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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단편,브금]속 박
게시물ID : panic_142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arDream
추천 : 4
조회수 : 18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04/19 14:05:54
남자가 찾아온 것은 이른 아침 무렵이였다. 비싸보이지는 않으면서도 단정하고 깔끔해 보이는 정장과 조금은 낡은듯한 구두 그리고 특유의 사무적 말투는 오랜동안 사무직에서 일해온 그의 경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했다. "하기수씨 그러니까 실종 신고를 하시려는 겁니까?" 나는 키보드의 스페이스바를 눌러 화면 보호 기능으로 꺼져 있던 모니터의 화면을 되돌리면서 여느때 처럼 그에게 물었다. 남자는 조심스레 앉은 자세를 바로 잡으면서 말을 꺼냈다. "사실 꼭 그렇다고 말씀드리기도 힘들군요..." 나는 양손을 모으며 남자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상대방의 말을 주위깊게 듣겠다는 의지를 무언중에 표현하기 위해서 생각해낸 나름대로의 기술이다. 남자는 그런 나의 태도에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생화학과 관련한 기술을 보유하고 그를 통한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벤쳐 회사입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매출로만 따지자면 여느 대기업이 부럽지 않은 소위 알짜배기 기업이죠. 그리고 지금의 회사가 있기까지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지금의 사장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사장님.. 그러니까.. 박경훈씨가 행방불명이란 거죠" "그렇습니다. 벌써 2주째 아무런 연락도 없이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여느때의 사장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에 놓여있는 메모지에 2주라는 글짜를 아무 의미없이 끄적였다. "마지막으로 박 사장님을 보신게 언제 어디서 였습니까?" 하기수는 잠시 말없이 기억을 더듬더니 역시나 특유의 조심스런 말투로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뵌건 회사였습니다. 퇴근하시는 모습을 2주전에 보았었죠.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요? 사장님으로 부터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날은 쉬겠다는 전화였죠." "그렇군요..." "하지만 그뒤로 연락이 끊겼습니다" 나는 앞으로 숙이고 있던 몸을 뒤로 빼며 자판을 두드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략하게 양식에다 입력했다. "그렇다면, 집에서의 연락이 마지막이란 말인데 집에는 연락해 보셨나요?" "물론이죠, 그 뒤 이틀동안 연락이 없으셔서 집에 전화를 해봤더니 전화를 하신 다음날 별 말씀 없이 여행을 떠나셨다고 하더군요." "여행이라.. 누가 그런 얘길 한거죠?" "부인께서 전화를 받으셨죠." "부인이라.. 사장님의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죠?" "아직 30대 중반이셔서 부인과 단둘이 사시고 계십니다. 사장님은 일찍 부모를 여위신데다 형제나 가까운 친척도 없으셨죠..." 나는 짐짓 놀란듯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자수성가한 분이신가 보군요." "예 말그대로죠.. 지금까지 모든걸 혼자 힘으로 이루신 훌륭한 분이십니다." "박 사장님을 존경하시나 보군요?" 나의 질문에 하기수는 조금은 부끄러운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저보다 어린 분이신데도 일을 하실때 보면 배울것 투성이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면이 있는 분이랄까요." "부인은요? 말씀대로라면 박 사장님과 마지막으로 접촉이 있었던 사람은 지금까지는 사장님의 부인이신듯 한데.. 어떤 분이시죠?" "사모님 역시 훌륭한 분이십니다. 사장님이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사모님께선 타고난 귀족이라고 할까... 이런 표현에 거부감을 가지실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정치가이신 아버님과 성악가인 어머님 사이에서 태어나셔서 곱게 자라신 분이시죠. 단순히 그뿐만 아니라 어릴적 부터 피아노와 미술에 재능을 보이셔서 수상경력도 화려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학생시절 예능뿐 아니라 학과 성적도 우수하셔서 대학에 진학하실땐 전공을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과 선생님들이 아쉬워 했다고 할 정도였다니 말입니다." 