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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홍수설화에 나타난 신과 인간의 대립담론 -5
게시물ID : religion_156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X-V471
추천 : 4
조회수 : 56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11/23 00:46:31
<장자못>설화의 며느리와 <목도령>설화의 목도령이 모두 구세계와 결별해야만 하는 금기를 어겼음에도 화석과 재생 장애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은 단순히 홍수의 원인과 결과에 각각 치중했기 때문은 아니다. <장자못>설화의 며느리가 돌이 되는 것은 홍수로 세상을 파괴한 신을 거부하고 스스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목도령>설화는 동일하게 금기를 어긴 목도령이 인류를 재생하는 데 장애를 겪는다. 이것은 <돌부처>설화에 대
해 대립담론을 꺼낸 <장자못>설화에 대해 <목도령>설화가 다시 반론을 펼치는 것이다. 며느리가 신과 결별하고 인간으로서 스스로 인류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에 신을 거부한 재생이 결코 순탄하지 않으리란 의미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홍수를 놓고 신과 인간이 대립하는 가운데 <장자못>설화가 신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고자 했다면 신과 대립해서는 결코 그 삶이 순탄하지 않으리란 뜻을 <목도령>설화는 전하는 것이다. 목신이 소년을 구하는 목도령에게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으리라.”고 말한 경고는 신을 거부하고 자립하려는 <장자못>설화에 대한 재반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남매혼>설화는 <목도령>설화에 비해 인류의 재생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서 인용한 것처럼 홍수는 맨 처음에 간략히 언급되고 서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인류를 재생하는 것이다. <남매혼>설화를 언급할 때 주로 다루어지는 손진태의 것에서 인류 재생의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물이 다 걷힌 뒤에 男妹는 世上에 나와 보았으나 人跡이라고는 구경할 수 없었다. 만일 그대로 있다가는 사람의 씨가 끊어질 수 밖에 없으나 그렇다고 兄妹間에 結婚을 할 수도 없었다. 얼마 동안을 생각하다 못하여 兄妹가 各各 마주 서 있는 두 峰 위에 올라가서 계집아이는 암망(구멍 뚫어진 편의 맷돌)을 굴려 내리고 사나이는 수망(下部石臼)을 굴려 내렀다.(或은 망代신 靑솔개비에 불을 질렀다고도 한다.)그리고 그들은 各各 하느님에게 祈禱를 하였다. 암망과 수망은 異常하게도 山골 밑에서 마치 사람이 일부러 포개 놓은 것 같이 合하였다. (或은 靑松葉)에서 일어나는 煙氣가 空中에서 異常하게도 合하였다고도 한다.)兄妹는 여기서 하느님의 意思를 짐작하고 結婚하기로 서로 決心하였다. 사람의 씨는 이 兄妹의 結婚으로 因하여 繼續하게 되었다. 지금 많은 人類의 祖先은 實로 옛날의 그 두 男妹이라고 한다.43)
위 설화는 한국홍수설화에 있어서의 근친상간 주제를 다룰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다른 것들과 달리 여기에서는 남매 두 사람만이 살아남아 인류 재생에 있어서 근친상간이란 문제를 맞이한다. 이런 남매의 결합에 대해 “신화적 시원”으로의 회귀44)로 보거나 한국창세신화와 그 인식을 연결해 보면서 “자연과 문화의 문턱에서 자연으로의 역행을 통해 문제를 해결”45)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장자못>설화의 인간관계 설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장자못>설화는 <돌부처>설화에 비해 생존자와 구세계의 관계를 밀접하게 함으로써 구세계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세계와 생존자라는 차이로 인해 가족이지만 비혈연관계로 설정됐다. 그런데 <남매혼>설화에서는 남매라는 극단적으로 가까운 혈연관계가 나타났다. 또한 이러한 관계 아래에서는 인류 재생에 있어 근친상간이란 문제가 자연스럽게 부각된다. <장자못>설화에서는 가족 관계가 신의 파괴에 대한 인간의 항변에 대한 서사적 근거로 작용하면서 스스로 인류의 기원이 되도록 했는데 <남매혼>설화는 그러한 가족 관계가 지나치게 가까워져 근친상간의 문제가 불거짐으로써 오히려 인류 재생에 파탄이 나타나는 것이다. 혈연적으로 너무 가까운 남매간이기 때문에 오히려 결혼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남매혼>설화의 인물 설정이 <장자못>설화의 지향을 극단화해서 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냄으로써 반론을 펼치는 것이다. 이렇게 가까운 혈연은 <목도령>설화에서 목도령이 동일한 남자아이를 구함으로써 인류 재생에 장애를 초래하는 것과 그 담론의 지향이 같으면서도 극단적이기에 더욱 문제를 또렷하게 만든다. 근친상간은 바로 <장자못>설화나 <목도령>설화의 의인 선별이나 금기를 모두 집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설화들에서는 한쪽이 의인 선별을 통해 구세계를 상징하는 존재인 데 비해 여기에서는 모두 홍수에서 살아남았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지금까지 <돌부처>설화에서 <장자못>설화, <목도령>설화로 이어지는 담론적 상황을 통해 이해가능하다. <돌부처>설화에서 제시된 홍수에 대해 <장자못>설화에서는 생존자와 구세계를 가족 관계로 만들어 신의 질서를 거부하고 인간적 가치를 지향했다. 이에 대해 <목도령>는 구세계의 존재를 살려냄
으로써 인류 재생에 문제가 초래된다고 하여 <장자못>설화의 의미에 대해 반박했다. 즉, 홍수를 불러온 신의 질서를 반대하는 쪽은 생존자와 구세계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는 것에서 그 타당성을 획득하려 했고, 신의 질서를 옹호하는 쪽은 홍수에서 악에 물든 구세계의 존재를 꺼내줌으로써 인류 재생에 문제를 초래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따라서 이를 극단화한 <남매혼>설화에서는 <장자못>설화의 지향과 <목도령>설화의 지향을 합해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를 홍수에서 살려낸 것이다. 가족을 잊지 못해 뒤돌아본다면 가장 가까운 가족을 홍수에서 건져내 주고 그로 인해 초래되는 인류의 재생, 신세계 성립에 있어서의 파탄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남매혼>설화는 단순하게 <목도령>설화가 의미하는 것을 더욱 강조된 형태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근친상간을 해야 인류를 재생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남매는 각각 맷돌을 굴리거나 연기를 피워 그것들이 합쳐지는 것을 통해 하느님의 허락을 구한다. 앞서 남매가 살아남음으로써 제기된 파탄은 형태적으로 <장자못>설화를 극단화함으로써 거꾸로 그 의미에 있어서는 <목도령>설화가 재강조하는 신의 질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
