒤 벌어진 해전의 패배로 손은의 반란군의 기세는 급속도로 약화됩니다. 이미 경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유유는 부장(副將)으로까지 향상되었고 유유는 손은의 반란군을 바다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이렇게 달아나던 손은은 402년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습니다.

 


반란의 괴수는 죽었지만 아직 반란의 핵심 세력은 그대로였습니다. 남은 잔당 수천명은 손은의 여동생의 남편인 노순(盧循)을 교주로 삼아 교단활동과 동진에 대한 적대행위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들은 동진정부의 감시가 심한 장강 하류 삼각주에 대한 포교를 버리고 대신 광동으로 남하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교단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8년간에 걸쳐 세력을 확장해나갑니다[3].

 


이윽고 410년 노순과 그리고 서도복(徐道覆)이 이끄는 이 종교집단은 다시 한번 수군을 이끌고 현재의 강서성과 호남성 이 두 방면 쪽에서 대거 건강으로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이들의 기세가 얼마나 강했는지 당시 동진의 최고 권력자였던 유유는 남연(南燕)을 무너뜨리고 서둘러 돌아와 간신히 건강 근처에까지 육박한 노순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유유는 이 종교집단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깨닫고 이번에는 확실히 이 종교집단에 대한 토벌을 시작합니다. 유유의 군대는 즉각 노순의 군대를 쫓아 근거지인 광동을 제압하였습니다. 노순은 북베트남까지 도망쳐 411년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렇게해서 두 번이나 수도 건강을 위협한 오두미도교들의 반란도 종말을 고했습니다.  

 


이 반란은 겉으로는 종교집단의 반란이었지만 그 속내를 들춰보면 북방 망명 귀족들에 대한 남방토착 호족들과 북방에서 이주한 한인(漢人)들에 대한 남방토착민들의 분노와 황족인 사마도자의 횡포로 인한 민중들의 불평과 원망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오두미도교가 자극했을 뿐이지 이 반란은 동진정권의 약점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1] 손태는 오두미도 신자였지만 전당(錢塘)의 두자교(杜子喬)라는 사람에게 비술을 물려받아 천사도(天師道)라는 민간 종교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동진정부는 그에게 군의 태수(太守)에도 임명했다고 합니다.

 

[2] 401년 손은 일파의 건강 공격을 명분으로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은 건강을 구원하고 정치를 바로 잡는다는 명목으로 서부군단 병력을 이끌고 건강으로 진격합니다. 하지만 그가 도착하기 전에 손은의 수군은 유뢰지의 부하인 유유의 군대에 의해 패퇴당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현은 건강으로 진격하기에 이릅니다. 사마원현은 유뢰지를 선봉으로 삼아 북부군의 힘으로 환현을 막으려 했지만 유뢰지는 환현에게 항복하였고 환현은 아무런 저항없이 건강으로 무혈입성에 성공합니다.

 

건강에 진입한 환현은 사마도자 부자와 그 일당을 모조리 처형하거나 추방하고 그리고 동진의 안제(安帝)를 폐위시켜 심양(현 강서성 구강 지방)으로 내쫓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초(楚)나라를 건국합니다(403). 

 

환현은 처음에는 과단성있는 시책으로 사마도자 부자의 압정 속에 시달리던 민중들과 귀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지만 곧 자신의 세력만을 임용하고 호화생활에 빠지는 등 곧 그들에게 실망을 안겼습니다. 또한 환현은 북부군단장인 유뢰지의 힘을 없애기 위해 그를 회계 태수에 임명합니다. 유뢰지는 환현의 의도를 깨닫고 반란을 일으키지만 그의 뜻을 따르는자가 없어서 결국 쓸쓸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오히려 환현을 내쫓은 것은 손은의 난을 진압한 유유였습니다. 유유는 당시 유뢰지의 뒤를 이어 참군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405년 유뢰지는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27명의 한문(寒門) 출신의 중간급 무장들을 규합하여 환현을 내쫓고 다시 안제를 복위시킵니다. 강릉으로 달아난 환현은 추격군을 이끈 유유에게 죽음을 맞이하고 환온 이후 동진 최고의 귀족가문 중 하나인 환씨 가문은 이렇게 사라지고 맙니다.


[3] 사실 유유를 비롯한 동진정부는 토단의 실행, 남연국에 대한 토벌 등 복잡한 일이 많아 조용히 지내며 동진정부에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던 노순에게 정로장군(征虜將軍) 광주자사(廣州刺使)라는 직책까지 주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무서운 종교집단을 달랬습니다.




※ 출처 :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위진남북조사(이공범), 위진남북조사(노관),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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