나는 좀 의아해져서 물었다. "사장님의 부인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계시는군요?" "사장님과는 회사 설립때부터 함께해온 사이라서 서로간에 비밀 같은건 좀처럼 없으니까요" 하기수는 나의 질문에 조금은 당황한듯 웃으며 대답했다. "말씀대로면 완벽한 두분의 결합이군요.. 사장님과 부인 사이에 관계는 어땠습니까? 서로 비밀이 없는 사이라면 그런 것도 대충은 알고 계시겠죠." 나의 질문에 하기수는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혹시라도 오해하실까봐 분명히 말씀 드리자면 두분의 관계는 굉장히 좋았습니다. 아주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셨죠, 물론 과중한 업무로 사장님이 바쁘셔서 자주 함께 하시지 못하긴 했지만 두분이 함께 계실때 보면 정말이지 다정한 한쌍이셨습니다." "알겠습니다. 단지 의례적인 질문이였으니 신경쓰지 마십시요. 그래서 연락이 끊긴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납취라던가 사고라던가.. 단서가 될만한 얘기는 없습니까?" "그게..." 나의 질문에 하기수는 잠시 머뭇 거렸다. 무언가를 말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였다. "사실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까지 오게 된거구요..." "이상한 점이라뇨?" "사장님께서 1주일이나 연락이 없으셔서 집으로 직접 찾아갔더랬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더군요. 여행을 가셨다는 분의 차가 차고에 그대로 있는걸 봤거든요.. 게다가 사모님께서도 행동이 좀 이상했습니다." "이상했다니 정확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하기수는 다시 말없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의 표정에는 고민의 빛이 역력해 보였다. 무언가 자신 스스로가 인정하기 싫은 사실에 대한 고백... 그것을 느낄수 있었다. "사모님께서 집안에 저를 들이지 않으시려 했습니다." "집안에 못들어오게 했다구요?" "예, 평소에는 제가 찾아가면 곧잘 차 한잔이라도 대접하려 하시곤 했거든요. 게다가 제가 찾아간 날 미리 연락없이 찾아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차림이 굉장히... 지저분 하달까.. 피곤해 보이기도 하시고... 집안에서 뭘 하셨는지는 옷 여기저기에 얼룩이 져 있더군요. 진흙같아 보이는 것도 붙어 있고..." "그래서 여기로 바로 신고하러 오신건가요?" "사실 바로 온건 아니고 좀더 조사를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상한 점이 그외에도 여러가지 발견되더군요." "어떤 것이 말입니까?" 나는 얘기가 점점 흥미로워지자 그의 이야기를 재촉했다. "우선 집에서 쓰시던 가정부를 사장님이 마지막으로 연락하시기 얼마전에 해고하셨더군요. 말로는 다른 가정부를 쓰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지만 그후로 고용인인듯한 사람의 출입은 동네 사람들이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더 이상한 것은 고용인뿐만 아니라 사장님 내외분의 출입도 근래들어 한번도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사장님의 출퇴근 뿐 아니라 부인께서도 종종 주변을 산책하시곤 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는데 최근에는 전혀 바깥 출입이 없는듯 보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조금더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중 한사람이 바로 몇일전에 사모님께서 집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을 밤늦게 본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모님 혼자만 말입니까?" "예,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사모님이 혼자, 차에서 무언가 무거워 보이는 짐을 집으로 옮기고 계셨다는 겁니다. 평소에 별로 알고 지내는 처지도 아니라서 그냥 무심코 지나쳤다고 했지만 그 밤중에 그것도 그런 부자집 사모님께서 혼자 짐을 나르는 모습은 이상하게 보지 않을수가 없었다는 거죠..." "솔직히 점점 흥미로워 지는군요.. 그래서 다시 집으로 찾아가 보셨습니까?" 내 질문에 하기수는 다시 말문이 막힌듯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았다. "사실 거기까지 조사한뒤로 바로 여기로 온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사장님을 존경하고 사장님 가족을 좋아합니다. 