런데 이처럼 천의시험을 통해 남매가 근친상간에 대한 허락을 받음으로써 더 이상 신의 질서 지향을 일방적으로 내세우지 않게 된다. 기껏 강조했던 신의 질서가 신의 허락에 의해 한순간에 뒤집힌다. 이로써 인류 재생 앞에 놓인 문제는 신에 의해 해결된다. <장자못>설화는 가족 관계를 통해 신의 질서를 거부했고 <목도령>설화는 구세계와 결별하지 못하는 것이 초래할 인류 재생에 있어서의 문제를 말했다. 이렇게 홍수를 두고 신과 인간이 대립하던 문제는 <남매혼>설화에 와서 그 모두를 끌어안고 극적인 화해를 이룬다. 인간은 구세계와의 결별하지 못하는, 즉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를 그 극단적인 형태인 근친상간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살아남은 남매는 천의시험이란 형태로 신을 향해 화해의 손짓을 하고 구세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인간을 묵묵히 지켜보던 신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신과 인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4. 맺음말
한국의 홍수설화가 가운데 신성이 등장하는 것은 크게 홍수 원인담과 결과담으로 나누어져 존재한다. 그러나 아직 이들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의미망을 세밀하게 다룬 작업은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홍수신화의 주요한 두 서사인 홍수로 인한 파괴와 그 이후 인류의 재생이란 주제 아래에서 이들 간에 형성된 의미망을 고찰했다. 이에 따른 결론은 본문의 논의를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홍수 원인담에는 <돌부처>설화와 <장자못>설화가, 홍수 결과담에는 <목도령>설화와 <남매혼>설화가 속한다. <돌부처>설화는 홍수신화로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독교의 노아의 홍수와 거의 동일한 서사 구성을 갖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돌부처는 홍수를 예조하여 홍수를 회피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기원이 되는 조상신격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돌부처와 콘텍스트적으로 유사하게 기자치성의 대상이 되는 것이 <장자못>설화에 돌로 등장한다. 신의 금기를 어긴 며느리가 변하여 만들어지는 돌이 조상신격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홍수를 초래한 신성 모독이 절멸되는 것과 비교된다. 둘 다 동일하게 신에게 죄를 범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홍수로 파괴되고 다른 하나는 인류 재생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통사적으로 이해할 때 신에 의한 홍수에 대해 인간이 그 신의 질서를 거부하고 스스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겠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즉, 신성 모독으로 맞이한 홍수 상황 아래에
서 또다시 금기를 어겼음에도 새로운 인류의 기원이 된다는 것은 홍수로 세계를 파괴하는 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장자못>설화는 이런 의미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생존자와 구세계를 비혈연의 가족관계로 설정하고 있었다.
인류 재생에 초점을 맞추는 홍수 결과담 가운데 <목도령>설화에서는 목도령이 목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자아이를 구하고 그로 인해 인류 재생에 장애를 맞이한다. 즉, 의인으로 선별되지 못한 구세계의 존재를 구함으로써 이 이야기의 초점이 되는 인류 재생에 있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장자못>설화에서 보이는 구세계에 대한 집착에 대해 재반론을 하면서 신의 질서를 다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남매혼>설화는 남매라는 혈연의
가족관계를 설정하여 근친상간의 문제를 발생시켜 <장자못>설화의 인간적인 지향에 담긴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신이 그것을 허락한다. 이것은 홍수를 두고 신과 인간이 대립했던 관계를 극적으로 화해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홍수 이전 신과 인간이 대립했던 관계는 다시 원만한 관계로 복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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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손진태, 위의 책, 8쪽.
44) 천혜숙, 「남매혼신화와 반신화」, 계명어문학 4, 계명어문학회, 1988, 9쪽.
45) 조현설, 앞의 글, 264면. 논자는 문화를 상징하는 석가가 창세신화에서 초래한 악에 의해 미륵이 불러온 것이 홍수라고 보았다. 그리고 <남매혼>설화에서의 근친상간에 앞서 천의를 묻는 것을 석가의 악에 인간이 던지는 문제제기로 보았다. 한편 최원오는 천의를 묻는다는 것은 결국 문화를 상징하는 석가가 마련한 근친혼 금지의 도덕률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최원오, 앞의 글, 475-476쪽.) 하지만 이는 <남매혼>설화가 기본적으로 홍수 이후의 인류 재생 그 자체가 가장 기본적인 주제라는 것보다 근친상간 자체에 초점을 맞춘 논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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