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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진실
게시물ID : religion_156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킹스마일
추천 : 7
조회수 : 94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2/02 23:20:02
예수가 실존 인물이었다고 가정을 하여, 현재의 신학적 성과와 고고학적 성과를 종합해 재구성하면,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와 실제 예수는 넘사벽으로 차이가 난다.

기본적으로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기 위해 부여된 명칭으로, 당대의 본디 발음으로는 예슈아다. 구약 성경에서 나오는 예호슈아, 즉 일명 여호수아와 같은 의미의 단어인데 이 시기에는 발음이 이렇게 변해있었다.

실제의 예수는 '사해평등주의'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사해평등전도의 근거들은 모두 후대에 첨삭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28장 16~20절인데, 이 부분은 그의 말이 아니라 후대에 첨삭된 것이다.(SBS 그것이 알고싶다 - 거리에서 신앙을 파는 사람들 中 한신대 現 총장 채수일 교수의 설명) 이러한 마태복음 28장과 유사한 내용이 담겨져있는 마가복음 16장 9절~20절도 후대에 첨삭된 것이다.(SBS 그것이 알고싶다 - 거리에서 신앙을 파는 사람들 中 제 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김진호 연구실장의 설명)

사해평등주의를 이야기하지도 않았고, 무차별적인 사랑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또한 요세푸스의 저작을 봐도 무차별적인 사랑을 주장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예수가 사랑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요세푸스의 다른 유대 고대사나 유대 전쟁사의 기록에서 지칭하는 '사람'이나 '이웃'이 유대인이듯이 유대인들이다. 신약에서도 예수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자주 언급할 뿐, 그 범위가 더욱더 넓어지지는 못한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의 유물 중에서 여성들이 교회에 기부한 물건이 발견되거나 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는 유대인의 보편적인 인식과 다르게 유대인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 높게 평가하며, 그들을 차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초기 기독교 내에서 여성들의 지위가 높기만 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현대적 용어로 풀이하면 유대 민족주의자가 가장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예수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난동을 부린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데, 요세푸스 뿐만아니라 유대인과 로마의 기록에도 없다. 요세푸스의 저작이나 유대인들의 저작을 보면 유월절에 일어난 특이한 일들이 기록되고는 한다. 대표적인 것이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가 유월절에 모함에 당해 돌에 맞아 죽은 것을 산헤드린에 기록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에서 난동을 부린 예수 이야기만 쏙 빠져있다. 그가 행했다는 산상수훈도 마찬가지다.(NGC 예수에 대한 10가지 논란 - 예수는 누구인가?) 산상수훈도 문학적 각색일 뿐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신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예수의 산상수훈은 행적을 축소시켜 비유한 문학적 장치라는 것이 대세다. 랍비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당시 랍비가 되려면 '결혼'을 해야했다. 구약성서에 나와있듯이 유대인들은 자손을 번창시키는 것도 하나의 책무였기 때문인데, 예수의 결혼은 부정되고 있기 때문에 랍비라고 보기도 어렵다. 자칭 '랍비'라고 이야기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를 랍비라고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사실을 바탕으로 실제 예수를 재구성해보면 어떨까?

나사렛의 가난한 유대인 목수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예슈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때문에 예슈아는 아랍인과 다소 닮은 전형적인 유대인의 외모를 가졌을 것이고, 목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체격이 우람했을 것이다. 그는 주위의 유대인들에게 매우 친절하였을 것이며, 로마 제국에 대해서 그리 좋은 의견을 피력하지는 않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영민하고, 영특하다는 점이 다르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고, 성인이 되는 시절에 홀연히 고향인 나사렛을 떠나 예루살렘 성지를 향해 순례를 시작한다. 그 3개월 혹은 3년이라 주장되는(공생애) 여정 속에서 예슈아가 결혼도 하지 않고, 스스로를 랍비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몇몇과 마찰을 빚었을 것이 자명하지만, 그 속에서도 제자 몇을 만들었고,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예루살렘에서 여성들의 권리 신장과 로마에 대한 반항과 독립을 주장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로마와 결탁하고 있던 제사장들과 이러한 예슈아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던 로마 당국은 그런 예슈아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그를 죽일 기회를 노린다. 예슈아는 피신을 하며 가르침과 유대 독립 운동을 이어가지만, 결국 후대에 유다라고 불리는 한 제자의 배신으로 붙잡혀 폰티우스 필라투스라는 로마 행정관에 의해 재판을 받고 죽고 만다.

그의 제자들은 예슈아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슈아의 가르침과 독립 의지를 이어나갔을 것이며, 그러한 가르침을 이어가다가 얼마되지 못해 모두 로마에 의해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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