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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주인선 무역과 동남아시아 용병의 전성시대
게시물ID : history_15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peroSpera
추천 : 10/4
조회수 : 6568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1/05/31 08:38:00
======================================================================================================== 무작정 누르기 전에 이 글이 뭔지는 읽고 옵시다, 개념 있는 사람이라면 불만은 리플로 말합니다 ======================================================================================================== 동남아시아 교역에 참여했던 일본 무역선의 모습. 특이하게도 서양범선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동남아시아에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이전에 이곳은 오래전부터 중국, 인도, 이슬람상인들이 진출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동남아시아의 향신료와 열대 목재, 상아와 같은 물품을 사들였으며 또한 동남아시아를 통해 인도,이슬람세계의 유리공예품이 동아시아로 수출되고, 또한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가 서아시아와 유럽세계로 수출되기도 했습니다. 700년대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혜초 스님도, 1290년대에 중국을 여행한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도, 모로코 출신의 이븐 바투타도 이러한 바닷길을 통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오늘날 화교라고 불리는 중국 상인들의 진출은 15세기 정화의 원정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17세기 유럽인들이 동남아시아 곳곳에 상관, 혹은 요새화된 도시를 건설할때 중국인들은 집단 거주지를 이루어 수마트라, 자바와 같은 인도네시아의 도서지방과 필리핀, 타이의 방콕 등지에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1608년 1월 11일 (그레고리우스력)에 발행된 주인선무역 면허증의 모습 일본인들은 15세기경부터 기존에 성립되어있던 교역로를 돌아다니며 약탈을 시작했습니다. 일부 대담한 해적들은 중국이나 조선 본토에까지 상륙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큐슈와 대마도 일대의 영주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16세기에는 중국인, 일부 포르투갈인까지 개입하게되면서 왜구는 국제조직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들의 약탈행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8년에 왜구에 대해 '해적행위 금지령'을 내릴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한편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해있던 오키나와섬을 중심으로 한 류큐왕국은 중국과 일본사이의 중개무역을 행했는데, 이들은 중국으로부터 합법적인 교역허가를 받았으며, 멀리 말라카와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술탄국, 심지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령 필리핀과도 교역함으로써 번영을 누렸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매년 류큐는 150척의 무역선을 동남아시아로 띄웠는데, 이중 61척은 베트남으로, 10척은 말라카로, 10척은 파타니로, 8척은 자바섬으로 보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류큐의 교역은 1607년 큐슈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시마즈 가문의 침략으로 인해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일본은 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 - 1543.1.31~1616.6.1)시대부터 중국및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주인선(朱印船) 무역을 시작했는데, 주인선 무역이란 막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는 뜻의 붉은 도장이 찍힌 면허증을 소지한 무역선에 한해 중국내 항구 기항을 허가하는 방식의 통제무역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통해 해적행위를 억제함과 동시에 그가 신뢰하는 영주들과 대상들에게 집중적으로 면허증을 부과함으로써 세력안정에 기여합니다. 주인선무역은 도쿠가와 막부의 그리스도교 탄압과 쇄국정책 이전까지 계속됩니다. 이 시기 일본은 하세구라 로쿠에몬 쓰네나가(支倉六右衛門常長 - 1571~1622)라는 외교관을 에스파냐와 로마 교황청에 파견했는데, 그는 마닐라 항로를 통해 필리핀과 멕시코도 방문했으며 대서양항로를 통해 로마교황을 알현하기도 합니다. 프랑스 화가 끌로드 드뤼에가 그린 1615년 로마에 채류하고 있는 하세구라 쓰네나가와 그가 타고온 배의 그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지도를 모방한것이 분명한 1607년경 일본의 포르톨라노 해도의 모습 이 시기 동남아시아에는 주인선무역을 통해 많은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화교나 포르투갈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만의 집단촌락을 이루고 있었으며, 대장장이 일이나 상업교역 등에 종사했습니다. 당시 시암왕국의 수도인 아유타야에는 1500명 가량되는 일본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태국어로 '일본인 마을'이란 뜻으로 '방 이푼' 이라고 불렀습니다. 전국시대에 멸망한 가문의 무사들도 흘러들어가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중에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 - 1590~1630)라는 인물은 특히 많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가 어찌해서 일본을 떠나 타이로 흘러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는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가문편에서 참전했다가 패배해 도주했거나 시마바라의 난 이후 도주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는 '방 이푼'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타이의 고위 귀족칭호인 '쿤' 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는 1630년에 300명의 일본무사들이 포함된 부대를 이끌고 타이의 군사활동의 참여했으며, 그는 오늘날 말레이시아 국경 근처에 위치한 나콘 씨 탐마랏(นครศรีธรรมราช)이라는 지역의 태수로까지 등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일본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아유타야 왕의 음모로 인해 암살당했으며, 그가 죽고나서 1633년에는 아유타야의 '방 이푼'이 왕의 군대에 의해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포르투갈식 옷을 입고있는 일본인 천주교 신자들 (吉利支丹 - 기리시탄)의 모습. 17세기 초 일본 목판화 일본인 용병은 타이 뿐만 아니라 타이의 오랜 적국인 미얀마에서도 고용되었으며,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고있던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인에 의해서도 고용되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일본인용병들은 그리스도교를 믿었기 때문에 유럽인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는데, 공식적으로 1623년에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수도인 자카르타에 해당되는 바타비아에서 일본 사무라이 9명이 토착 군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부터 고용되었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한편 동시대 유럽인들은 일본인에 대음과 같은 기록을 남깁니다. "일본인들은 육지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바다로 나가기만 하면 모든 주민들이 그들을 두려워한다." -영국의 에드워드 마이클번 경. "일본인들은 거칠고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본국에서는 양과 같지만, 해외로 나가기만 하면 지독한 악마로 변한다." - 1615년경 네덜란드 총독의 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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