완벽하고 훌륭한 가정이라고 생각해 왔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들을 접하고 나니까 자꾸만 불안하고 불손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기 겁나기도 했구요.. 그래서 어저께 용기를 내서 마지막으로 사장님 집으로 전화를 해봤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응답기만 대답하더군요..." 하기수는 더이상 할말이 없어졌는지 실망과 불안이 역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뭘 해보기도 전에 벌써 조사를 다 하셨군요... 허허, 지금 말씀하신게 모두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영장을 받아서 사장님 집을 조사해 볼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십시요... 더이상 사장님의 행방을 모르면 회사로서도 타격이 큰데다가 저 역시도 불안해서 더이상 가만히 있을수가 없습니다." 하기수의 응답과 동시에 모든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집안에서 만약 모종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최대한 빨리 확인하는 것이 좋을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영장과 함께 나와 하기수 그리고 저택진입을 위한 기술자와 경관 몇명이 동행하여 박 사장의 집으로 향했다. 하기수의 말대로 박 사장의 집은 굳게 잠겨 있었고 전화응답도 없었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역시 아무런 응답은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 집에서 사람이 드나드는걸 요근래 본적이 없으며 박사장 내외를 본적도 꽤 됀다는 증언을 똑같이 얻을 수 있었다. 기술자가 몇분간 공구를 들고 씨름한 후에야 육중한 대문을 열수 있었고 우리는 조심스레 정원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아름답게 가꾸워진 마당과 정원을 지나 집의 현관으로 다가가자 굳게 잠겨 있던 대문과는 달리 현관문은 반쯤 열린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내가 들어가기도 전에 하기수는 급히 먼저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고 나역시 곧바로 그런 그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하기수는 거실안의 광경을 보고는 놀라서 그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맙소사..." 하기수는 낮게 신음하며 애써 자신의 눈앞의 광경을 거부하려 했다. 넓은 거실 한편에 놓여진 하얀색 소파위에 간편한 파자마 차림의 여자가 가로누워 있었다. 그러나 이미 파랗게 편해버린 핏기 없는 피부와 그 앞의 탁자에 어수선하게 널부러져 있는 약병들은 우리가 한발 늦었음을 알수 있게 했다. 나는 탁자위의 약병 하나를 집어들어서 라벨을 확인했다. "저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성분들을 보아하니 수면제인거 같군요." "말도 안됩니다... 사모님은 자살같은걸 하실 분이 아닌데..." 하기수는 아직도 믿을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찬찬히 소파에 죽은 채 누워 있는 여자를 보았다. 핏기가 가시고 서서히 부어오르기 시작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을때 눈에 띄는 미인이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얼굴이였다. 상의는 파자마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는데 단추들이 풀어해쳐져 있어서 살며시 가슴이 드러나 있었고 반바지 스타일의 하의 역시 아무렇게나 구겨친채 말려 올라가 있었다. 하기수가 전에 말했듯 파자마 역시 여기저기 얼룩과 흙덩이 같아 보이는 것들이 뭉쳐진채 엉겨 있었다. 순간 나는 말려 올라간 하의 사이로 보이는 허벅지를 볼수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시체로 다가가 품안에서 꺼낸 볼펜으로 하의를 들추어 보았다. "뭐하시는 겁니까 형사님?!!" 나의 행동에 당황하며 하기수가 소리쳤다. "오해하지 마시고 이걸 보세요." 나는 시체의 허벅지와 엉덩이 부위에 나있는 멍자국을 하기수에게 보여줬다. 무언가 가느 다란 물체와 크고 둔탁한 물체들이 치고 지나간 상처가 분명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풀어 해쳐진 상의 역시 조심스레 들추어 보았다. 역시나 갈비뼈 부근에서 등에 걸쳐 멍자국들이 여러개 나있는 것이 보였다. "대체 그게 뭐죠...?" "누군가한테 폭행당한 흔적입니다. 뭔가 끝이 둥그런 물체에 강하게 얻어 맞았어요... 이런 상처는 종종 봤죠.."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 아신다는 겁니까?"