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경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신의 말씀대로 이교도는 배척해야 마땅하다, 이렇게 종교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extremist 극단주의자/급진주의자 라고 하며 또는 fundamentalist근본주의자 라고 부르죠.
그에 반해 종교의 핵심은 사랑이다, 당연히 그런 폭력적이거나 어불성설인 경전 내용은 과거의 유물이거나 비유에 불과하고 현대의 상식과 사랑에 기반하여 재해석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점잖고 '좋은' 우리 종교를 까지 마라, 나아가서 종교는 다 똑같이 사랑이니까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봐라 는 입장의 사람들을 liberal자유주의적 종교인이라고도 하고, moderate 중도주의자 라고도 합니다.
이 중도주의자들이 가진 문제점과 폐해를 샘 해리스가 매우 다양한 각도로 조명하였습니다. 대충 핵심만 번역해서 씁니다.
우선 말해둬야 할 점은, 중도주의자들은 극단주의자들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죠, 중도주의자들은 비행기로 건물을 들이받지 않으니까요. 종말론적 예언에 현혹되어 인생을 걸지도 않고.
하지만 중도주의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1) 중도주의는 근본주의를 보호해 주게 됩니다. 중도주의자들은 '신앙' 자체를 비판하는 것을 금기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존중받기를 원하죠. 특정 종교에 소속돼 있다는 사실 자체를 존중받기를 원하죠. 그래서 사람을 특정 종교에 소속시키고 자녀를 다른 종교에 배타적인 특정 종교인으로 키운다는 이 과정 자체의 윤리적 타당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져 버립니다. 이러한 '존중'이라는 방패막 아래에서, 우리들은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을 향해 꼭 해야 하는 거친 비판마저 하기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다 금기가 됐으니까요. 신앙이란 존중받아야 한다고.
2) 중도주의는 우리가 종교들간의 차이점에 주목하는 것조차 어렵게 합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은 티벳 불교나 자이나교와 달리 그 핵심 교리에 폭력이 담겨 있습니다. 날벌레가 입에 들어와 죽을까봐 걱정하는 자이나교를 이리저리 왜곡해서 살인자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슬람이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9/11 테러리스트들 19인이 그런 행위를 저지른 이유는 그들이 교육수준이 낮아서도 아니고 생활환경이 궁핍해서도 아니고 사회적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도 아니며 오로지 그들의 종교가 약속하는 사후의 보상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정 종교의 고유한 특성이 낳는 폐해를 논하는 것은 필요한 일인데 중도주의자들은 그 자체를 금기시하며 그 폐해의 원인을 종교 이외에서만 찾도록 강요합니다.
3) 중도주의자들의 문제점은 그들 자신이 자신의 중도주의에 의해 눈이 멀게 되고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중도주의자들은 72명의 처녀와 낙원에 확신을 가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질 알지 못합니다. 침상 옆에 두는 경전이 문자 그대로 신의 완벽한 말씀임을 확신하는 그 기분이 어떤 것인지 중도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전Jihad을 벌이는 테러리스트의 행각을 영상으로 접하면, 그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 당혹하는 사람들은 바로 중도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중도주의자는 '저건 신앙에 의한 것일리가 없어,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영향이거나 뭔가 다른 원인임에 분명해, 뭔진 모르겠지만 종교에 의한 건 아니야...'라고만 생각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기만 합니다. 이러한 폭력사태들이 벌어지는 게 아무튼 종교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만 반복하는 것이 중도주의자들의 문제점입니다.
4) 중도주의는 지적 수준의 바닥을 드러냅니다. 이성을 사용함에 있어서 원칙 없는 몰지각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최소한 근본주의자들은 근거에 대해 논하기라도 하지요. 왜 성경을 믿냐고 물어보면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라거나 예언이 모두 성취되었다거나 하는 이유를 대며 논의합니다. 좋은 이유는 아닙니다만 최소한 뒷받침하려는 노력은 하지요. 반면에 중도주의자들은 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하질 않습니다. 중도주의자들은 뜬금없이 의미를 논합니다. 삶에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를 논합니다. 그러한 담론에서 신을 다른 인생에 위로가 되는 뭔가로 바꿔보면 그것이 얼마나 어불성설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제 책에 쓴 예를 들어보죠. 당신의 이웃이 자기 뒷마당에 냉장고만한 다이아몬드가 묻혀있다고 믿는다고 합시다. 당신이 '왜 그렇게 믿지요?'라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그가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 겁니다. '그 다이아몬드가 제 인생에 많은 의미를 주니까요' '우리 가족은 매 주 일요일마다 잔디에 모여서 땅을 파는 집회를 사랑해요, 그 즐거움을 나에게서 빼앗으려는 건가요?'. 또는 그가 이렇게 답한다면 어떨까요? '저는 뒷마당에 다이아몬드가 묻혀있지 않은 세계에는 살고 싶지 않아요'. 누구라도 이런 답변이 부적절하다고 즉시 느낄 것입니다. 심각하게 부적절하지요. 이러한 답변 방식은 정신이상자나 바보의 답변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같은 사고방식을 종교라는 영역에 가져가면, 그 사고방식은 대단한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옹호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 나라의 정부기관에 선출될 수가 없을 정도로.
5) 중도주의는 또한 신학적 수준에서도 바닥을 드러냅니다. 성서를 깊게 이해하면 중도주의적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고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께 뉴스를 알려드리자면, 저도 성서를 읽어봤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중도주의자가 아니시랍니다. 성서를 아무리 읽어봐도 하나님이 '있잖아, 나중에 신대륙을 발견하고 3권 분립 정부를 세우게 되고 시민 사회를 완성하게 되면 말야, 내가 구약에서 권장한 야만적인 제도는 다 버려도 좋아'라고 써 놓은 부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종교 경전은 진정으로 근본주의의 동력원입니다. 불관용주의의 동력원입니다. 신약성서 안에는, 여러분이 Left Behind 시리즈 소설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 분노로 가득한 예수, 지옥불에 사람을 던져버리는 예수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독자에게 그렇게 발견되도록 쓰여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이건 그냥 비유야'라고 설명해주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나 성 어거스틴을 좋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아퀴나스는 이단자들을 즉시 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단자들을 고문해야 한다고 주장했구요. 어거스틴이 고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한 내용은 바로 중세 이단심문Inquisition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며 경전을 믿는다는 전제 하에 완벽하게 합리적인 결론입니다. 옆집의 이교도는 옆집의 소아강간범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가 되죠. 옆집의 이교도는 당신의 자녀의 영혼이 영원히 멸망하도록 만들 대화를 할지도 모르는 존재니까요. 중도주의자들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는 게 가능하다는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6) 마지막으로 중도주의의 문제점은 기존 종교의 미신적 전통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그저 약화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비판적, 생산적 논의 자체를 그저 하지 말도록 유도하여 현대에 적합한 대안적 가치관과 세계관을 만들기 위한 논의에 방해가 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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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보니 거의 자막용으로 다 번역하게 됐네요. 2번이 너무 길어서 확 잘라버렸습니다. 중동과 이스라엘이 서구에 탄압받듯 티벳도 중국에 만만찮게 탄압받는데 왜 티벳엔 폭탄자살테러가 없을까, 9/11 테러리스트들의 인물정보들이 이러할진대 왜 다들 종교 이외의 원인을 찾으려고 억지를 부리는가, 등등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