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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밀양 윤간 사건과 하얀 그랜드 피아노
게시물ID : lovestory_157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앤다잊어。
추천 : 10
조회수 : 57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04/12/11 12:05:52
유머글은 아니지만, 가슴에 와닿아 퍼왔습니다.
www.seoprise.com 토론방에서 이광재님의 글 입니다.

들어가기 전)
국회의원 이광재와 동명이인이니 혼동 없으시길 바랍니다. 

많은 생각으로 망설였다. 묻어둔 기억, 첫사랑의 기억을 꺼내 공론화 시키고 갑을박론 한다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날 아는 벗들은 아직 그 사람의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중에 그녀의 실명이 거론될 수도 있고 아직 성숙되지 않은 사회에서의 그녀를 보는 눈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오랜 고민 끝에 벗들을 믿고 글을 쓴다. 

그녀를 만난 것은 신촌 어느 레스토랑이었다. 낮에는 경양식 위주의 영업을 하며  저녁엔 칵테일을 파는, 당시엔 상호만으로도 유명한, 신촌에서 거의 유일하게 24시간을 영업하는 곳이었다. 중앙엔 하얀색 그랜드피아노가 놓여있고 시간마다 공연을 하는, 나무 탁자와 의자, 적당히 어두운 조명과 젊은 대화들, 페퍼민트와 진 토닉이 가장 많이 팔린다는 곳이었다. 

고대 주변이야 막걸리 집이 유명하지만 연대 앞 주변은 이렇듯 약간은 서구적 문화가 주류를 이뤘고 ‘양키 고 홈“을 외치면서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파라독스가 존재하는 나와 연대 거리의 만남은 늘 상 묘한 끌림이 존재했다. 지금은 신촌 카바레로 바뀌어 불리는 곳이지만 당시엔 젊음을 주체 못한 아이들이 모이던 ”Come 88 나이트클럽“이 있었고 십대의 방황에 흔들거리던 나 또한 그곳을 자주 찾았던 기억, 높은 뚝방을 따라 길게 늘어선 경의선 철길을 걸으며 나의 불확실하게만 생각하던 미래의 혼란들을 정리하던 곳이기도 했다. 

한 눈에 반해 버렸다. 빨간 립스틱에 희고 긴 담배를 물고 있던 그 아이, 조금 전까지 붉은 색 조명아래 하얀 그랜드 피아노를 두드리던 모습을 그대로 담고 다가오는 그 아이에게 온통 시선을 뺏기고 말았다. 동그란 눈으로 날 쳐다보며 웃던 까만 눈동자와 흰 치아가 어우러진 미소, 그렇게 시작된 첫사랑이 조금은 더 많은 우연을 거쳐 필연으로 깊숙이 다가왔고 결국 내가 살아가는 가치관의 일부를 강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둘의 사이를 서슴없이 연인이라 부를 수 있을 즈음의 비 오던 날, 그 아이는 내 어깨에 기대 흐느꼈다. 게리쿠퍼와 잉그리트 버그만이 출연했던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짧은 머리칼과 까만 눈동자를 가진 잉그리트 버그만이 게리쿠퍼에게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부분을 아직 잊지 못할 시린 기억으로 가슴에 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그녀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윤간”, 여러 명의 남자가 한 여자를 강간하는 것을 윤간이라 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좋아하던 대학생 오빠가 있었고 그 아일 믿었는데 비 오던 어느 날 늘 가던 뒷산에서 그 남자아이와 친구들에게 윤간을 당했다는 고백이었다. 이후 비가 내리기만 하면 그 아이는 아무소리 없이 사라졌다 몇 시간 뒤 흑이 잔뜩 묻은 맨발에 흠뻑 젖어 흐트러진 머리와 반쯤 풀린 눈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 그녀는 늘 “오빠, 나 많이 피곤해”란 말만을 던지고 내 품에 쓰러질 듯 안기는, 죽은 듯이 곤한 잠으로 종일을 꼼짝 못하는 일들을 반복하곤 했다. 

물론, 달래듯 물어 그놈의 이름을 알아냈고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패주었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노라 무릎 꿇고 비는 놈의 비굴한 모습까지를 보았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친한 벗들에게 조차 그녀가 그놈을 좋아했다는 것이“ 일차적인 잘못이란 말을 들으며 절교를 선언하기도 하는 일도 있었고 입에 담기조차 싫은, ”대한민국의 강간죄“가 얼마나 우스운 법인지를 알아야 했다. 

48시간 안에 경찰서나 파출소를 찾아가 가해자 스스로 강간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끊고 여자경찰 하나 없는 곳에 가서 가해자가 했던 성행위를 소상히 진술해야 한다. 삽입횟수 체위 성기의 모양 심지어 여자의 음부에 난 상처까지를 남자 경찰에게 확인시켜줘야 하는, 더럽고도 상식에 준하지 못하는 과정임을 알았다. 이런 조서꾸미기가 끝난다 하더라도 남녀가 서로 합의하고 행위한 “화간”이 아니냐는 장난석인 질문을 수차례 받아야 하는, 결코 여성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정상적이지 못한(?) 병이 생겼다. “간통은 해도 강간은 하지 않는다.”란 진심담긴 농으로부터 시작하여 돈으로 사고파는 매춘,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성행위에 대한 이해는 물론 증오에 가까운 거부감이었다. 이런 사고들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데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어쩌면 깨지 못한 놈이라고, 혼자만 잘난 척 한다는 비안냥을 받기도 했지만 그만큼 그녀와의 만남과 고백이란 어릴 적 충격은 컸다. 심지어 술자리에 도움을 주려 나오는 여성을 옆자리에 앉혀 놓고 술을 마시는 것이 너무도 부담스런 때문에 꼭 건너편 테이블에 있게 하는, 아주 우스운 놈이 되 버렸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그녀와 해어진 아픈 추억은 기억조차 나질 않지만 그녀가 내게 던진 “강간”이란 화두는 내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잘못된 사회관습과 더러운 법,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바뀌는 우스운 관례들, 피해 여성의 단 1%도 신고하지 않는 현실과 용기 내어 신고를 해도 승소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제도적 맹점들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아니 피해자를 벌한다 해도 그가 받는 죄 가에 비할 수 없는, 피해 여성이 짊어지고 가야 할 사회적 냉소와 낙인들에 대한 부조리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행위는 남자와 여사 상호간의 사랑을 바탕에 깔고 하는 것이다.”란 간단한 상식조차 서지 못하는 사회가, 그런 교육조차 외면하는 사회란 것이 소중하다면 소중할 수 있는 개인적 첫사랑의 이야길 꺼내 놓길 강요 한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시간이 흘렸다.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정당에 몸을 담고 있다. 국회의원 몇 몇과는 벗으로 친구로 지내고 있다. 어쩌면 지금도 어디선가 하얀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을 그녀를 기억하게 하는 이유, 밀양 고교생 집단 성폭행사건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정당에 있는 이유와 몫을 하나 더해주고 있는 듯 하다. 강간에 대한 불합리한 법에 대한 끊임없는 제도적 제안이 나의 몫인 것 같다. 

“밝음아, 성행위는 즐겁고 행복한 것이기도 하지만 세심한 배려와 서로간의 사랑을 바탕에 두어야 한단다. 더하여 두 사람이 짊어지고자 하는 행위에 대한 의무의 의지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란다.”

시간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아들놈에게 늘상 주지시키는 말이다. 어쩌면 밀양 고교생 집단 성폭행의 간접적 가담자가 이 땅의 일그러진 성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존재함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고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밀양 고교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온전하게 해결하는 방법이 아닐까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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