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소위 말하는 가정폭력일 겁니다. 이 상처는 필시 골프채에 맞은 것에요." "그럴리가..." 하기수는 또다른 충격에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거 같았다. 나는 그런 하기수를 그냥 내버려 둘순 없었기에 옆에 있던 경관에게 밖으로 안내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탁자위에 들고 있던 약병을 내려놓고는 그 옆에 함께 놓여있던 공책을 들었다. 공책이라고 생각한 물체는 좀더 뚜껍고 무거웠다, 펼쳐보니 작은 크로키북임을 알수 있었다.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부인이 쓰던 물건이였음에 분명했다. 몇장을 넘기자 눈에 띄는 그림이 있었다. 작은 새가 쇠사슬에 묵인채 바둥대고 있는 모습을 샤프같은 가느다란 도구로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이였다. 역시나 나같은 아마츄어의 눈에도 상당한 실력이 느껴지는 그림이엿다. 쇠사슬에 묵인 새의 고통을 절묘하게 묘사해낸 그림의 밑에는 작은 글씨가 써져 있었다. '숨을 쉬기 힘들어.. 괴로워...' 다시 페이지를 넘기자 이번에는 슬픈 표정으로 앉아있는 소녀가 그려져 있었고 역시나 밑에는 글이 써져 있었다. '숨을 쉬기 싫다.. 살기 싫다.. 하지만 어쩔수 없이 살아간다...' 그것은 분명 부인이 남긴 일종의 일기같은 것이였다. 나는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분명 부인이 자살한 이유가 남겨져 있을 터였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 이번엔 그림이 아니라 한페이지 빼곡히 적힌 글씨들이 나왔다. '괴로워괴로워괴로워괴로워...' 연필로 쓴 글자 중간중간에는 둥그렇게 얼룩이 져 있었다. 아마도 눈물 자국일 터였다. 그리고는 얼마간 빈페에지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까의 세밀한 묘사와는 다른 거친 터치로 그려진 흉칙한 그림이 나타났다. 형체를 알수없는 그림 사이사이에 글들이 있었다. '모든것이 무너졌다... 완벽한 것은 없다...' '그에게 복수하고 말리라...' '내 인생의 모든것이 나를 옭아메고 있다.. 강한 속박.. 굴레.. 괴롭다' '그에게 보여주고 싶다, 나의 고통을 그가 느끼게 하고 싶다' 다시 페이지를 넘기자 수렁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남자의 그림이 나왔다. "김형사님!!" 2층을 조사하러 올라갔던 경관의 부름에 나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2층에서 이상한 것을 찾았습니다" "이상한거라니 대체 뭔데 그래?" "그게... 아무래도 직접 보셔야 될거 같은데.." 나는 심상치 않는 경관의 표정을 살피며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깔끔한 1층 거실과는 달리 2층은 매우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흙먼지들이 쌓여 있었고 삽과 봉투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나는 발밑에 밟혀있는 종이봉투에 적힌 글자를 보았다. '시멘트' 대체 이런 가정집에서 어디다 시멘트를 썼던 것일까란 나의 고민은 오래 가지 못했다. 2층 한쪽편이 시멘트로 완전히 발라져 있는 것이 보였고 그 앞에선 경관이 여기저기 두들겨 보고 있었다. "김 형사님.. 이거 아무래도 무슨 문이였던 모양인데요, 어떻게 할까요?" "부숴버리게.." 나는 한쪽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걸터 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1층에서 가지고 올라온 크로키북을 펼쳐서 다시 한장한장 들춰나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어디선가 가져온 공구와 해머로 젊은 경관들은 시멘트로 발라진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크로키 북의 뒤편은 이집에서 지난 2주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었다. 부인은 자신의 행동을 하나하나 상세히 그곳에 기술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자신이 벌이고 있는 비이성적 행동에 대한 일종의 고해행위였을 것이다. '오늘 남자에게 수면제를 먹였다. 어제의 폭행으로 고분고분 행동하는줄 착각한 남자는 아무 의심없이 수면제를 탄 음료수를 들이켰다. 어지럼증을 느끼는지 괴로워하던 남자는 멍청하게도 자신이 아픈줄 알고는 스스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무지한자의 한심함...' '늘어진 사람의 무게란 엄청난 것이였다. 침실에서 욕조까지 옮기는데 온힘을 다 써버린 것만 같다. 덕분에 수면제의 효과도 다한듯 남자는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다. 이때를 위해 준비한 마취제를 팔에다 주사했다. 