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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결정지은 궁금증 하나
게시물ID : bestofbest_1564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백살이다
추천 : 681
조회수 : 52697회
댓글수 : 113개
베오베 등록시간 : 2014/04/14 17:33:37
원본글 작성시간 : 2014/04/13 09:52:22
고등학교 2학년 겨울, 아마도 기말고사마저 끝나고 남은 수업을 진행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기억이 명확하진 않네요)

물리2를 배우고 있었는데 아주아주 뒷부분 진도를 나가고 있었습니다.

기말고사도 끝났겠다 (만약 제 기억이 틀려서 끝나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시험에 비중이 작았을 겁니다) 그 때 보어의 원자 모형과 오비탈 같은걸 설명해주는 선생님의 수업을 그냥 귀로만 듣고 있었죠.

공식 외우고 그걸로 문제 푸는데 지쳐있다가, 그냥 이야기 듣듯이 들으니 물리 수업도 꽤 재밌더군요.


원자 속의 전자가 아무 곳에나 있지 않고 정해진 원궤도 반지름만큼 떨어진 곳에만 존재한다는 '보어의 원자모형'은 꽤 흥미로웠습니다.

그 이론적 배경이 되었던 드 브로이의 물질파도 그랬고, 그를 입증하는 파셴계열이니 발머계열이니 하는 스펙트럼 같은 것들도 재밌더군요.

그러다 문득,

'전자는 정해진 궤도에만 존재하고 그 사이에는 있을 수 없다더니, 그럼 도대체 두 궤도 사이는 어떻게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는건데'

라는 질문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국민학교 1학년떄 '왜 쌍이응은 없어요?'라는 질문에 반 친구들 앞에서 모욕을 들어야 했던 기억 이후로 질문을 결코 하지 않던 학생이었던 저는

그 순간부터 수업은 듣지 않고 교과서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설명 같은건 안나옵니다.

수업이 끝나고 반에서 과학 제일 잘한다는 친구한테 가서 물어봅니다. 그런거 알지도 못하고 궁금해하지도 않습니다.

용기내서 선생님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들어가 질문을 남깁니다. 물어보는 질문에 답은 안하고 뭔 책들만 권하며 읽어보랍니다.

그래서 아쉬운대로 선생님이 읽어보라고 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습니다. 이 책이랑 양자역학이랑 뭔 상관이 있다고)를 사서 읽기 시작합니다.

세상에, 재밌습니다. 그래서 또 서점에 가서 코스모스를 샀던 책꽂이 근처에서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사서 읽습니다.

아놔. 이건 재미없습니다. 그래서 또 서점에 가서 그 책꽂이 근처에서 조지 가모브의 물리열차를 타다를 사서 읽습니다.

오예, 재밌습니다. 이렇게 그 서점에 있는 비슷한 부류의 책들을 다 봤습니다.

맨날 새벽까지 디아블로만 하던 아들놈이 십년만에 책을 읽기 시작하니까 엄마는 이때다 싶었는지 책을 사달라는 대로 잘 사주십니다.


근데, 이 책들을 열심히 읽다가 문득 '아 그래서 전자가 궤도 사이를 어떻게 다니는건데, 뭐 순간이동이라도 하는겨 뭐여.'라는 궁금증이 또 떠오릅니다.

이제 주워들은 것들도 좀 있겠다, 자신감이 생겨서 선생님한테 또 물어봅니다. 아놔 또 안알려줍니다. 아마도 선생님도 모르는거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물리학과에 가면 알려주겠지.

이 때가 고3 하고도 여름방학을 향해 달려가던 시점이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사는 도시에 있는 국립대학교의 물리학과에 진학했습니다.

대학교에 오니 말그대로 신세경이더군요. 재미없는 화학이니 생물이니 사회니 이런거 하나도 안배우고

재미있는 물리만 공부해도 점수가 나옵니다. 비록 수학 때문에 조금 힘들긴 하지만 하다보니 수학도 재밌습니다. 이 쉬운걸 왜 고등학교땐 못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다녀오고 복학해서 양자역학을 접합니다.

파동함수. 이거였습니다. 드디어 한 5년간 묵혀왔던 궁금증이 풀립니다.

이 때의 희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정신차려보니 물리학자가 되어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시험에 나오지도 않고 점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저 해괴한 궁금증 하나가

시험만 봤다하면 수학과 과학은 양,가를 받길 일쑤였던,

근의 공식도 하나 못외워서 이차방정식 풀려면 일일히 전개해서 풀어야 했던,

고3이 되어서도 새벽까지 디아블로한다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특별할것 하나 없던 학생 하나를 물리학자로 만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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