작업이 끝날때까지 그가 움직여선 안되니까..' '드디어 정신을 차린 남자는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는데 한침이 걸렸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알게된 후로는 처절히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 주었다. 분노 공포 그리고 애원...' '다시 마취제를 놓았다. 처음 허리께까지 채웠던 시멘트를 이젠 가슴팍 까지 채울 것이다. 그러면 간신히 움직이던 다리도 못쓰게 되겠지.. 반항이 심해서 밖으로 빼놨던 오른팔을 세면대 파이프에 묵어버렸다. 오른팔은 묻혀선 안된다...' '이제 더이상 마취제는 필요 없다. 그가 할수 있는것은 오른손을 움직이는 것과 고함을 지르는 것 뿐이다. 하지만 방음제를 처리한 욕실내의 소리는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는 그곳에 오로지 자기 혼자라는 것을 서서히 느끼고 있는듯 보였다.' '욕조의 목받침 부분에 괴여 놨던 쿠션을 마저 빼버리고 시멘트로 메꾸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자유는 오른팔과 얼굴 뿐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들을수도.. 볼수도.. 말할수도 있다. 그만한 자유라면 얼마든지 행복하리라...' '드디어 마지막이다.. 때마침 준비한 시멘트도 바닥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을 마저 덮어버리자 맞춘듯이 시멘트가 다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 더 필요하다 그를 철저히 속박하고 고립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시멘트가 필요하다..' 글은 여기서 끝이 났다. 하지만 그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현장이 설명해 주고 있었다. "김 형사님 다 끝났습니다.. 근데.." 질린 얼굴의 경관이 나에게 다가왔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듯한 그 얼굴을 보고는 나도 쉽게 시멘트로 봉해졌던 문 너머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숴진 시멘트 벽을 넘어 욕실로 들어섰다. 욕실 한쪽편에 한때 욕조였던 곳은 이젠 하나의 기괴한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거대한 시멘트의 산... 욕조 안은 위쪽 끝까지 회갈색의 시멘트로 메워져 있었다. 그리고 한때 사람의 얼굴이 놓여져 있었을 부분까지도 시멘트가 덮여져 불룩하게 위로 솓아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이한 모습은 그속에서 홀로 뻗어져 나와 있는 오른팔 이였다. 보라색으로 변해 늘어져 있는 오른팔은 욕조 옆의 세면대 파이프에 흰 천으로 동여 메어져 있었고 자세히 살펴보니 여기저기 바늘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바닥에는 속이 빈 주사기들과 링겔 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대체 저게 뭡니까? 김 형사님!!!" 갑자기 뒷편에서 하기수의 비명이 들렸다. 어느새 2층으로 따라 올라온 그는 이제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를 경관들이 부여잡고 안정시키려 애쓰는 모습을 뒤로 한채 나는 시멘트 덩어리 쪽으로 다가갔다. 순간 나의 눈에 또하나의 괴이한 물체가 보였다. 시멘트로 덮인 얼굴부분에서 뻗어나온 것... 그것은 검은색의 플라스틱 파이프였다. 마치 시멘트 덩어리에 박아넣은듯 빼죽이 솟은 파이프의 끝에는 물방울이 맺힌채 한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이건 설마..."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파이프의 끝을 지그시 막아 보았다. "쉬--익 끄--윽 끄그그그극" 기이한 소리가 파이프로 새어 나옴과 동시에 내 뒤에 서있던 하기수와 경관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러대며 욕실 밖으로 뛰쳐 나갔다. "으아아아악~~~!!!!" 천천히 밑으로 향한 나의 시선 끝에 닿은것은 퉁퉁 불어서 보라색으로 변한 오른손이 분명하게 버둥대고 있는 모습이였다. 그렇다 그녀에게 있어서 최고의 복수는 자신이 일생을 통해 겪어온 속박을 경험케 하는 것이였다. 모두의 기대와 요구속에 얽메여 온 삶.. 그것은 삶이였다. 속박 속에서 죽는것이 아니라 그 속박 속에서 죽지 못한채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그녀가 계획한 최고의 복수였던 것이다...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cla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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